역사의 숨결/역사(세계)

무역의 역사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30

무역의 역사


인류의 역사는 수렵과 농업시대를 거쳐 현재의 공업과 상업시대를 이룩하게 되었다. 공업과 상업 위주의 경제체제가 수렵과 농업 위주의 경제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후자가 개인이나 가족단위의 자급자족제도인데 비해서 전자는 분업과 교환의 상호의존제도라고 할 수 있다.

 

분업이 더 심화되고 교환의 영역이 더 넓어지면서 보다 더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인간은 모든 지혜를 동원하게 되었다. 이 같은 새로운 영역에 대한 꿈이 콜럼버스와 마젤란을 낳게 하였고 결국은 신대륙의 발견과 이로 인한 온갖 인류의 영욕을 수반하게 되었다.


나일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고대 이집트 문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을 중심으로 한 메소포타미아문화, 인더스 ·갠지스강을 중심으로 한 인도문화, 그리고 황허강 유역의 중국 문화는 모두 큰 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후 다른 문화권은 그 이상 바다를 이용하여 더 멀고 더 넓은 시장개척을 하지 않았으나 유독 서양문화권은 지중해를 이용한 활발한 국가간의 교역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BC 1000년경에 이집트와 레바논 간에는 곡물, 파피루스및 목재 등의 교역이 성행하였으며 또 BC 800년경에는 지중해의 로도스섬을 중심으로 한 페니키안에 의한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져 일부 상인들의 자본축적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자본축적이 신대륙의 발견과 과학의 발달을 촉진시켜 결국은 무역을 일찍이 서두른 서양문화권이 세계를 제패하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당나라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거나 예물을 교환한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오며 그 후 신라 42대 흥덕왕 때에 장보고가 신라 해안에 자주 침범하는 중국해적을 소탕하고 청해진에 해상진영을 세워 이 곳을 근거지로 중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대규모 무역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교역상대국이 서양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또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시대부터는 교역의 관건이 되는 해상운송에 종사하는 자나 어부들은 천민으로 취급받아 상류층이나 다른 생계의 수단을 가진 자들은 이 분야에 진출을 하지 않아 한국의 대외무역은 위축되었으며, 결국 대원군의 쇄국주의로 현대문명으로의 개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이 인류의 발전사는 제한된 자기 영토 내에서의 산물로서 만족하지 않고 자국의 한계를 벗어나서 다른 나라와 서로 교역하여 살아온 나라가 더 부강해져왔던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특히 자국 영토 내에 부존자원이 빈곤한 나라에 있어서는 외국과의 교역이란 곧 생존을 의미하게 된다.



자본주의 성립기 이전무역.


무역의 역사는 오래되며, 이미 기원전에 페니키아인은 이집트나 동지중해에서 무역하였고,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에는 지중해 연안 무역에다 동방과의 교역으로 범위를 넓혀, 비단길을 통해 중국과 무역한 것은 유명하다. 이 시대의 교역품은 노예·귀금속·보석·고급직물 등 당시 상류층의 사치품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무역은 상품생산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로마제국 붕괴 후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한때 무역이 쇠퇴하였다가 십자군원정을 계기로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북부 도시가 무역으로 번영하여 지중해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유럽 북부에서도 한자동맹의 여러 도시를 중심으로 무역이 번영하였다. 중세의 교역지역은 더욱 확대되었고 대중화한 상품(향신료 같은 것)도 있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상층계급의 사치품 위주였다.

 

15세기말 지리상의 발견과 상업혁명은 무역을 크게 변화시켰다. 무역의 무대도 지중해와 발트해에서 아메리카대륙(신대륙)과 아시아에까지 확대되었으며, 지리상의 발견에서 주역이 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 시장에 약진하였다.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신료, 에스파냐는 신대륙에서 금·은·담배 등을 수입하고 모직물을 수출하였다. 모직물수출로 유럽은 모직물공업이 성행하였는데, 그 중심은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무역의 확대는 자본주의적 공업생산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자본주의 성립기 이후


18∼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무역에도 변혁을 일으켰다. 산업혁명으로 면공업이 기계화되었고, 면직물이 저렴하게 대량생산됨으로써 일반대중의 생활자료로서 널리 보급되고, 공업적 모직물에 대신하여 면직물이 영국의 수출무역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전세계 수출의 1/4∼1/3의 시장점유율을 차지할 만큼 신장하였다. 영국 수출품은 완제품이 많았고 수입품은 면화 등 원료와 식량이었다. 그리하여 가공무역이라는 근대적 무역으로 이행하여 영국을 <세계의 공장>, 그 밖의 각국을 원료·식량의 공급지로 한 국제분업체제가 확립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영국의 곡물조례 폐지를 계기로 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자유무역의 기운이 높아져서 무역확장에 공헌하였다. 세계무역 발전에 기여한 단 하나의 요인은 국제금본위제의 확립이었다. 금본위제를 일찍 수립한 영국에 이어서 19세기 후반에는 대다수의 국가가 금본위제로 이행하여, 각국 통화간의 교환성과 교환비율을 안정적으로 유지함으로써 무역결제를 쉽게 하고 통화면에서 통상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영국은 무역뿐만 아니라 해운업에서 우위를 차지하였으며, 국제금융면에서도 런던이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1870년대 초까지 영국은 세계무역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고 있었으나, 70년대의 불황기를 전후하여 무역의 세계에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독일과 미국의 공업발전, 특히 철강업의 발전과 더불어 그 제조공업품 수출이 증대하여 영국의 왕좌가 흔들리게 되자, 자유무역의 기운이 역전하여 다시 고율관세 부과로 국내산업을 보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해외에 대한 덤핑이 성행하였다. 영국은 이 시기에 자본수출을 확대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후 무역세계의 현저한 특징은 영국 등 유럽 여러 나라의 후퇴와 미국의 약진이다.

 

미국은 유럽국가들이 전쟁으로 경제력을 소모하던 시기에 생산력을 증진시켜, 전후 수출에서는 영국을 앞질러 제 1 위가 되었다. 또한 캐나다와 일본이 새로운 공업국으로 무역무대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1917년의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하여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세계무역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금본위제는 제 1 차세계대전으로 일시 중단되었으나 20년대 중엽부터 각국은 잇따라 금본위제로 복귀하였다.

 

무역과 국제금융의 중심지였던 런던과 더불어 새로이 뉴욕이 국제금융시장에 등장하였다. 전쟁으로 한때 쇠퇴한 국제무역은 20년대 후반에 크게 발전하였으나 29년 미국에서 시작된 세계적 대불황으로 미국·독일 등지에서 공업생산이 반감하고, 실업이 급증하여 대폭 축소되었다. 국

 

제무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자유무역에서 크게 후퇴하였다. 20년대에 부활된 금본위제는 31년 영국의 금본위제의 정지를 계기로 다시 붕괴되어 국제결제기구는 동요하였다. 각국은 해외경제 변동에 의하여 초래되는 경제나 통화의 혼란을 차단하고 자국경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국가주의적 정책으로 무역과 국제자본이동에 제한을 가하게 되었다.

 

무역에 대한 규제는 고전적 관세뿐만 아니라 수입할당제·외환관리·구상무역 등 보다 더 직접적 정책 수단을 취하게 되었다. 무역규제에 따라 다각적 세계무역은 축소되었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분열된 세계경제를 재편성하고 자유무역을 촉진할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1995년에 WTO로 확대개편됨)이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IMF·GATT체제의 기본이념은 원칙적으로 자유무역을 추진하는 데 있었지만, 전쟁 후에도 한때 많은 나라에서 수입제한을 하였다.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전쟁 후의 경제부흥을 위해서는 긴급한 수입이 필요하였으나, 그것을 충당할 수출이 되지 않아서 달러 부족현상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뒤에 유럽이나 일본에서 부흥이 진척되고 1950년대 중반에는 달러 부족도 해소되어 무역도 자유화되었다.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에 걸쳐 세계무역은 IMF·GATT체제하에서 급속히 증대하였는데,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20년간의 세계무역액은 5배로 확대되었다.

 

세계무역의 증가율은 세계의 소득증가율보다 높아서 각국 경제의 상호의존관계는 깊어졌다. 이러한 무역발전에서 나타난 하나의 특성은 선진공업국과 개발도상국간의 무역, 즉 수직무역(垂直貿易)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선진공업국 상호간의 수평무역이 상대적으로 확대한 점이었다.

 

60년대 중엽에 세계수출의 약 3/4은 선진공업국에 의하여 점유되었는데, 그것은 선진공업국의 수출성장률에 비하여 개발도상국의 수출성장률이 낮았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무역구조 변화와 관련해서 남북문제가 부각되었다.

 

세계무역 동향에 영향을 준 또 하나의 문제는 지역경제통합의 출현이며, 그 전형적 예인 EEC(유럽경제공동체)의 성공은 60년대 각 지역의 지역경제통합화 움직임의 계기가 되었다. 60년대 세계무역에서 특기할 세번째의 문제는 미국의 상대적 지위하락과 그에 따른 달러에 대한 신인(信認) 저하이다.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신인 저하는 달러위기를 부르고, 국제유동성 문제를 발생시켰다. 달러를 지탱하고 IMF체제를 유지하려는 각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달러위기는 결국 71년 여름에 달러와 금의 교환성 정지를 가져왔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20여 년 간 세계무역의 발전을 떠받쳐 온 IMF체제가 붕괴되었다. 70년대에 접어들자 세계무역은 양상이 바뀌었다.

 

71년의 스미스소니언 합의는 1년 남짓 만에 무너지고, 주요 국가들은 73년 변동환율시세제로 이행하였다. 더욱이 2번에 걸친 석유위기는 세계경제와 무역을 뒤흔들어놓아 방향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국가들에 의한 석유가격의 대폭인상은 석유소비국의 국제수지적자와 경제성장의 둔화를 가져와서 스태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이미 70년대 초에 일본이나 유럽 국가들 추격에 의한 세계경제의 동질화와 이에 따른 산업구조의 조정은 보호주의적 기운과 무역마찰을 빚어냈지만, 석유위기로 인한 성장률 둔화와 국제수지 적자는 그러한 경향을 더욱 짙게하였고, 석유위기로의 대응과정에서 보였던 각국의 적응력의 차이는 무역마찰과 보호주의를 더욱 더 촉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