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항해조례와 대륙봉쇄령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12:32

★ 항해조례

1651년 영국 공화제 정부에 의하여 제정된 해운 ·무역의 보호입법.

유럽 이외 지방의 산물을 영국이나 그 식민지로 수입할때 영국이나 그 식민지 선박으로 수송할 것, 유럽의 산물을 영국이나 그 식민지로 수입하는 경우에는 영국 선박이나 산지국 또는 최초의 선적국의 선박으로 수송할 것, 외국품의 선적은 산지국 또는 최초의 선적국 항구에 한한다는 것 등을 규정한 법입니다.

이는 영국의 왕정복구 후인 1660년에 약간의 보충과 더불어 재확인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럽 해운계를 장악하며 중계무역을 하고 있던 네덜란드를 배제하고 영국의 해운, 무역의 증대를 도모한 것으로서 이로 인해 영국과 네덜란드는 두번의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서 영국의 해운계는 유럽의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러한 항해조례는 19세기에 들어와 자유주의 경제의 풍조가 높아지면서 1849년 폐지되었습니다.


★ 대륙봉쇄령

나폴레옹 1세가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시키기 위하여 내린 칙령.

베를린칙령이라고도 합니다. 1806년 10월에 나폴레옹 1세는 예나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한 뒤, 베를린에 입성하여 이 칙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영국함대로 인해 영국에 직접적인 침략을 가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으로서는 영국에 대한 전략을 경제 제재 조치로 전환시켰습니다.

 

전문 8조, 본문 11조로 되어 있으며, 영국과의 통상, 통신을 금지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점령지대의 영국인을 포로로 하고 그들의 상품을 몰수하며, 영국 및 그 식민지로부터의 상선을 기항시키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영국 타도를 목적으로 한 이 칙령은, 영국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1세의 지배 아래에 있던 대륙 여러 나라에 고통을 줌으로써 그들의 이반을 촉진시켰으며 그 선봉인 러시아를 꺾기 위하여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나 나폴레옹 1세는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위에서 보신바와 같이 항해조례는 영국이 자국의 이익 실현을 위해서 가장 큰 경쟁자인 네덜란드를 해운계에서 밀어내기 위해 제정한 법률입니다. 이로 인해 영국의 해운력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대륙봉쇄령은 여기에 이어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해군력까지 막강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나폴레옹이 발표한 칙령입니다. 영국을 고립시킴으로서 영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를 통해 필요한 물자를 조달할 수 있었으므로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은 반면 유럽의 여타 국가들은 영국과 무역을 하지 못함으로서 심한 경제난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에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뜻에 반대해서 영국과 밀무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를 제재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감행하였다가 실패하여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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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전쟁 英蘭戰爭

 

<역사> 17세기에 식민지 쟁탈을 둘러싸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세 차례에 걸쳐 싸운 전쟁. 1651년에 영국의 항해 조례의 발표를 계기로 일어났으나, 세 차례 모두 네덜란드가 패하여 영국에게 해상 패권을 빼앗겼다.

 

영란 英蘭 : ‘잉글랜드’의 음역어

 

어떤 사람들은 영란이라는 말을 영국과 네덜란드의 줄인 말로 알고 있다. 영란은 잉글랜드의 역어이다.

 

잉글랜드은행 [Bank of England] , 영국중앙은행, 영국은행

 

1694년 W.페터슨의 제안에 따라 설립된 최초의 주식회사 형태의 은행으로, 프랑스와의 전쟁비용 조달에 바쁜 윌리엄 3세의 재정난 해소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에 따라 자본금 120만 파운드를 그대로 정부에 대출하는 대가로 그와 동액까지의 은행권 발행의 권한을 차지하였다.

 

당시에는 다른 사적 금융업자 중에도 은행권을 발행하는 데가 있었으므로 독점적인 발권은행(發券銀行)은 아니었으나, 주식제도에 의해 경영규모가 컸고 또 안정되어 있었던 점이라든가, 국왕의 재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 등으로 인해 18세기에 들어와 점차 중앙은행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해나갔다.

 

1833년 잉글랜드 은행권이 법화(法貨)로 지정되고 다른 발권은행은 점차 정리되었는데, 다만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에는 독자적인 발권은행이 남아 있지만, 이들 은행권도 잉글랜드 은행권과 함께 유통되었다. 더욱이 1844년 잉글랜드 은행조례(필은행조례)에 의하여 새로운 발권은행의 설립이 금지되기에 이르러 잉글랜드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이 압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잉글랜드 은행은 일찍부터 은행의 현금준비의 보관자로 되어 있었다. 1854년 많은 은행에서 잉글랜드 은행에 보유하고 있는 각자의 예금계정간의 대체에 의해서 그 상호간의 결제를 실시하는 방법이 채용되었다.

 

정부의 은행, 은행가의 은행으로서의 잉글랜드 은행의 중앙은행적 업무는 이와 같이 확립되어 갔는데, 그 업무의 최종적 확립을 보게 된 것은 신용의 최종공급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공황시에도 모든 정당한 고객에게 거리낌없이 대출해 줌으로써 런던의 금융구조 유지에 성공한 업적은 잉글랜드 은행에 권위를 안겨 주었으며, 그 영향은 여러 외국에서의 중앙은행 설립 촉진으로 나타났다.

 

1946년 노동당정부에 의하여 국유화되었으나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는 기본적으로 변함없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18세기 후반에서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영국이 세계경제의 중심이었던 시대에는 단지 영국의 중앙은행에 머물지 않고 세계의 중앙은행으로서 국제금융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그 후 영국 경제의 쇠퇴와 함께 국제금융계에서의 지위도 저하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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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무역주의와 FTA

 

 

현대 세계 경제의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 중 하나는 자유무역의 확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무역기구(WTO)나 유럽연합(EU)도 개별 국가의 무역에 관한 각종 규제를 철폐 또는 완화하고 자유무역을 확대해 여러 나라가 함께 잘 살아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것이죠.

 

우리나라도 이런 흐름에서 예외라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추진 중인 한국과 미국 또는 한국과 EU 간 자유무역협정(FTA)도 그 핵심은 가능한 한 교역에 관한 인위적인 규제를 줄여서 상품이나 서비스 교역을 확대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유무역주의에 대응해 다른 한편에서는 보호무역주의를 주장합니다. 무역에 관한 규제를 철폐하면 그 나라의 경쟁력이 취약한 산업이나 특정 계층이 큰 손해를 보게 되므로 국가가 나서서 수입 억제 등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죠.우리나라의 FTA 추진 과정에서도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입장과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입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음은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 무역이론의 등장 배경

 

 그런데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론적 근거로 제시하는 비교우위론은 그 내용이 어떤 것이며, 누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주장했을까요. 그리고 무역이론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절대우위론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 200년 전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 중이던 영국과 유럽의 사정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중상주의 시대에는 국가의 부(富)를 축적하기 위해 상업을 중히 여겼습니다. 또한 가능한 한 수출을 많이 하고 수입을 적게 하여 금과 은을 많이 벌어들이는 것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상주의 정책은 한 나라가 무역에서 이익을 보면 한 나라는 그만큼 손해를 본다는 것을 전제로 한 점에서 큰 잘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경제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각국이 생산비가 절대적으로 적게 드는 재화 생산에 전문화하여 서로 무역을 하게 되면 상호 간에 이득이 발생한다는 절대우위론을 주장하였습니다.

 

절대우위론은 이론적으로 이해하기가 쉽고 당시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던 영국의 산업 경쟁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앞서고 있었으므로 영국인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한편 비교우위론은 다비드 리카르도가 애덤 스미스의 절대우위론을 한층 발전시킨 무역이론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당시 영국 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지주들의 반대로 리카르도가 이 이론을 주장한 지 오랜 기간이 지나서야 채택될 정도로 사회적 거부감도 매우 큰 이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당시 프랑스와 장기간에 걸쳐 전쟁 중이었는데 이 기간에 톡톡한 재미를 본 사람들은 영국의 곡물재배 지주들이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곡물 수입이 어렵게 되자 영국 내 곡물 가격이 폭등해 큰 이득을 본 것이죠. 그런데 1815년 전쟁이 끝나고 곡물 수입이 늘어나면서 곡물 가격이 하락할 움직임을 보이자 의회는 지주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곡물법'을 만들어 곡물 수입을 금지했습니다.

 

 즉 지주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실시한 것이죠.이때 리카르도는 영국이 보호무역을 표방하고 자급자족하는 데 만족하는 나라가 될 것이냐, 아니면 자유무역정책으로 세계 무역의 중심국가가 될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자유무역이었고 그 근거로 제시한 이론이 비교우위론이죠. 그러나 리카르도의 주장을 받아들여 곡물법이 폐지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46년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비교우위론의 내용에 대해 알아볼까요. 절대우위론에 의하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모든 상품의 생산에서 절대우위(또는 절대열위)를 가질 경우 무역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우위론에 의하면 모든 재화의 생산에 절대열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도 생산비가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재화만을 전문화해 만들면 무역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자기 한 세트와 쌀 한 가마 생산비가 영국은 각각 3만원과 6만원, 미국은 각각 2만원과 3만원이라면 미국은 영국에 비해 두 제품 모두에서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업 간 상대적 경쟁력을 본다면 영국은 쌀 한 가마 생산비용으로 도자기 두 세트를 생산할 수 있는 반면, 미국은 쌀 한 가마 생산비용으로 도자기 1.5세트밖에 생산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영국은 상대적으로 생산비가 저렴한 도자기를 생산해 미국에서 쌀을 수입(영국이 직접 쌀을 생산할 때보다 낮은 가격으로)하고, 미국은 쌀을 생산해 영국에서 도자기를 수입(미국이 도자기를 생산할 때보다 낮은 가격으로)하면 영국과 미국 모두에 이익이 됨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비교우위론의 적용

 

 리카르도의 비교우위론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으나 경제학자라면 모두가 그 논리적 타당성을 인정할 정도로 공인된 경제이론입니다.

 

물론 비교우위론이 이론적인 면이나 실제 적용 면에서 문제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비교우위의 근거로 생산성을 들지만 각국마다 생산성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또한 자유무역을 확대할 경우 특정 산업(또는 계층)은 이득을 보는 반면 어느 한쪽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공평성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분업과 협력을 바탕으로 한 그의 무역이론은 경제이론은 물론 실제 경제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고 지금도 시험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U나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한 경제공동체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도 우리가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한편 경제 외적인 면에서도 비교우위론 시각에서 사회현상을 바라본다면 많은 것을 설명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교육 면에서도 어떤 사람(학교, 기관)이 절대우위에 있지 못하더라도 비교우위에 입각하여 자신의 할 일을 개척하고 준비한다면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도 보다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