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90년대 이후 개혁. 개방 정책과 중국의 사회주의 - 리어왕

지식창고지기 2010. 1. 25. 20:55

천안문 사건은 현대 중국의 정치, 사회적인 측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공산당 지배 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일어나 결국 수도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량 학살로 종결된 것은 체제 전반에 충격을 미치기에 충분했다.

 

이후 동구의 혁명과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리고 결국 소련 해체로 이어지는 국제 정세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관측을 낳았다. 그러나 중국의 체제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으며 진정한 고도경제성장은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천안문 이후

 

 천안문 사건은 정치적 억압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80년대 후반 경제적인 혼란도 사건을 유발시킨 원인이 되었다. 개혁. 개방 정책은 중국 경제의 비상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빈부격차의 확대와 물가의 급격한 상승을 가져왔다

 

. 특히 1988년에 들어서는 물가상승률이 위험수위를 넘어섰고 이는 대규모 저항을 낳은 동인이 되었다. 천안문 사건과 그 이후의 탄압에 의해 중국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지만 천안문 사건으로 인한 경제적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천안문 사건 직후 일시 중국을 빠져나갔던 외국자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오게 되었다. 애초에 외국자본의 철수는 상징적인 차원의 항의 이상의 의미는 없었으며 중국 체제의 견고성이 확인되자 상황은 원상 복귀되었다.

 

 하지만 중국 내에서는 이 시기 계획과 시장을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었으며 덩샤오핑으로 대표되는 시장중시파가 국면을 완전히 주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온건 개혁파, 혹은 보수파들은 개혁. 개방 정책의 재고를 요구했다. 사회주의적 원칙에서 벗어난 경제 개혁이 혼란을 유발했으니 개혁. 개방 정책의 본질이 사회주의적인지 자본주의적인지를 분리하여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그들은 개혁. 개방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등소평이 주도한 노선에 대한 도전이었다. 즉 정치적 투쟁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논란의 배경에는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도 있었다. 우선 1989년에서 90년 사이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이 차례로 무너졌다.

 

1989년 11월의 베를린 장벽 붕괴는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동년 12월 미. 소의 수뇌는 냉전의 종결을 선언했다. 1990년 8월, 독일은 통일되었고 1년 뒤 소련의 8월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불러왔다. 덩샤오핑과 개혁. 개방을 지지하는 세력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은 것 같다.

 

즉, 경제적 측면에서는 개혁. 개방을 지속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정치적인 민주화는 위험하다는 것이다. 1992년 초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 나서 개혁. 개방의 지속을 천명하여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남순강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

 

 1992년 초, 선전(深圳), 상하이(上海), 주하이(珠海) 등 남부의 개혁. 개방 중심지들을 방문한 덩샤오핑은 각각의 장소에서 남순강화라 불리는 일련의 연설을 하였다. 보수 세력의 거점인 베이징이 아니라 남부에서 이러한 연설을 행한 것에는 정치적인 고려가 있었다.

 

남순강화는 그동안의 개혁. 개방이 중국의 발전에 이바지했음을 지적하고 이를 더욱 빠르고 강력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남순강화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하게 간주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계획에 중점을 많이 둘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중점을 많이 둘 것인가의 문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구별이 아니다. 계획경제가 곧 사회주의가 아니며 자본주의에도 계획이 있으며, 시장경제가 곧 자본주의가 아니며 사회주의에도 시장이 있다. 계획과 시장은 모두 경제수단인 것이다.

 

사회주의의 본질은 생산력의 해방, 생산력의 발전, 착취의 소멸, 양극화의 해소를 통하여 최종적으로 공동의 부에 도달하는 데 있다. 바로 여러분에게 이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1)

 

 이러한 관점은 덩샤오핑이 일찍이 역설했던 흑묘백묘론과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공동의 부를 이루는 것이 사회주의의 목표이므로 그 수단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남순강화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우월성의 강조와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 우편향에 대한 염려 등의 구절도 있다.

 

그러나 그 동안 금기시 되었던 시장경제에 대한 언급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은 물론이다. 남순강화는 천안문 사건 이후 속도가 느려진 개혁. 개방을 다시 급진적으로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등소평에게 넘어왔고 3월 9일에 개최된 중앙정치국 전체회의에서는 남순강화의 내용을 사실상 그대로 관철했다. 1992년 10월에 개최된 제14차 전국 대표 회의에서 이러한 노선에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공식적으로 승인하였다. ‘시장경제’라는 단어가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개혁목표의 조정

 

시기

목표모형

1978년~1979년

계획경제, 상품교환가치법칙 이용

1979년~1984년 10월

계획경제 위주 시장조절 보완

1984년 10월~1987년 10월

계획 있는 상품경제

1987년 10월~1989년 6월

국가의 시장조절, 시장의 기업조절

1989년 6월~1991년

계획경제와 시장조절의 유기적 결합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2)

 

 사회주의 시장경제는 대외적으로 좀 더 적극적인 문호개방과 외자 유치를 추진하고 국내에서는 사기업 활동의 자유 보장과 자주권의 확장,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의 축소, 지나친 ‘평등주의’ 배제, 채권, 주식 등 금융시장의 적극적인 배양 등을 골자로 한다. 이러한 노선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되며 중국은 고도성장의 도상에 올라 그것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노선은 공식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충돌을 빚을 수밖에 없다. 점점 더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노동자들이 ‘착취’당한다는 것이 분명해지는 와중에 사회주의를 기치로 내건 중국공산당의 모순은 점점 깊어지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이러한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사회주의 본질론’을 재해석하려 했다.

 

덩샤오핑의 사회주의 본질론에 따르면 생산력의 발달에 의한 착취의 소멸과 공동부의 달성이 사회주의의 목표이며 시장경제, 사유제, 착취, 빈부격차 등이 존재하는 것은 사회주의로의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자본주의적 함정이 일부 나타나더라도 법을 통해 조절한다면 그리 위험하지 않고 공유제를 기초로 한 소유제가 존재한다면 사회주의는 견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공식 이데올로기와 실제 경제 현상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결국 중국에서 맑시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강력한 국가통제(관료적 자본주의)를 지닌 자본주의가 들어왔다고 평가하기도 한다.3)

 

장쩌민 시대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의 양대 주자였던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은 모두 불운하게 실각하고 제 3의 인물인 상하이 시장, 장쩌민이 후계자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1989년 6월, 자오쯔양이 물러난 당 총서기 자리를 물려받고 덩샤오핑에게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도 계승한 후 1993년에는 중화 인민 공화국 주석에 취임하여 권력 계승이 완료되었다.

 

장쩌민은 상하이 토박이로 ‘상하이방’으로 불리는 파벌을 이끌고 있으며 상하이방에 속한 인물들은 장쩌민이 권좌에 오름에 따라 중국 정계를 주름잡게 되었다. 장쩌민은 정치적 안정이 경제적 발전의 밑거름이라는 덩샤오핑의 유훈에 충실했고 장쩌민의 통치기간에 정치적 민주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유제 개혁 논쟁

 

 남순강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공식적인 채택이 있은 후 개혁적인 경제이론가들은 소유제도의 개혁을 주장했다. 이는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근거인 ‘생산수단의 사회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물론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인 사회주의를 공격할 수는 없었고 다른 형태의 이론적 정당화가 필요하였다.

 

 이들은 주식회사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했는데 주식회사의 존재는 사회주의적 원칙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국가소유는 사회주의 소유제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사회의 다양한 성격의 주주들이 참여하는 소유제가 국가소유제보다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소유제, 합작제의 정신에 더욱 가깝다는 것이다. 4)

 

설득력이 전무한 이러한 논리가 등장한 것은 중국이 실질적으로는 사회주의를 포기했다는 근거로 보인다. 개혁파들은 ‘비효율적인’ 국영기업들의 민영화를 통해 국유경제의 비중을 낮출 것을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전통적인 사회주의자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러한 논쟁은 90년대 중반 중국을 뜨겁게 달구었는데 장쩌민과 당 지도부는 결국 개혁파의 노선에 손을 들어주었다.

 

 1997년 9월 제15차 전국대표회의에서 국유경제의 역할은 양적 비중보다 주도적 작용에 있기 때문에 국유경제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또한 주식제도를 사회주의도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여 주식제도도 전면적으로 긍정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계획경제’와 ‘국가소유제’라는 전통적 사회주의 경제이론의 핵심적 범주가 사실상 해체5)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98년에는 신규주택에 대한 무상공급제가 폐지되었고 1999년 수정된 헌법은 이러한 소유제의 변화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토지는 지금도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이며 개인은 사용권만 갖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 사용권은 매매가 가능하기 때문에 소유권이나 큰 차이가 없다.6)

 

물론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국유경제의 비중이 여전히 높았고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 강도도 강했다. 이는 소련 해체 후 옐친이 주도한 급진적인 경제적 자유화가 러시아 경제를 사실상 파멸로 몰아넣은 것과 대조되는 점이었다. 장쩌민의 집권 기간에 중국의 고도성장은 계속되었고 1997년 아시아 경제 위기의 여파도 비교적 순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정치적 영역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장쩌민 정권은 경제적 영역의 자유를 확장하였지만 정치적 자유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다당제나 직접 선거에 의한 대표의 선출, 언론의 자유 등은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는 사회주의의 이념과 중국의 현실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이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여전히 탄압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에 대한 요구가 완전히 불가능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1998년경에는 이러한 논의가 상당히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결국 1999년부터 공산당의 비판이 시작되면서 다시 자유주의적 요구는 위축되었다. 한편 정치적 스펙트럼의 다른 선상에서는 ‘신좌파’로 불리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7) 빈부 격차의 확대와 노동권의 축소 등은 공식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괴리를 가져왔고 이미 사회주의나 평등과 같은 가치에 관심이 없는 정치, 경제적 엘리트들에게 도전하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90년대 이후 중국에서 빈발하는 폭동과 노사분규 등은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이 극심한 착취에 시달리는 모순은 체제에 적지 않은 위협요소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쩌민 시대에 등장한 또 다른 정치적 현상은 강력한 민족주의의 부상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나 신좌파 사상과 달리 민족주의는 체제의 후원을 받으며 팽창했다. 1997년 홍콩, 1999년 마카오의 반환으로 외세 침입에 의한 ‘굴욕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대만뿐인데 1996년 반중국적인 리덩후이 정권의 수립, 2000년 대만 독립을 외치는 민진당의 집권은 중국 민족주의와 충돌하였다. 다른 측면에서는 중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에 따른 대국의식의 형성과 국제적인 중국 위협론에 대한 반작용, 티벳이나 위구르 등의 분리 독립 움직임 등이 민족주의의 대두를 부채질했다. 공식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을 잃어가자 민족주의가 그 빈자리를 매우기 시작한 것이다.

 

후진타오 시대

 

 처음에는 과도기적 인물 정도로 평가받던 장쩌민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시기 동안 중국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2001년에는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으며 WTO에 가입하였다. 이후 몇 년에 걸쳐 후진타오에게 권력의 승계가 이루어졌으며 이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후진타오는 2002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2003년 국가주석, 2004년 중앙군사위 주석이 선출되었고 명실상부한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강택민으로 대표되는 3세대 지도부와 후진타오가 이끄는 4세대 지도부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후계자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에 의해 일찌감치 4세대 지도자로 훈련받았으며 전임자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후진타오 체제가 개막된 이후에도 중국의 고도성장은 계속되고 있다. 실질경제성장률은 2004년 10.1%, 2005년 9.9%, 2006년 11.1%, 2007년에는 11.4%에 달하여 후진타오 체제 개막 이후 평균 10%가 넘는 성장률을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추세는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2004년 4차 수정헌법에서는 공식적으로 사유재산권에 대한 불가침을 천명하였다. 이는 2007년 물권법의 통과로 더욱 명확해졌는데 물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사유 재산 역시 국유, 공유 재산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보호받는다는 원칙을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다. 8) 물권법은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시작될 무렵부터 초안 작업에 들어갔으며 2004년 개정된 헌법의 후속 조치의 성격을 띠고 있다.

 

후진타오 시대가 개막되고 2000년대 중반 들어 중국에서는 다시 이념 논쟁이 수면 위에 올라왔다. 이는 인터넷이 대중화되어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기가 좀 더 용이해졌다는 이유도 있고9) 개혁. 개방의 과정에서 누적된 정치적 불만이 지도부가 교체된 것을 계기로 활발해졌다는 측면도 있다. 최근 중국의 이념적 지형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

 물론 이는 도식화하여 나타낸 구도이고 현실은 훨씬 더 복잡하고 혼재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이를 통해 대략적인 얼개를 파악할 수는 있다. 중국공산당은 이러한 사상적 대립 속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어떤 진영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다양한 정치적 견해의 표출이 가능해졌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는 체제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결론

 

 1978년 시작된 개혁, 개방 정책은 30년에 걸친 고도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하였고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서 피폐한 중국을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겨룰 만한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개혁, 개방정책은 커다란 성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전망이 존재하고 부정적인 관측도 많이 있다. 하지만 ‘중국붕괴론’ 같은 비관적인 예측은 예전부터 계속 있었고 이러한 예측은 지금까지 빗나갔다. 중국에는 비관적인 관찰자들이 보지 못하는(혹은 보지 않으려 하는) 저력이 있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개혁, 개방 정책은 빈부격차의 극적인 확대, 노동자에 대한 끔찍한 착취, 천안문 사건과 같은 정치적 소요, 환경오염 등 산적한 문제도 발생시켰으며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를 사실상 포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왔다. 어떤 관점에서 봐도 오늘날의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라는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주의를 완전히 부정하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중국공산당의 존재의 의의 자체가 부정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도 믿지 않는,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라는 선전을 체제는 계속 행하고 있고 이에 의해 발생하는 모순은 합리화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평등을 목표로 한다는 사회에 존재하는 극단적인 불평등 등은 중국에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다.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가 힘을 잃게 되자 사회주의는 오히려 점점 더 불온한 의미를 띠며 반체제 진영의 무기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체제가 어떤 설명을 하건 오늘날의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세계적인 경제공황이나 급격한 정치적 격변 등이 없으면 중국의 고도성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고도성장은 결코 무한정 계속 될 수는 없다. 그것이 끝나는 순간 중국은 다른 형태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1)http://211.173.74.24/pub/docu/kr/AE/BD/AEBD1993002/AEBD-1993-002-002.HTM

2)임반석. 「중국 경제의 개혁과 발전」. 해남. 2005. p103 표3-1

3)유세희. 「현대 중국정치론」. 박영사. 2005. p86 각주83)

4)김익수 外. 「현대 중국의 이해」. 나남출판. 2005. p172

5)상게서 p176

6) 임반석. 「중국 경제의 개혁과 발전」. 해남. 2005. p106

7)물론 정치적 자유주의자와 신좌파가 완전히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8)정동근. 「후진타오와 화해사회」. 동아시아. 2007. p192

9)물론 인터넷에 대한 검열은 엄연히 존재한다

10)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china/11901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