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흰 지배자와 검은 노예들

지식창고지기 2010. 1. 26. 08:08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에 상륙한 곳이 당연히 인도인 줄 알고 원주민을 스페인어로 로스 인디오(Los Indio)라고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가상의 게임(simulation game)을 한번 해보자. 콜럼버스가 상륙한 곳이 인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진짜 인도로 가려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카리브해를 계속 항해했다면 지금 멕시코의 유카탄반도에 이르거나, 과테말라, 온두라스 또는 니카라과 동해안에 상륙했을 것이다. 실제로 콜럼버스는 마지막인 네번째 항해(1502~1504) 때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했다. 지금처럼 파나마운하가 뚫려 있었다면 그는 태평양으로 빠져나가서 첫번째 항해보다 몇 배나 어려운 고비를 넘긴 끝에 잘해봤자 지금의 뉴질랜드나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했을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이족이나 오스트레일리아의 검은 원주민들이 ‘로스 인디오’가 되었을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피로 물들인 콜럼버스

콜럼버스가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의 지원을 받아 카리브해 섬들에 상륙한 사실은 지금 라틴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대륙을 피로 물들게 만들었다.

콜럼버스는 이 순진한 종족들을 얕잡아보고 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온갖 고역을 시키면서 그들의 복종을 강요했다. 황금만 가지면 천당에 가는 영혼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콜럼버스는 황금을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라와크족의 광부들을 강제로 모집하여 금광의 광부로 일을 하게 했고, 책임량을 캐내지 못하면 손을 자르거나 발을 잘랐다.

 

 콜럼버스는 일을 할 수 있는 14세 이상 남자들을 모집했다. 그것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 스페인 본국의 노예시장에 끌고 가 팔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반항하던 인디언들은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리고 촌락을 불태우고 약탈은 그칠 날이 없었다. 1492년 산 살바도르에 (그가) 발을 들여놓은 후 10년간 수십만의 사람이 죽었다 (<아메리카 인디언> 투쟁사, 75쪽).

그뿐 아니라 백인들이 가져온 홍역, 천연두, 폐결핵 등 갖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하루에도 수백명씩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것은 지금의 중앙아메리카, 곧 멕시코부터 파나마까지, 그리고 남아메리카 거의 전부(포르투갈의 침략을 받은 브라질을 제외하고)를 스페인 침략자들이 살육과 약탈의 무대로 만든 서막이었다. 그들은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을 멸망시켰고, 수천만 아니면 1억이 넘을 수도 있는 ‘로스 인디오’를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었다.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침략자들이 받들고 간 십자가는 인디오들을 ‘하느님의 품 안으로’ 이끈다는 구실로 정복자의 효율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오래 전에 한국에서 상영된 <미션>이라는 영화의 결말은 ‘기독교적으로는’ 감동적이지만, 오랜 문화와 종교를 박탈당해가는 원주민들의 실상을 그린 데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미국과 캐나다 원주민들이 백인들의 비인간적 침탈과 지배를 당하면서 싸우고 패배하고, 때로는 적은 승리를 거두다가, 결국은 가난과 소외에 시달리는 피지배자로 전락해간 역사는 윤상환씨의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흰 지배자와 검은 노예들

미지의 땅이었던 지금의 북아메리카에 영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백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초반이었다. 드넓은 토지에 유럽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교역의 축으로서 그곳은 매력이 넘치는 ‘신대륙’이었다. 그들은 지금의 수도인 워싱턴과 인접한 버지니아 지역에서 금을 찾거나 담배나 면화를 재배하면서 원주민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데 돈 벌기에 혈안이 된 그들과는 달리 종교적 목적으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영국의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매서추세츠 지역을 개발하면서 장차 미국을 지배할 종교적, 사상적 토대를 쌓아가고 있었다.

물론 영국의 청교도들이 뉴잉글랜드 해안에 처음 도착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이미 16세기 초부터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 해안에 도착해서 인디언 부족들과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1620년경에 플리머스(Plymouth)에 소위 필그림들(Pilgrims)이 도착해서 하나의 안정된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 필그림 교도들은 청교도들과는 달리 소박한 신교도 농부들이었다. 그들은 죄악으로 물든 세상을 개종시키기보다는 그러한 세상과 분리되어 그들만의 순수하고 단순한 삶을 살려는 자들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은 1608년에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도시가 너무 상업적으로 발달해서 타락해 있음을 보고 결국 1620년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였다 (최중·김봉중 함께 쓰고 수정 보완함, <한국인이면 꼭 짚어야 할 미국의 역사>[이하 <미국의 역사>], 1992년 3월, 조합공동체 소나무, 43쪽).

1620년 11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9주간 고난의 항해를 한 끝에 지금 미국 동해안의 케이프 코드에 도착한 이 필그림들이 미국을 지배할 와스프의 선조였던 것이다. 1630년 3월에는 청교도 1천여명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고, 그 이래 10년 동안 1만8천여명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새 예루살렘에 선택된 민족으로서 하느님이 요구하는 지상 낙원을 위해서 선봉장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러한 선민의식과 타락한 세상을 개혁한다는 선교적인 사명의식은 앞으로 미국이 성장하면서 항상 미국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았던 사상이며, 특히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들과 접촉할 때 이러한 사상은 크게 작용하였다.

 

 먼저 그들이 북미 대륙에서 인디언들과 접촉하였을 때 청교도들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인디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문명화시키는 책임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이러한 인디언 선교 희망이 인디언들의 독특한 생활 환경과 사회여건으로 무산되자 이제는 무력으로 인디언들의 땅을 점령하였다 (위의 책, 48~49쪽).

흑인·19세기 후반 조선인이 당한 일과 인디언이 겪은 일에는 무슨 차이가 있나

바로 위에 인용한 대목에서 ‘인디언’을 ‘흑인’이나 19세기 후반의 ‘조선인’으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국의 보수적 기독교가 한반도에 상륙한 이래, 순수한 선교 목적을 벗어나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앞장에 선 역사,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는 현상에 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필그림들이 북아메리카 동해안에 상륙한 1621년 초보다 16개월쯤 앞선 “1619년 8월 하순 어느 날, 적어도 세 명의 여자를 포함한 20명의 흑인을 실은 한 척의 범선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우연히 상륙했다. 체사피크만 근해로 들어온 사략선인 이 배의 출현은 우연적이어서 확실히 그 결과가 미친 오랜 영향만큼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새로운 한 인종이 제임스타운 발견 후 12년 만에 처음으로 영국 개척지로 들어온 것이다 (벤자민 콸스 지음, 조성훈 이미숙 옮김, <미국 흑인사>, 2002년 12월, 백산서당, 39쪽). * 1940년 위스콘신대학교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은 벤자민 콸스(Benjamin Quarles)가 쓴 <미국 흑인사>(The Negro in the Making of America)는 본격적인 미국 흑인사 연구서로서 학계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터치스톤 북스(Touchstone Books)의 1996년판을 번역한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나온 이 분야의 개설서이다.

제임스타운에 부려진 흑인들은 노예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제 하인’이 되었다. 그런데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계약제 하인은 영국의 식민지이던 ‘신대륙’에서 노동자로서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자유노동자의 임금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인들이 필연적으로 눈길을 돌린 쪽이 흑인 노예들이었다.

흑인노예제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8세기 초부터 아랍인들과 무어족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사하라사막을 통해 지중해 국가들에 팔아넘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오래 뒤에 노예무역을 본격화한 것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인들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나중에 그곳이 인도가 아님이 밝혀진 뒤 ‘서쪽에 있는 인도’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에 상륙한 이래 개척된 중남미 지역의 대농장들에 흑인 노예들을 ‘공급’했다.

영국은 1663년에 찰스 2세가 왕실 모험단 회사(Royal Adventurers)에 특허장을 줌으로써 뒤늦게 아프리카 노예무역에 참가하게 되었다. 17세기말까지는 영국은 네덜란드와는 비교되지 않는 소규모의 노예무역을 하였으나 북미 대륙에서의 그들의 식민지 발달과 해상세력의 성장으로 18세기말 경에는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주요한 노예무역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윽고 18세기 내내 영국은 적어도 6백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운반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역사>, 25~26쪽).

6백만 명으로 시작된 흑인노예, 300년 뒤에 겨우 3500만명 밖에 안 된 이유는 뭘까

영국이 한 세기 동안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수출’한 흑인 노예가 ‘적어도 6백만명’이었다니 다른 유럽 국가들의 ‘선적’까지 계산하면 그 수는 훨씬 커질 것이다. 그리고 1865년 남북전쟁의 결과로 노예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흑인들이 미국 땅으로 팔려갔을까?

지난 2006년 10월 17일 미국 인구는 3억을 넘어섰다. 2005년 통계를 보면 미국인 중 흑인의 비율이 11.9%였으므로, 3억 중 3천5백70만여명이 흑인인 셈이다. 그런데 1663년부터 영국이 한 세기 가까이 팔아넘긴 노예 6백만여 명과 그 이후 미국으로 강제 이송된 흑인들이 정상적으로 결혼해서 자손을 늘려갔다면 3백년이 넘는 기간에 겨우 3천5백만명을 넘겼을까? 흑인들이 백인에 비해 자식을 더 많이 낳는 추세를 감안하면 지금 미국의 흑인 인구는 1억을 넘었어야 정상이 아닐까?

우리는 여기서 엄청난 수의 흑인들이 비참한 노예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거나, 자유를 찾아 달아나다 백인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북아메리카 본토의 내전이나 해외에서 벌어진 전쟁에 나갔다가 전사한 흑인들도 부지기수일 것이다.

‘흰 지배자들’이 인신매매로 돈을 벌거나 농장이나 다른 사업장의 종신 노예노동자로 부리려고 아프리카에서 ‘사냥’해 오는 과정에서 흑인들이 당한 고통과 희생은 인류사에서 가장 참혹한 장으로 기록되는 것이었다. 그들 나름으로는 평화롭게, 풍족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애를 나누면서 살던 아프리카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기습해오는 백인들의 총칼과 그물 앞에서 속절없이 포로가 되어 가족과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노예선에 실려야 했다.

아프리카인들이 미국 대륙까지 팔려가는 과정은 참혹한 인간 역사의 드라마였다. 그들이 받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이루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이 아프리카 노예 사냥꾼에 의해 붙들려서 멀고 먼 적도선을 따라 손목과 목을 쇠줄로 묶인 채 여러 사람의 무역꾼들의 손을 거쳐 황금 해안으로 불리는 서해안으로 끌려왔다.

 

어떨 때는 1000 마일 이상을 쇠사 슬에 묶여 맨발로 행군하여 끌려왔는데 그 과정에서 5명 중 2명 꼴로 생명을 잃었다. 그들이 겪게 되는 육체적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며 어떤 자들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역사>, 26쪽).

한 영국인 선장은 그 참상을 이렇게 기록했다고 한다.

흑인들은 그들이 모국을 떠나게 되자 질색을 하고 가끔 카누와 보트 그리 고 배에서 뛰어내려 죽을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