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조약'의 체결로 청 정부는 제국주의의 도구로 전락하였는데, 이는 국내외 보수세력이 더욱 결합되도록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동시에 제국주의와 중화민족, 봉건통치계급과 인민대중 사이의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20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중국의 민족자본주의 경제는 비교적 크게 발전하여 중국사회에는 자산계급과 무산계급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계급이 출현하였다. 끊임없이 고조되는 반제(反帝) 반봉건(反封建) 투쟁 속에서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자산계급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1911년 손중산(孫中山: 1886~1925)이 영도한 신해혁명(辛亥革命)이다.
손중산(孫中山)은 중국의 위대한 자산계급 혁명가이다. 1905년 그는 일본에서 중국 최초의 자산계급 정당인 동맹회(同盟會: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으로 개편)를 창설하여 '만주족 통치세력 축출, 한족정권 수립, 민주공화국 건설, 토지의 균등화'라는 민주주의 혁명 강령을 제기하였다. 후에 손중산은 이상의 16자로 된 동맹회의 강령을 "민족(民族), 민권(民權), 민생(民生)", 즉 삼민주의(三民主義)로 개괄하여 중국에 자산계급 공화국을 건립하려고 하였다.
동맹회가 성립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수차례의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1911년 10월 10일, 호북(湖北) 무창(武昌)에서 일어난 군사봉기가 성공하자 혁명의 열기가 급속도로 발전하여 전국을 휩쓸었다. 1912년 설날,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남경에 성립되고 손중산은 임시 대통령을 맡음으로써 마침내 신해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이민족에 의해 건립된 청왕조의 160여년 통치를 무너뜨려 2천여년에 걸친 중국의 봉건군주제를 종결시키고 중화민국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중국의 민족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하였고 자산계급의 역량이 미약하였기 때문에 자산계급 혁명 정당은 원천적인 연약성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광대한 민중들을 충분히 움직여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도록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수세력과 타협을 하였다. 1912년 2월, 입헌군주파와 북양군벌(北洋軍閥) 원세개(袁世凱)의 협공으로 손중산은 임시 대통령직을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신해혁명의 성과는 원세개(袁世凱)에게 넘어감으로써 중국은 독립된 자산계급 민주국가를 이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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