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근대사-백일유신(百日維新: 1898)

지식창고지기 2010. 2. 18. 09:10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중국은 무력하게 제국주의 열강에 의해 분할되어야만 했다. 심각한 민족적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강유위(康有爲), 담사동(譚嗣同), 양계초(梁啓超) 등을 대표로 하는 유신파(維新派)들은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 같은 변법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을 일으켜 국가를 부흥시키고 중국의 운명을 구하고자 하였다.

유신파들은 전통적인 군주전제(君主專制) 대신에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실시할 것과, 유가경전(儒家經典)의 반복을 내용으로 하는 팔고문(八股文) 시험 제도를 폐지하고 서방의 정치사회학설과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학교 공장 철도 광산 상업을 부흥시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것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여러 차례의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주장을 조정에 진술하였다.

유신파의 주장은 청 정부내에서 광서(光緖)황제를 필두로 하는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1898년 6월 11일 광서황제는 '명정국시(明定國是)' 조서를 반포하여 변법(變法)의 결심을 표명하였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월 21일 변법이 실패로 끝나기까지 100일 동안 계속되었기 때문에 역사상에서는 이를 '백일유신(百日維新)'이라 일컫는다. 또 중국의 전통적인 간지(干支) 기년(紀年)에 의하면 그 해가 무술년(戊戌年)이기 때문에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도 한다. '백일유신' 기간에 광서황제는 100여 조항의 변법 조령(詔令)을 반포하였다.

그러나 '무술변법' 운동은 청 정부내에서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를 비롯한 봉건수구파들의 격렬한 반대와 비판을 받았다. 당시 청 정부의 권력은 실제로 자희태후가 장악하고 있었기에 자희태후는 9월 21일 명령을 내려 광서황제를 구금하였다. 보수파의 잔혹한 진압하에서 무술변법운동은 불과 100일만에 실패로 끝났으며, 유신파의 주요 인물들은 이로 인하여 대부분 피살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