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현대사-북벌전쟁(北伐戰爭: 1926)&제1차 국공내전(1927~1937)

지식창고지기 2010. 2. 18. 09:16

북벌전쟁(北伐戰爭: 1926)

 

중국공산당이 창립된 후, 1922년 최초의 철저한 반제·반봉건의 민주주의 혁명 강령을 제기하였으며, 1923년 국민당과 혁명 통일전선을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1924년 손중산(孫中山)은 광주(廣州)에서 국민당을 개편하고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하였다. 이로써 국·공 양당은 공동으로 황포군관학교(黃浦軍官學校)를 창설하고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을 조직하여 군벌세력을 정벌하였다. 국민혁명군은 먼저 광동(廣東)에서 군벌세력을 격파한 후, 1926년 정식으로 북진하여 북양군벌(北洋軍閥)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북벌전쟁(北伐戰爭)'이라 일컫는다.

북벌전쟁의 시작 단계는 매우 순조로워 국민혁명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중국의 남부와 중부를 점령하였으며, 이로부터 혁명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1925년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 내부에는 분화가 발생하여 장개석(蔣介石)을 대표로 하는 우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1927년 4월 북벌전쟁에서 승리하였을 때, 장개석은 상해에서 정변을 일으켜 기습적으로 공산당원들을 대규모로 탄압하였다. 계속하여 국민당은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장개석은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중앙정치회의 주석을 맡아 군정 대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며, 중국 현대사에서는 이 시기를 제1차 국내혁명전쟁시기라 일컫는다.

 

 

제1차 국공내전(1927~1937)

 

1927년 장개석(蔣介石)의 공산당에 대한 무력탄압으로 인해 중국공산당은 90%에 달하는 역량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은 이에 붕괴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하여 1927년 8월 1일 공산당원 주은래(周恩來), 주덕(朱德), 하룡(賀龍) 등은 남창(南昌)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국민당에 대항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중국공산당은 독자적인 무장 능력을 갖게 되었다. 8월 7일 중공(中共) 중앙(中央)에서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심각한 과오를 범한 지도자 진독수(陳獨秀)의 직무를 해제시키고, 토지혁명과 무장투쟁을 통하여 국민당에 항거한다는 방침을 확립하였다. 같은 해 9월 모택동은 호남(湖南)에서 추수봉기(秋收起義)를 영도하여 공농홍군(工農紅軍)을 창설하고 정강산(井岡山) 농촌혁명근거지(農村革命根據地)를 개척하였다. 1928년 4월 남창봉기(南昌起義)를 일으킨 부대도 정강산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인민을 동원하고 영도하여 농촌에서 도시를 포위하고 정권을 무력적으로 탈취하는 혁명노선을 표방하기 시작하였다.

장개석은 4·12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에 중국공산당과 그들의 무장혁명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공산당의 강서(江西)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하여 다섯 차례에 걸친 대규모 군사토벌을 개시하였다. 1934년 10월 장개석의 군사토벌을 벗어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의 동북을 점거한 후 심각해진 민족적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공농홍군은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를 철수하기로 결정하고 북방으로 이동하는 전략의 대전환을 시작하였다.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공농홍군의 25,000리 대장정이다.

장정 도중 1935년 1월 중국공산당은 귀주성(貴州省) 준의(遵義)에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중국공산당과 홍군 속에서 모택동의 지도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로부터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된 중국공산당은 혁명의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1935년 10월 중국 공농홍군은 일년의 힘든 노정을 거쳐 여러 차례의 위험과 장애를 극복하면서 섬서(陝西), 감숙(甘肅), 요하(遼夏)의 접경지역에 성공적으로 도달하여 그곳에 항일혁명근거지를 세웠다. 그후 섬북(陝北) 연안(延安)은 항일과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