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제는 이름이 영정(赢政: BC 259 ~ BC 210), 진(秦) 장양왕(莊襄王)의 아들로, 장양왕이 죽은 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후에 6국을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하여, '시황제(始皇帝: 최초의 황제라는 뜻)'라 일컬었다. 왕의 자리에 25년, 황제의 자리에 12년간 있었다. 49세에 병으로 죽었으며 장지는 여읍(郦邑: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북)에 있다. 영정(赢政)은 조(趙)나라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승상 여불위(呂不韋)와 선태후(宣太后)의 측근 노애가 전권을 쥐고 흔들었다. 기원전 238년에 친정을 하였다. 노애는 영정이 외지로 나간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영정은 일거에 반란을 평정하여 노애를 죽이고 태후를 감금하였다. 이듬해에 여불위를 자결케 하고 대권을 모두 탈취하였다. 계속하여 영정은 이사(李斯) 등의 책략을 받아들여 거금을 주고 6국(제, 초, 연, 한, 조, 위)의 권신(權臣)들을 매수하여 그들의 군신 관계를 이간시키고 원교근공(遠交近攻: 먼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하는 것) 정책을 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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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기원전 230년부터 기원전 221년 까지 10년 사이에 6국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전중국을 통일, 함양(咸陽: 지금의 섬서성 함양시)에 도읍을 정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봉건 중앙집권 국가를 건설하였다. 진(秦)의 통일로 오랫동안 제후들의 할거와 혼전이 끊이지 않던 국면이 종식됨으로써,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고 생산력은 증대되었다. 영정은 천하를 통일한 후에 최고통치자를 '황제(皇帝)'라 규정하고, 스스로를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었다. 그는 진왕조의 통치가 만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책을 추진하였다. 첫째, 국가의 모든 정무는 황제가 결재하였으며, 중앙에는 삼공구경제(三公九卿制)를 시행하여 황제의 군정업무를 보좌하였다. 둘째, 군현제(郡縣制)를 추진하여 전국을 36개의 군(郡)으로 나누고, 군 아래에는 현(縣)을 설치하였으며, 군현의 장은 확제가 직접 임면하였다. 셋째, 도량형과 화폐, 문자를 통일하고, 도로를 정비하여 각지의 교통체계를 강화하였다. 진시황이 취한 이러한 조치들은 봉건국가의 통일을 굳건히 다지면서, 백성들에 대한 통치를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기원전 214년에 남쪽으로 병력을 파견하여 백월(百越)을 평정하고, 민중(闽中), 남해(南海), 계림(桂林), 상군(象郡: 지금의 광서 숭좌현<崇左縣>) 등 4개의 군을 증설하였다. 같은 해에 다시 대장군 몽염(蒙恬)을 북으로 파견하여 흉노를 정벌하고, 지금의 내몽고 하투(河套) 일대를 수복, 내륙의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진나라의 국경은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로는 농서(陇西), 북으로는 장성(長城: 만리장성) 일대, 남으로는 상군(象郡)에 이르게 되어, 진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다민족 봉건국가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영정은 유능한 정치가로 중국역사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각종 부역이 많고 형벌이 혹독하였다. 백성들은 수확의 3분의 2를 세금으로 내야 했으며, 이 외에도 각종 무거운 부역과 병역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는 70여만명을 징발하여 위수(渭水) 남쪽의 아방궁(阿房宮)과 여산릉(驪山陵) 건설에 거액을 쏟아부었다. 그는 또 농민을 징발하여 진(秦), 조(趙), 연(燕)나라의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하고 동서로 더욱 확장하였다. 즉 서쪽 임도(臨洮: 지금의 감숙성 민현<岷縣>)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요동(遼東: 지금의 요녕성 요양시<遼陽市> 서북)에 이르는 장성을 건설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그것은 고대 중국의 위대한 토목공사의 하나로, 고대 중국인민들의 피와 땀과 지혜의 결정체이다. 당시 전국에서 병역과 부역으로 징집된 인원이 무려 150여만명에 달했으며, 남자가 부족하면 여자들도 보급물자 수송에 잡혀갔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진시황의 통치시기에는 법률도 대단히 엄격하고 가혹하였다. 백성들의 반항을 막기 위해, 그는 민간의 무기를 수거하여 없앴으며, 이 외에도 한 사람이 죽을 죄를 지으면 '족주(族誅)'라 하여 그 친족들도 함께 사형에 처하고, 한 집이 법을 어기면 '연좌(連坐)'라 하여 그 마을도 모두 같은 죄로 다스렸다. 백성들은 언제든지 법률 위반으로 고발당하여, 그 벌로 힘든 부역을 하거나 다리를 잘리거나 코가 베이거나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으니, 관청으로 압송되는 죄인이 항상 길에 가득하였다. 기원전 213년에 진시황은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 이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진나라의 역사, 의약, 점술, 식수(植樹) 이외의 책은 모두 불사르게 했다. 그 이듬해 방사(方士)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은 진시황의 독재 전횡과 강압 정치에 대해 몰래 모의하였다. 뒤에 진시황이 그 사실을 알고 그들을 잡아들이려 하자 노생과 후생은 도주하였다. 이에 크게 진노한 진시황은 그에 연루된 유생 460여명을 잡아다 전부 생매장하였다. 이 두 사건을 역사에서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 한다. 이를 통하여 진시황이 당시에 사상과 문화를 얼마나 혹독하게 탄압하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진시황은 또 공명심이 강하고 낭비가 극심하였다. 그는 즉위한지 12년 동안 다섯 차례나 순행(巡行)에 올라 많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다녔으며, 길가에 송덕비(頌德碑)를 세워서 자신의 공적을 천하에 과시하기도 하였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진나라는 내부 갈등이 격화되어 소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마지막 순행에 올랐을 때,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中車府令: 황제의 문서를 관리하는 환관) 조고(趙高), 가장 총애하던 막내 아들 호해(胡孩)가 그를 수행하였다. 그는 전당강(錢塘江)을 지나 회계군(會稽郡)의 오중(吳中)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평원진(平原津: 지금의 산동성 평원현 동남)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사구(沙丘: 지금의 하북성 광종현<廣宗縣>)에 이르러 병세가 더욱 위중해졌다. 스스로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것을 알아차린 진시황은 황급히 이사와 조고에게 유서를 작성하여 유서와 옥새를 장남 부소(扶蘇)에게 전달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즉시 함양으로 돌아가 장례를 주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사가 유서를 작성하여 진시황의 결재를 맡으러 갔을 때 진시황은 이미 세상을 떠나 버렸다. 당시에 부소는 진시황에게 '갱유' 사건의 부당함을 간언하다 진시황의 미움을 사서 경성에서 쫓겨나 상군(上郡) 몽염의 군중에서 감군(監軍: 군대를 감독하는 벼슬)을 맡고 있었다. 조고는 그때까지 몽염의 집안과는 원수 관계에 있었던지라 부소가 왕위를 계승하여 몽염이 중용되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라 판단하여, 유서를 내놓지 않고 비밀리에 호해와 왕위 찬탈을 모의하였다. 그는 또 갖은 협박과 회유로 이사를 끌어들여 가짜 유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이 가짜 유서의 내용은 부소가 외지에서 공을 세우지도 못한채 오히려 아버지를 원망하기만 하니 유서를 보는 즉시 몽염과 함께 자살하라고 명하는 것이었다. 몽염은 이 가짜 유서의 내용을 보고 미심쩍은 곳이 많아 자살하지 않았지만, 부소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온후하였던지라 유서의 내용을 사실로 믿고 즉시 자살하였다.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발설하지 않고 비밀에 붙인채 진시황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수레의 문을 닫은 다음 주렴을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백관들에게는 진시황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매일 수레 밖에서 상소문을 올렸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군을 거느리고 수레를 호위하면서 황급히 함양으로 돌아갔다. 무더운 날씨 탓에 진시황의 시신이 부패하여 악취가 밖으로 새어나가자, 조고는 절인 생선을 많이 사오게 하여 수레마다 가득 싣게 하였다. 시신 썩는 냄새를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절인 생선 냄새를 함께 섞여 나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함양에 도착한 후에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공포하고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진시황은 역사상 시황제 영정에 대한 통칭으로 사용되어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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