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현대정치가-개혁 개방의 설계사 등소평(鄧小平)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3

등소평의 일생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 1904~1997)은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이면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일생 동안 세 번의 정치적 좌절을 거치면서 실각하자 서방의 중국문제 전문가들은 그를 "중국공산당의 영수가 될 수 없는" 인물로 꼽았지만, 그는 특유의 기지와 용기, 인내심을 발휘하여 마침내 중국공산당의 두 번째 영도자가 되었다. 세 차례의 정치적 좌절을 겪은 후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등소평은 중국의 부국강병과 개혁개방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이른 바 중국식 사회주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였다.

1904년 8월 24일 등소평은 사천성 광안현(廣安縣) 협흥향(協興鄕) 패방촌(牌坊村)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등선성(鄧先聖)이다. 당시 국운이 다한 청나라 정부는 부패 무능하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서양 열강들은 중국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1911년 손문(孫文)이 이끄는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등소평은 불과 7세의 어린이로 사숙(私塾: 서당)에서 신식 소학교로 전학했으며, 학교 다닐 때 이름은 등희현(鄧希賢)이었다. 

<프랑스유학시절 모습>

1918년 말에 사천성 중경(重慶)에 있는 프랑스 유학 예비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년 후인 16세 때에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3전 3기'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시작하였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유럽 지부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에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기관지 편집 업무에 참여하였다. 1924년 주은래(周恩來), 이부춘(李富春) 등이 국내혁명으로 중국에 돌아가자, 이 해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등소평은 유럽 총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5년 6월 '5.30 사건'으로 핍박받던 상해 노동자들을 성원하다가 프랑스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소련 모스크바로 도피하였다.

1926년 3월 풍옥상(馮玉祥)을 따라 귀국하여 9월에 중산군사학교(中山軍事學校) 정치교관에 임명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중국 서북부의 풍옥산 장군 휘하에서 정치활동을 하였다.

1927년 장개석(蔣介石)은 상해와 남경을 점령한 후 본격적인 공산당원 색출 작업에 나섰다. 7월 풍옥상도 자신의 부대에서 공산당원을 숙청하기 시작하여 등소평은 50여명의 공산당원들과 함께 거기서 축출당했다. 등소평은 즉시 한구(漢口)로 남하하여 중국공산당 중앙 기관에 들어가 이름을 등희한에서 등소평(鄧小平)으로 바꾸고 비밀 투쟁에 참가하였다. 중공 중앙 기관에 들어간 이후 등소평의 당내 지위는 급속히 상승하여 중공 중앙 비서장(1929년 여름까지)을 역임하였다. 이때 그는 불과 23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1929년 봄과 1930년 초에 장운일(張雲逸) 등과 함께 중국 남부의 광서(廣西)에서 백색봉기(白色起義)와 용주봉기(龍州起義)를 주도하고, 중국 공농홍군 제7군, 제8군과 좌강(左江), 우강(右江) 혁명근거지를 창설하였다.

1931년 등소평은 부대를 이끌고 홍군 주력부대와 합세하기 위하여 강서(江西)로 가던 도중에 국민당 군대의 공격을 받고 군단장 장운일과 연락이 끊겼다. 등소평은 즉시 일부의 부대를 이끌고 강서 수의(義)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하였다. 광서에 있을 때 등소평은 여러 차례 상해로 돌아가서 중앙에 업무 보고를 하였으며, 중앙의 지도자를 따라 중앙소비에트구에 들어가 '혁명수도' 서금(瑞金)의 현장(縣長)과 현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32년 강서성 남부와 복건성 서부에 위치한 중앙혁명근거지로 가서 군사위원회 총정치부 비서장, 홍군(紅軍) 신문 ≪홍성(紅星)≫의 편집장, 중국공산당 강서지방조직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그러나 1933년에는 '반라명(反羅明)' 노선을 일으켜 모택동(毛澤東)의 주장을 옹호하다가 당내의 좌경 세력에 의해 모든 직위에서 파면당하였다. 이것이 등소평의 정치무대에서 첫 번째 좌절이다.

 

1934년 10월 장정(長征)에 참가한 등소평은 그 해 말에 복위되어 중국공산당 총정치부 비서장 겸 ≪홍성보(紅星報)≫의 편집장을 역임하였다. 1935년 1월에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개최된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 참석하였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팔로군(第八路軍)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그는 팔로군 총정치부 부주임을 역임하였다. 그 후 129사단 정치위원을 역임하면서, 사단장 유백승(劉伯承)과 함께 진기예(晋冀豫) 등의 항일근거지를 창설하고, 그 지역의 항일전쟁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개하였다.

1945년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으며, 해방전쟁 시기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진기노예(晋冀魯豫) 야전군(후에는 중원야전군, 제2야전군으로 개명되엇음)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47년에 그는 유백승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황하(黃河)를 건너 남쪽으로 대별산(大別山) 지구로 진격, 국민당 군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1949년에는 해방전쟁에서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회해(淮海)전투와 도강(渡江)전투에서 총전선 지휘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유백성, 진의(陳毅) 등과 함께 인민해방군을 통솔하여 국민당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한 다음, 화동(華東), 중남(中南), 서남(西南)의 각 성으로 진격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는 중앙인민정부위원, 중국공산당 중앙 서남국(西南局) 제1서기, 서남 군사정치위원회 부주석, 서남 군사지구 정치위원을 역임하였다. 1952년에는 중앙인민정부 정무원(1954년 국무원으로 개편되었음) 부총리를 역임하고, 1954년에는 중국공산당 중앙 비서장,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1955년 4월 중국공산당 7기 5중전회에서 임표(林彪)와 함께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1956년에는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의 규정 수정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으며, 8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당선되었다.

1957년 모택동이 일으킨 '반우파' 운동 중에 판공실 주임을 역임하였으며, 1958년에는 모택동의 '대약진', '대련강철(大鍊鋼鐵)', '인민공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59년 중국대륙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등소평은 사상을 반성하면서 팽덕회(彭德懷)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숙청된 이후 등소평도 점점 모택동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1956~1963년 사이에는 여러 차례 모스크바로 가서 소련의 정치 지도자들과 회담을 가졌으며, 1965년 1월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타도 대상에 올랐던 유소기(劉少奇)에 이어 그도 공개적인 비판을 받고 중남해(中南海)에 연금되었다. 이것이 그의 정치무대에서 두 번째 좌절이다.

 

1966년 8월 '홍위병(紅衛兵)' 운동이 일어난 이후 혁명의 공포가 중국 전역을 뒤덮었다. 농촌에서 도시에 이르기까지, 공장에서 학교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감옥이요 도살장이었다. 그러한 와중에 등소평은 주은래의 부탁에 따라 중남해에서 한 걸음도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7~8월 사이에 등소평은 중남해에서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으며, 9월에는 그의 다섯 자녀들이 모두 중남해에서 쫓겨났다.

1968년 10월 소집된 중국공산당 8기 12중전회에서 유소기는 당에서 영원히 축출되었으며, 등소평은 '엄중 경고'를 받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에서 파면되었다. 1969~1973년 사이에는 강서성에 있는 트랙트 공장으로 추방되어 육체노동에 종사하였다.

'임표사건' 후에 주은래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섭검영(葉劍英)이 중앙군사위원회의 모든 일상적인 업무를 주관하였다. '임표사건'은 등소평의 두 번째 재기의 기회가 되었다. 1973년 3월 그는 부총리직에 복위되어, 8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 12월에는 다시 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74년 모택동의 지시로 전국에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일어났을 때 비판의 칼날은 주은래와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무실파(務實派)'로 향했다. 이 해 4월에 등소평은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UN 6기 특별회의에 참석하여 모택동의 '3개 세계'에 관한 전략사상을 전세계에 발표하였다.(1974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발표한 대외정책의 기조인 '3개 세계'란, 미·소의 초강대국을 제1세계, 기타 서방 세계의 선진국과 동유럽내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제2세계, 중국을 포함한 개발도상국을 제3세계로 구분한 것이다.)

1974년 가을 국무원 총리 주은래(周恩來)의 병세가 위중해진 이후 그는 당과 정부의 일상적인 업무를 총괄하였다. 1975년 1월에는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국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역임하여 극히 혼란했던 정치 상황을 수습하면서, 당시의 최대 권력세력으로 당권 탈취를 노리던 강청(江靑) 등 '사인방' 집단과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때부터 등소평의 지위는 총리 서리로 상승하여 군사, 경제 등의 업무 전반에 관한 정비에 착수하였으며, 이로써 등소평은 사인방의 주요 타도 대상이 되었다. 1976년 1월 8일 주은래가 사망하고 그해 4월 5일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는 천안문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다시 당내외의 모든 직위에서 파면되었다. 이것이 그의 정치무대에서 세 번째 좌절이다.

 

1976년 7월 6일 홍군의 아버지로 불리던 주덕(朱德)에 이어 9월 9일 모택동도 세상을 떠나자, 그 해 10월 화국봉(華國鋒)과 섭검영이 연합하여 강청을 비롯한 사인방을 체포하고 정국을 수습하였다. 1977년 등소평은 화국봉에게 두차례나 서신을 보내 충성을 다짐하였으며, 그 해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다시 원래의 직위를 그대로 회복하였다. 같은 해 8월 11기 1중전회에서 중앙 부주석,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1978년 3월 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으며, 같은 해 12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그는 중국공산당의 역사적인 정책 변환에 대하여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등소평의 설계를 바탕으로 중국의 개혁이 농촌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1980년 2월 중공 11기 5중전회에서 등소평은 호요방(胡耀邦)을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추천 임명하고, 같은 해 8월에 화국봉을 밀어내고 조자양(趙紫陽)을 국무원 총리에 추천 임명하였다. 호요방과 조자양은 각각 등소평의 좌우에 서서 그의 개혁개방 노선을 보좌하는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이때부터 등소평은 대외개방정책을 추진, 국제무역의 확대, 국외자금의 이용, 국외의 선진기술과 관리경험 도입 등을 통하여 중국경제의 발전을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그전에 등소평은 먼저 홍콩과 마카오에 인접한 광동성과 복건성의 심천(深圳), 주해(珠海), 하문(廈門), 산두(汕頭)에 경제특구를 설치하였다. 이후 개혁개방의 시험지가 된 이 지역의 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하였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는 그의 주도로 입안된 <건국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關于建國以來黨的若干歷史問題的決議)>를 통과시켰으며, 이 회의에서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78년부터 그는 중국공산당의 주요한 정책 결정권자로서 당에서 제정하고 시행하는 새로운 발전 시기의 노선과 방침, 정책을 영도하였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와 모택동 만년기의 오류를 시정하고 모택동의 업적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노선의 견지, 인민민주전정의 견지, 공산당 영도의 견지,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모택동사상의 견지라는 4개 기본 원칙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의 전국적인 사업 중점을 경제건설에 두고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중국의 실제 상황에 결부시켜 중국식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사회주의노선을 견지하면서 현대화건설을 위한 네 가지 필수 요건을 강조했다.

첫째, 행정기구와 경제체제의 개혁을 통하여 간부의 혁명화, 연소화, 지식화, 전문화를 실현한다.

둘째, 사회주의 정신문명을 건설한다.

셋째, 경제영역과 기타영역의 범죄활동을 방지한다.

넷째, 당의 조직과 기강을 정비한다.

등소평은 중국의 통일에 대해서도 매우 많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일국양제(一國兩制)'의 구상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는 항상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원수나 정부 수뇌, 외국 공산당 지도자, 기타 정당 대표 등 각계 인사들을 접견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외국을 방문하여 중국인의 해외 교류를 확대하고, 중국의 대외 경제, 기술, 과학 교류를 증진시키는 등, 중국의 현대화건설에 유익한 국제적 여건 조성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1982년 12기 1중전회에서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때 중앙 주석과 부주석은 폐지되었음), 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1983년 제6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회원회 주석에 당선되었다. 농촌개혁의 성공을 계기로 등소평은 개혁의 방향을 도시로 옮겼다. 1984년 중공 12기 3중전회에서 <경제체제 개혁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킨 후 전면적인 도시개혁에 착수하였다. 이 해에 등소평은 14개 연안 항구도시의 개방 확대를 비준하고, 1985년에는 다시 장강삼각주, 주강삼강주, 민남하장천(閔南廈장泉) 삼각지구와 요동반도, 교동(膠東)반도를 연해 경제개방구로 확대하였다.

1987년 10월 중국공산당 13기 1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당선되었으며, 1989년 11월 중국공산당 13기 5중전회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사임하였다. 1992년 봄, 그는 남방을 순시하고 중요한 담화(즉, '남순강화')를 발표하였다. 그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전체회의에서는 남순강화의 정신에 의거하여 '개혁 개방과 경제 발전의 가속화에 관한 결정(關于加快改革開放和經濟發展的決定)'을 하였다.

1992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국식 사회주의 이론을 정립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수립하여 개혁의 행보를 더욱 가속화 할 것을 천명하였다.

1997년 2월 19일 오후 9시 8분(한국시각 오후 10시 8분) 등소평은 북경에서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등소평의 중요한 문장과 담화의 내용은 ≪등소평문선(鄧小平文選)≫(1~3권)에 수록되어 있다.

등소평은 경제개혁에서 거대한 성취를 이룩하였지만 그에 비해 정치개혁에서는 오히려 손실이 더 많았다. 등소평은 대외개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지만 서방의 정치제도를 좋아하지는 않았다. 등소평은 '4개의 기본원칙'을 고수하면서 정치와 사회적 안정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념적으로는 극히 보수적인 노선을 걸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경제개혁은 거대한 성과를 거두면서도 앞으로 갈수록 더욱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79년 북경 서단(西單)민주사건의 진압, 87년, 89년 자신이 선정한 후계자 호요방과 조자양 축출, 6.4 천안문 민주운동 진압 등은 등소평 일생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