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현대정치가-모택동의 충직한 동반자 주은래(周恩來)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1

주은래(周恩來: 저우은라이, 1898~1976)는 마르크스주의자,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이다.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면서 중국인민해방군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다. 1949~1976년에 중화인민공화국 총리를 역임하였다. 본적은 절강성 소흥(紹興)이고, 강소성 회안(淮安)에서 태어났다.

1917년 천진(天津) 남개학교(南開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19년 중국으로 돌아가서 9월에 남개대학(南開大學)에 입학하였다. 5. 4운동 중에는 천진 학생계의 대표가 되었으며, 다른 활동적인 사람들과 함께 진보단체인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하였다.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서 혼자서 어럽게 유학하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에는 조세염(趙世炎: 공산당 초기 주요 인물) 등과 유럽 중국소년공산당(이듬해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유럽 지부로 개명하였음)을 조직하였다.

그 후 중국사회주의 청년단 유럽 지부 서기, 중국공산당 유럽 지부장을 역임하였다.

1924년 가을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 광동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 국민혁명군 제1군 정치부 주임, 제1군 당부대표 등을 역임한 다음, 계속하여 중국공산당 광동지역 위원회 위원장, 상임위원 겸 군사부장을 역임하였다. 1927년 3월 북벌을 시작한 국민혁명군이 상해 인근에 도달하자, 상해 노동자들의 제3차 무장봉기를 영도하여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북양군벌 부대를 몰아내었다. 5월 중국공산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으며, 5기 1중전회에서는 중앙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다. 7월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임시 상무위원회 위원(총 5명)을 역임하였다.

국공합작이 결렬된 후 그는 하룡(賀龍), 엽정(葉挺), 주덕(朱德), 유백승(劉伯承) 등과 함께 8월 1일 강서성 남창(南昌)에서 무장봉기를 이끌고 중국공산당 선봉위원회 서기를 역임하였다.

1928년 중국공산당 6기 1중전회에서 정치국 상임위원에 당선되었으며, 그후 중앙조직부장, 중앙군위 서기를 역임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은 상해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안전을 보장하고, 각지의 공산당 무장투쟁을 지도하며, 국민당 통치구에서의 혁명사업을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실질적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의 주요 책임자였다.

1931년 이후 중국공산당 소비에트지구 중앙국 서기, 중국 공농홍군 총정치위원 겸 제1방면군 총정치위원,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하였다. 1933년 봄, 주덕과 함께 홍군을 지휘하여 국민당 군대의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제4차 토벌을 물리쳤다. 1934년 10월 장정에 참가하였다.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遵義)에서 거행된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즉 준의회의)에서 모택동(毛澤東) 주장을 지지하고, 계속하여 중앙의 주요 군사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12월, 당시 섬서성 서안(西安)에 주둔하고 있던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항일을 거부하고 반공에 전념하던 장개석(蔣介石) 반기를 들고 그를 무력으로 구금하는 '서안사변(西安事變)'을 일으켰다. 주은래는 중국공산당 전권 대표에 임명되어 진방헌(秦邦憲), 섭검영(葉劍英) 등과 함께 서안으로 가서 장개석과 협상을 벌였다. 마침내 장개석으로부터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하자"는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냄으로써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항일전쟁 시기에 주은래는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장기간 중경(重慶)과 국민당 통치 지역에 머물면서 통일전선 과업을 수행하고, 각계의 항일 역량을 결집시켜 중국공산당 중앙 장강국(長江局)과 남방국(南方局)의 임무를 영도하였다. 그는 국공합작을 견지하고, 민주당파, 진보적 지식인사, 애국인사, 국제우호인사들을 적극적으로 결속하여 반공의 역류를 제지하고 일본 투항 위험을 극복하였다.

1945년 중국공산당 7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서기처 서기에 당선되었다.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그는 내전을 제지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국민당과 협상을 진행하였다.

1946년 여름 전면적인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후 그는 중앙군위 부주석 겸 총참모장 대리를 역임, 모택동 조직에 협력하여 해방전쟁을 지휘함과 동시에 국민당 통치구의 혁명운동을 선도하였다.

 

<주은래 생가> - 강소성 회안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줄곧 정부 총리를 역임하면서 외교부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부주석 및 주석,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중앙군위 부주석 등을 겸임하였다.  그는 당과 국가의 일상적이면서도 복잡한 업무를 처리하였다. 중국의 국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처음 몇 개의 5개년계획은 모두 그의 주관 하에 제정되고 조직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는 경제건설은 반드시 안정적이고 균형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사회주의 시기의 통일전선 사업과 지식인 사업, 과학문화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중대한 외교정책의 제정에 참여하고 직접 그것을 집행하였다. 1954년에는 제네바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고, 베트남(남방 제외),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그는 중국을 대표하여 평화공존 5개항 원칙을 제창하여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에 대한 기준을 만들었다. 1955년 아시아 아프리카 29개국이 인도네시아에서 거행한 "반둥회의"에서 평화공존을 주장하고 식민주의를 반대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각국을 순방하고, 세계 각국의 지도자와 우호인사들을 접견함으로써 우호증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그는 임표(林彪) 강청(江靑) 집단의 파괴공작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단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필요한 국가 사업을 시행함으로써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는데 최선을 다하고, 당내외의 간부들을 보호하는데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중미, 중일 관계 정상화를 실현시키고 유엔에서 중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1972년 방광암에 걸린 이후에도 계속 업무를 보았다.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중국에 공업, 농업, 국방, 과학기술의 현대화를 실현하자는 호소문을 제출했다.

1976년 1월 8일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주요 저작은 모두 ≪주은래선집(周恩來選集)≫에 수록되어 있다. 주은래는 20년대에 등영초(鄧潁超)와 결혼하였으며 자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