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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Kurd] 은 어떤 민족인가

지식창고지기 2010. 3. 10. 08:04

쿠르드족 [Kurd] 은 어떤 민족인가

터키 ·이라크 ·이란에 걸친 쿠르디스탄 지역을 주요 거주지로 하는 종족. 
 
본문


본래 아리아 계통의 종족으로서 전통적인 종족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최대의 정치단위는 아슈레트(ashret)이며, 이하 티라(tira) ·헬(khel)로 세분된다. 대부분이 이슬람교의 수니파에 속하며 시아파는 소수이다. 산악지대의 주민은 재빠르고 사나운 반(半)유목민이며, 평야의 주민은 농경에 종사한다. 민족의식이 강하고, 사용 언어는 일반적으로 쿠르만주 또는 키루다시라고 불리는 이란 어계(語系)의 한 방언으로, 외래어휘를 포함하고 있다. 산악지대의 주민은 문맹률이 높지만 도시주민은 교육시설의 보급과 경제 향상으로 문맹률은 감소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종족사(種族史)는 고전문학도 역사문헌도 거의 없기 때문에 잘 알 수 없지만 고대 수메르 문서에 나타나는 구투(Gutu) ·쿠티(Kuti) 또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 등에 나오는 카르두치(Carduchi)가 그 원조로 지적되고 있다. 중세에는 아라비아인의 지배를 받았으나 11∼12세기에는 자립하였으며, 그 분파에서 아이유브왕조(1169∼1250)가 출현하였다. 16세기 초엽에 오스만 투르크제국에게 정복되었으나, 17세기에 오스만 ·사파비 왕조 간의 조약으로서, 오스만 투르크와 이란 양국으로 분할되었으며, 20세기에는 이라크가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이라크령으로도 분속(分屬)되었다.

 

터키령의 쿠르드족은 1919년 케말 아타튀르크의 민족 항전에 대립하여 20년의 세브르조약으로 자치정권이 약속되었으나 로잔조약으로 취소되었다. 25년에는 술탄제(制)의 부활을 요구하며 무장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이란령의 쿠르드족은 제2차 세계대전후,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소련군 철수와 함께 해체되었다. 이라크령의 쿠르드족은 대폭적인 자치를 요구하여 때때로 무력항쟁을 전개하고 있으나 그 때마다 진압당하고 있다. 이라크에서는 현재 쿠르드어가 공용어로 인정되고 있으며, 의회와 기타의 공직에서는 인구비례에 의해서 의석수와 공직자의 수가 정해지고 있다. 

 

1) 터키의 쿠르드족

 

터키 건국자인 무스타파 케말은 공화국 초기부터 Kemalism으로 통칭되는 터키화 정책을 취하여 쿠르드족의 주권을 말살하였다. 1991년까지 쿠르드어는 어떤 용도로든지 사용이 금지되었으며 쿠르드인들은 '산악 터키인'이라 불렸다. 이러한 터키화 정책에 의해 많은 터키 쿠르드인들이 터키 민족에 동화되었다. 그래서 초기의 민족저항운동은 사그러들었었다.

 

그러나 1984년부터 쿠르디스탄 노동당(PKK)의 민족저항운동이 시작되어 정부군과 내전에 돌입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 전쟁은 터키 국가 발전에 커다란 위협과 손실을 가져다 주고 있어 터키의 가장 큰 사회 이슈중에 하나이다. 쿠르드 민족 정치세력외에 일반 쿠르드인들은 터키에 동화된채로 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일반 쿠르드인들이 정부에 반하는 감정을 가지는 이유는 쿠르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터키 동남부의 경제적 저개발이다. 이러한 사회적 여건은 PKK를 지원하는 한 요소이다.

 

현재 터키 쿠르드인들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국제사회에 쿠르드 문화와 터키 쿠르드인들의 인권 상황을 알리면서 쿠르드 문제를 국제 여론화시키는 일들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쿠르드족의 민족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터키 국내 정치상황은 터키 쿠르드족에 대한 선교적 접근에 장애 요소가 되고 있다. 쿠르드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사실보다 그들과의 접촉 자체가 정치적인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쿠르드어 교육 및 출판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고 사회적 여건 자체가 쿠르드어를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않기때문에 선교에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터키에는 현재 약 5-600명의 전세계로부터 온 사역자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중 상당 수가 쿠르드족 사역에 동원될 수 있다. 터키 현지 교회 지도자들 또한 터키 동남부의 복음화율이 극히 저조함을 안타까워하며 동남부 사역을 위해서 여러가지 준비를 하고 있다. 현재 동남부 쿠르드인들이 집중하여 살고 있는 곳에는 사역자가 4-5명 있다. 터키 동남부 사역(쿠르드족 사역)을 위해서 비지니스 선교전략이 요구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인터콥을 비롯해서 미국의 단체들도 준비하고 있다.

 

2) 이라크 쿠르드족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민족의 주권을 가장 많이 인정받은 쿠르드족 집단이다. 1970년 정부와의 자치 협상에서 쿠르드어 교육과 교육어로서 쿠르드어가 허용되었으며 이라크 정부는 1974년 자치법을 공표하여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족이 자치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치지역내에 키르쿡(유전지대)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불만족하여 저항운동을 시작하였다. 실제로 정부의 조치들은 중앙정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회유정책에 불과하였으며 자치 법마저도 실제적인 쿠르드족의 자치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라크 정부는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이 제압되지 않자 1975년부터 쿠르드족에 대한 강경 정책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자행된 쿠르디스탄 초토화 작전과 안팔작전(Operations Anfal)이 가장 유명한데 이 작전을 통해 4,000개 이상의 쿠르드족 촌락이 초토화되었으며 수십만 명이 학살되고 수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이 안팔작전 기간에 화학무기의 사용으로 할랍자 마을 전주민 5000명이 5분 안에 즉사한 사건은 세계에 잘 알려졌다. 이 사건은 전체 8회에 걸쳐 진행된 안팔작전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1988년 1년간 진행된 안팔작전에서만 쿠르드족 민간인이 10만 명 이상 죽게 되었다.

 

최근에는 1991년 걸프전 직후에 발생한 쿠르드족 봉기에 대한 이라크군의 강경 진압으로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고 이들은 1997년 현재까지 터키와 이란 국경지대 천막촌에서 국제 구호기구의 구호물자로 생명을 연명하고 있다. 1990년 걸프전으로 인한 UN의 대이라크 무역 제재조치로 이라크 어린이들이 하루에 4000명씩 죽어가는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하여 국제 인권단체들의 반UN제재 운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쿠르드족 어린이들의 상황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처지에 놓여있다. 그러나 민족 국가가 없는 이라크 쿠르드족은 자체 내의 내분으로 자신의 민족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이라크 쿠르드족의 인권 침해 사실은 1991년 이후에 전세계적으로 알려졌으며 이에 따라 쿠르드족의 문제가 국제 문제화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세계 교회가 쿠르드족 선교에 관심을 가지게 하셨다.

 

지금은 이라크 쿠르드족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렵다. UN의 이라크 제재조치에 의해 이라크는 단지 요르단과의 육로만 열려있다. 국제전화나 팩스도 아주 제한적으로 열려있어서 일반인이 통신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지금 쿠르드족 사역을 위해서 사역자가 바그다드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며 이는 매우 필요한 조치이다. 그 곳에서 많은 쿠르드족을 만날 수 있으며 이라크 쿠르드족 선교접근 전략들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북부 쿠르디스탄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안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이라크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그칠때 이라크 선교뿐만 아니라 쿠르드족 선교의 베이스를 구축할 수 있다.

 

3) 이란 쿠르드족


이란 쿠르드족은 20세기에 들어 팔레비 왕정 치하에서 심하게 탄압받았다. 그래서 1979년 호메이니 이슬람 혁명은 이란의 쿠르드족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호메이니 정권은 혁명에 열렬하게 동조했던 쿠르드족의 열망을 무시하고 말았다. 호메이니 정부는 이슬람 주의를 내세워 소수민족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슬람 주의는 민족적 구별, 사회 계층적 구별 없이 무슬림으로서 모두가 평등 하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주권을 주장하는 쿠르드족을 용인할 수 없었다.

 

현재 이란은 이라크 쿠르드족 난민들을 위해 가장 활발히 구호 활동을 하는 나라이며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이란의 이슬람 주의를 쿠르드족에게 전파하고 있다. 이란 국경지대의 쿠르드족 사회에는 현재 이슬람 부흥 주의가 크게 확산되고 있다. 반면 이란 내의 쿠르드족의 민족 저항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탄압하고 있으며 쿠르드족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테러를 자행함으로써 국제적인 테러 국가의 악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란의 마하바드에서는 과거 1946년에 쿠르드 국가가 1년간 수립되었던 적이 있다. 현재 마하바드는 세넨다즈와 함께 이란 쿠르드지역의 중심도시이다. 이란은 역사적으로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 대해 지도자를 암살하는 수법으로 대항했다. 이러한 전략은 유효하여 현재 이란내에서 쿠르드족의 민족주의 운동은 수그러 들었고 겉으로 보기에 평안해 보인다.

 

이란은 쿠르드족 선교에 있어서 관문국가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란의 국어인 페르시아어는 쿠르드어와 같은 친족언어이며 이란인들은 쿠르드인들과 인종적으로도 가깝다. 또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크게 두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이란의 서부와 이란의 북부 호라산 지역이다. 그런데, 이란의 쿠르드족 가운데 사역자가 직접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본다. 대부분의 쿠르드족 도시가 이란내에서 대도시에 속하지 않고 있으며 외국인이 들어가서 살기에는 신분확보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쿠르드 지역과 가까운 대도시인 타브리즈나 이스파한이 적당한 관문도시이다. 타브리즈에는 큰 대학이 있어 학생신분으로 들어가기에 용이하다. 그리고 타브리즈는 터키나 이라크와의 교통도 매우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4) 아르메니아 쿠르드족


아르메니아의 쿠르드족은 전세계 쿠르드족 집단 가운데 가장 자유롭게 쿠르드족의 주권을 누렸던 집단이다.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약 반세기 동안 아르메니아 쿠르드족은 작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지원으로 쿠르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쿠르드어 신문인 Riya Teze가 발간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쿠르드 방송국이 설립되었으며 쿠르드족 민속무용과 음악이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1988년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내의 카라바그 사태에 연루되면서 아르메니아 내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나면서 아르메니아의 쿠르드족이 그 민족주의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쿠르드족 문화 창달과 연구 부문은 아르메니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 예로서 예레반에 있는 국립과학대 오리엔탈 연구소에서는 쿠르드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연구물들과 학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서 발간되는 "Acta Kurdica"라는 학술지는 쿠르드 언어, 문학, 문화, 역사, 사회, 정치, 경제 등 전분야에 대한 훌륭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