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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 독립운동 원인과 결과

지식창고지기 2010. 3. 10. 08:06

쿠르드족 독립운동 원인과 결과

 

 

기원


쿠르드인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우선 종족의 체질적 형태가 지역마다 다르고, 2천만이 넘는 쿠르드인들의 분포지역도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일단 논의의 공간적 배경을 쿠르드인의 전통적인 중심지인 쿠르디스탄 중부지역으로 한정한다면, 그 기원문제는 기원전 2천년경 두 개의 수메르 비문에 보이는 'Kar-da-ka'와, 그 후 기원전 1천년 경에 등장하는 'Kur-ti-e'라는 종족이름의 'Kurd' 와의 관련성 여부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사적인 배경 설명이나 어원론적인 분석에 실패함으로써 학문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Karduk'을 'Kurd'와 동일시하는 이론으로 기원문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Kurd'를 고대 메디아 왕국과 페르시아에 거주하던 'Kyrtioi' 혹은 'Cyrtii'로 보는 견해와 기원전 6세기 경 우라르투(Urartu)국을 지칭하는 터키내 국수주의 학자들의 주장 등 매우 다양하다.

 
쿠르드인의 체질적인 특징도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쿠르디스탄 동부지역에 대한 인류학적 조사를 실시한 Stolze는 그 곳 쿠르드 주민들의 체질적 특성을 단두와 갈색피부로 규정하고 있다. 서부 쿠르드인을 조사한 Von Luschan은 쿠르드족의 절대 다수는 금발에 장두형이라고 밝히고 있다. 동부 쿠르드족과의 현저한 차이에 대해 그는 "초기 순수 쿠르드족의 특징은 푸른 눈, 장두형이었으나, 후일 투르크족, 아르메니아인, 특히 이란계 종족들과 섞이면서 일부 지역에서 갈색, 단두형의 특성도 발견된다" 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쿠르디스탄의 여러 지역에서 현지참여조사를 한 바있는 인류학자 소안(E.Soane)이 언급한 쿠르드족의 외관은 다음과 같다.

"북부 쿠르드인은 호리호리하고 큰 키, 긴 매부리코, 작은 입술, 타원형 얼굴을 가졌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긴 콧수염에 예외 없이 깨끗이 면도를 하고 있다. 그들 중에는 유럽인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푸른 눈과 금발을 가진 하얀 피부색의 사람들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남부 쿠르드족은 얼굴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넓은 편이고 걸음걸이가 특이하고 거칠다. 무작위 표본조사 결과, 남부 쿠르드족 남자 40명 중 9명만이 키가 6피트(183Cm) 이하였다. 보폭이 넓고 무거우며 외관에서 주위를 압도하는 우람한 모습을 지녔다. 용감한 전사로서 맹위를 떨치던 현대판 메데스인의 모습이다. 그들 중에는 또한 밝은 색의 물결머리에, 흔들거리는 긴 콧수염, 흰 피부색을 가진 노르만 족을 연상케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얼굴형만을 본다면 앵글로-색슨족과 동일한 기원이라고 생각되어 지는 사람들도 흔히 눈에 띈다."

쿠르드인의 기원문제는 그 지역의 역사적 변천만큼이나 복잡다단하고 장구한 시간적 배경을 갖고 있다. 현재로서는 "쿠르드족은 쿠르디스탄 지역에서 형성되어 수많은 주변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한 인도-유럽어 계통의 언어(페르시아어의 북서 방언)를 사용하는 메데스인 계통의 인종일 개연성이 많다."

인종과 언어,종교


인종

백인계 아리안족으로 기원전 7세기경 칼데아인과 동맹을 맺어 앗시리아인을 멸망시킨 메디아 왕국의 건설자인 메데스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언어

인도-유럽어족인 페르시아어의 서부 방언 계통이며, 쿠르드어의 절대다수가 북동방언인 케르만지(Kermanji)어, 남동방언인 소라니(Sorani)어, 기타 고라니 (Gorani), 루리(Luri), 자자(Zaza)어 등을 구사하고 있다.

종교

7세기 아랍인의 정복 시대에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 쿠르드인의 95% 이상이 순니파의 샤피(Shafi) 학파에 속하며, 일부 쉬아파와 벡타쉬(Bektash)로 지칭되는 알라위파(Alawis) 추종자도 있다.

이슬람교는 크게 순니와 쉬 종파로 나누어지며, 순니종파는 한발리(Hanbalite), 샤피(Shafi), 말리키(Maliki)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순니의 범주에는 벡타쉬(Bektash), 낙쉬반디(Nakshibandi), 예세비(Yesevi), 메블레비(Mevlevi) 같은 신비주의 경향의 교단도 포함된다.

분포


시리아, 이라크, 이란, 터키, 소련에 걸친 평균 고도 3,500m의 산악지대와 이라크 북부의 유전지대, 티그리스강 상류 평원으로 구성되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반농반목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쿠르드인은 2200만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소수 민족이다. 그 중에 약 절반(1000만명) 가량이 터키 영토에 거주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초점이 되고 있는 이라크의 350만 쿠르드인들은 북부 유전지대를 중심으로, 상대적으로 자치와 독자적인 경제권을 형성하면서 살고 있고, 인구비례에 따라 자신들의 대표를 중앙의회나 정계로 보내 민족적인 권리를 보장받고 있다. 이에 비하면 터키의 쿠르드인들은 박해와 차별, 철저한 동화정책으로 민족적 정체성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 있다.

역사


쿠르드인의 초기 역사는 아직 확립된 단계가 아니다. 현재의 쿠르드인이 역사적 실체로 뚜렷이 등장하는 시기는 이슬람 창시 직후 정통 칼리프의 정복기인 7세기 경이다. 특히 3대 칼리프 우마르(Umar, 634-644)의 이란 원정시 반(Van), 하카리(Hakkari)등 쿠르드 지역이 아랍군에게 정복 당한 후, 쿠르드인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런 면에서 쿠르드인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인 최초의 비아랍계 종족들 중의 하나였다. 우라미야(Umawiya:661-750)와 압바스(Abbas) 왕조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그들은 뚜럿한 민족적 각성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이슬람이라는 전체속에 용해된 한 무슬림 집단으로, 이슬람 국가의 부흥과 이슬람 문화의 창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11세기 말경 압바스 왕조가 쇠퇴하자, 수많은 쿠르드 공국들이 일시 독립을 유지하기도 하고, 셀주크 및 오스만 제국 통치 시대에는 일부 쿠르드 집단은 부족적 자치를 누렸다. 12세기 중세 십자군 전쟁을 통해 나타난 이슬람 세계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Saladin은 쿠르드인으로 기독교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왕국을 합병시키는 등 대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는 쿠르드 제국을 건설하지는 않았다. 그 후 쿠르드족은 13세기부터 15세기까지 몽고족과 오스만 제국 지배하에 들어간다.

14세기에 티무르의 통치하에 놓이면서 시련과 핍박을 받으면서 쿠르드족은 약 30개의 소공국으로 분열되는 등, 민족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다만 일시적인 힘의 공백상태나 주변국가들 간의 세력균형의 필요성에 의하여 한시적으로 민족자치가 허용되었다.

문제 발생의 역사적 배경 및 원인


역사상 주목할 만한 것은 쿠르드 민족국가의 등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도 2-3천m의 황량한 산악지대가 갖는 지형적 한계와, 목축과 유목에 의존하는 그들의 생활양식 때문에, 쿠르드족들이 주변 국가들의 위협속에서 조직적인 정치통합을 통한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리하여 자력으로 독립이나 자치정부 수립이 어려운 상황에서 중앙정부의 강약과 이웃국가들의 연대나 반목에 따라 완전복속과 부족적 자치라는 약소민족의 두 가지 선택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서구의 본격적인 침략과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하는 오스만 정책에 대항해 기득권과 민족적 권리를 주도하려는 쿠르드인들의 견고하고 조직적인 반란이 1826-1880년까지 계속되었다.


나아가 당시 중동과 아시아를 풍미하던 민족주의 운동이 고취되어 쿠르드의 지적 엘리트 집단은 1898년 처음으로 '쿠르드 저널'을 발간하며 쿠르드 민족문제에 대한 국제적 여론 투쟁에 몰입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들은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크게 고무되어 쿠르디스탄 독립을 위한 외교적 접촉에도 실험을 기울였다. 이러한 독립 노력은 1차 대전으로 오스만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와해되면서 더욱 구체화 될 수 있었다.

급기야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고 1차 대전을 마무리하기 위한 1920년의 세브르 조약(Sevres)에 의해 쿠르디스탄 지역의 포괄적 자치가 보장되기에 이르렀다. 세브르 조약에 따르면 대체적으로 현재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인의 지역을 포함하는 오스만 쿠르디스탄은, 만약 쿠르드 주민이 원한다면 본조약 발효 1년 이내에 독립적인 완전한 자치권을 새로운 터키 공화국내에서 부여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 이태리는 유프라테스강 서부의 거의 대부분 쿠르드 영토를 배제하여 가설적인 미래 쿠르드 국가의 국경을 설정하는 가운데, 이들 지역은 '특별히 프랑스 이해지대' 로 규정되었다. 동(同)협정의 제 27조에 나타난 바와 같이 쿠르드 산악지대와 자지레 평지의 일부 뿐만 아니라 킬리스, 아인탑, 우르파, 마르딘, 누사이빈, 비레드직, 자지레 이븐 오마르의 도시들까지도 시리아의 위임 통치국 프랑스에 귀속되었다. 프랑스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합병되었던 이들 지역은 오스만 제국치하 쿠르디스탄 영토의 약 1/3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또한 동(同)협정 제 89조에 따라서 대부분 쿠르드 주민들이 거주하는 무스, 비틀리스, 만, 에르진칸 등의 오스만 쿠르디스탄 1/3이 미국의 위임통치국 아르메니아에 귀속되도록 했다. 그러므로 독립 쿠르디스탄이라는 페르시아령 쿠르디스탄은 언급할 필요도 없이 비옥한 지대와 전통적 방목지대를 포함해서 원래 쿠르드인 지역 2/3가 상실된 국가인 것이다. 즉 쿠르드인 영토는 5부분으로 분할되어 그 중앙에만 쿠르드 독립국이 남아 있도록 하고 외곽 서쪽은 프랑스, 남쪽은 시리아, 동쪽은 페르시아, 북쪽은 아르메니아에 편입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쿠르디스탄의 이러한 분할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쿠르드 민족주의에 대한 동정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에 힘입어 특히 쿠르드의 독립과 자치권에 관련된 제 62조-64조 (2) 까지 세 개의 조항이 세브르 조약에 명기됨으로써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62조에는 프랑스 영국 합동 위원회로 하여금 6개월내에 쿠르드족의 우세한 지역인 유프라테스 동부와 아르메니아 국경선의 남부, 그리고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를 포함한 투르크 국경선 접경지역에 자치권을 준비하도록 하고 있다. 제 63조에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가 임명하는 3인 위원회에 의해 제 64조의 명시된 조건을 3달내에 시행하도록 터어키 정부에게 동의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제 64조에는 쿠르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조건의 윤곽이 나타나 있다.

이러한 3개의 조항은 쿠르드인이 하나의 국민으로서 존재하고 독립된 민족국가를 창설할 근거가 되어, 이후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은 본 조약의 이행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쿠르드인의 자치와 독립에 관련된 세브르 조약의 조항들은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많은 이유로 영국은 세브르 조약을 철회했던 것이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전쟁으로 사문화 되고 1923년 새로 로잔(Lausanne)조약이 새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는 아예 쿠르디스탄의 영토적 지위와 쿠르드 민족문제는 언급되지도 못한 채, 영토는 분할되고 쿠르드 문제는 역사의 뒤안으로 잊혀지는 시점이 되었다. 이로써 쿠르드인 지역은 개별국가의 독립에 따라 사분오열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결국 쿠르디스탄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소련 등 5개국에 걸쳐 제멋대로 구획되었다. 이 시점은 오랫동안 잠재해 왔던 쿠르드 민족주의라는 화약고에 불이 붙는 순간이기도 했다.

터키의 쿠르드인들은 아나톨리아 동남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생존과 자치를 위한 투쟁을 전재해 오고 있다. 공화정 이후 터키 중앙정부에 대한 그들의 저항은 어느 국가에서 보다 더욱 가혹하고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독실한 순니파 무슬림들이 절대 다수인 터키의 쿠르드인들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케말 아타투르크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쿠르드인의 자치적 존재가 무시된 공화국의 선포와, 케말정권이 지향하는 비종교적 세속주의가 그거이었다. 이리하여 탈이슬람적 터키화를 강요하는 공화국 정부에 맞서 1921-37년 사이에 산발적인 쿠르드 반란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925년 2월, 낙쉬반디 수피종단의 쿠르드인 지도자인 쉐이크 사이드(Sheikh Said)에 의한 반란이었다. 이 반란은 잔혹하게 진압되었고, 쿠르드 민족주의를 마비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탄압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1927년 쿠르드 민족조직인 '코이분(Khoybun)' 이 결성되어 조직적인 저항이 계속되었지만, 쿠르드 민족자치의 확보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이 때 대표적인 저항운동으로는 1927년 터키군 장교 출신인 쉐이크 이흐산 누리(Sheikh Ihsan Nuri)의 반란과, 1930년 역시 터키군 출신 쿠르드 장교들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산발적인 쿠르드 반란은 1937년 6월 세이크 레자(Seyid Reza)의 마지막 저항으로 끝을 맺었지만, 터키 정부군의 강력한 응징과 보복적 소탕은 터키내 쿠르드인들의 가슴 속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60년간은 철저한 터키화의 과정이 반복되고 강화되는 기간이었다.

본 조약이 발효된 1년 이내에 62조에 명시된 지역내의 대부분의 쿠르드주민들이 터어키로부터 독립을 원한다는 것을 국제연맹 위원회에 표명한다면 그리고 동위원회가 그것이 합당하다고 여긴다면, 따라서 터어키는 당연히 이러한 권고안을 실행하고 그 지역의 모든 권리와 명분을 포기하는데 동의한다. 만약 그러한 포기선언이 이루어지면 지금까지 모술지역에 포하되어온 쿠르디스탄의 지역에 거주하는 쿠르드 민족의 독립국가를 적극 찬동하는 주요 연합국 측에서는 아무런 반대가 없을 것이다.

쿠르드인의 정체성 유지노력

쿠르드인의 민족주의 운동의 고찰


강대국들에 의한 인위적인 영토분할과 이질적 요소의 극대화를 통한 효과적인 통치라는 전제하에 이슬람권에서는 여러 분쟁들(3) 이일어나고 있다. 쿠르드 민족 문제 역시 종교적 요소보다 민족적 이질감에서 비롯된 서구 강대국의 자국 이익에 맞물린 정책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악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이 강한 쿠르드족은 주변 다른 인종들과는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인종적으로 뚜렷한 특징과 상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쿠르드족간에도 인종, 부족, 언어적으로 서로 다르며, 독립된 산악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갈등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요즘에는 도시와 산악 쿠르드인들간의 문화적 갈등이 심각한 상황이다.

따라서 통일된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는데 많은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더욱이 쿠르드족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구소련으로 나뉘어 거주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처럼 5개국으로 분열된 쿠르드족들은 터키,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취약한 국가의 정치적 환경에서 독립적으로 쿠르드 저항운동의 성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쿠르드족의 봉기는 쿠르드인을 결속시키는 민족의 동원력을 아직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터키, 이란, 이라크의 3개국에서 개별적으로 정치현상에 따라 독립운동이 일어나는데 그치고 있다.

쿠르드 문제는 분쟁의 규모와 지역적 광범위성, 그리고 관련 국가들의 이해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고 종파적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한 무슬림간의 반목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인구 2200만의 대규모 민족공동체를 형성해 왔으나 강대국들의 인위적 영토분할로 한순간 피지배 분단민족으로 전락한 중동의 가장 전형적인 소수민족이라는 점도 하나의 이슈가 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아랍-유대 갈등, 터키를 겨냥한 아르메니아인들의 저항 운동, 레바논 내전, 이란-이라크 전쟁.

터키 쿠르드족의 저항운동 / 저항운동의 역사


1차대전 이후 1920년에 체결된 세브르(Sevres) 조약에서는 터키 동남부 쿠르드인의 자치권 보장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터키-쿠르드 연합군의 터키 독립전쟁 승리 이후 무스타파 케말은 터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923년 로잔 조약 체결 이후 쿠르디스탄은 결국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련 등 5개국으로 구획되었다.

이것은 쿠르드인의 투쟁을 가속화시켰으며, '조국 갖기 운동' 은 1939년까지는 매우 격렬하게 광범위한 투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1938년까지 25차례의 봉기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상징적인 것은 1925년 2월 낙쉬반디 (Naqshibandi) 수피 종파의 지도자인 쉐이크 사이드(Sheikh Said)에 의한 반란이었다. 이것은 대규모의 조직적이고 종교적 목표의식에서 출발된 저항운동이었다. 점차 쉐이크 사이드 반란이 확산되어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면서 터키 정부의 커다란 위협세력으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터키 정부의 엄청난 반란진압으로 쉐이크 사이드가 처형되고 다수의 쿠르드인이 학살 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 이후 쿠르드 민족주의를 마비시키고자 하는 조치들이 케말 아타투르크에 의해 이루어졌다. 모든 투르크 의식과 집회가 금지되고 민속의상 착용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강력한 탄압 하에서 자연히 쿠르드 민족운동은 정체기를 맞았으나 1927년에 이르러 쿠르드 민족조직은 코이분(Khoybun)) (4)이라는 단체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이란과 터키는 합동으로 쿠르드 반란을 진압하게 되고 코이분 활동도 감소하게 된다.

1937년 중반까지 터키 정부는 쿠르드인 거주지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치권 확보를 위해 쿠르디스탄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강제이주로 인해 쿠르드의 민족적 연계는 단절되었다. 이러한 강압 정책은 쿠르드족의 강력한 반발을 러 일으켜 1937년 세이드 레자(Seyid Reza)의 반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시리아 쿠르드족의 가담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쿠르드족의 반란은 1938년을 고비로 소강되는데 터키 동부에서 석유가 발견되지 않자 석유이권에 대한 외세의 간섭이 줄어들고, 터키 정부가 동부지역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5년 쉐이크 사이드의 반란으로 본격화된 투르크 저항은 1938년까지 약 100만에 달하는 쿠르드인의 사망과 강제 이주를 촉발하게 되었다. 이후 쿠르드 반군들은 무장이 해제되었고, 쿠르드의 부족 중심 체계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쿠르드 민족주의자들도 무장방식을 지양하고, 이념투쟁과 민주정치의 명목 하에 쿠르드 민족의 실리를 취하는 현실적 노선의 채택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극심한 동화의 시기였다. 민속의상과 쿠르드어 사용이 통제되고, 쿠르디스탄에서도 터키어가 강제로 공용어로 결정되었다. 쿠르드식 칭호가 사라지고, 지방의 부족장인 쿠르드 쉐이크들은 축출되어 주민들과 격리되었다. 또한 주민의 대규모 이주를 통해 쿠르드인의 근원지를 근원적으로 변화시켜 버렸다. '쿠르드' 란 용어 자체의 언급이 금해졌고, 쿠르드인들은 공식적으로 '모국어를 잃어버린 산악인' 으로 표현되었다. 이로써 쿠르드인들의 민족적 정통성과 문화적 주체성은 터키 내부에서 공식적으로 소멸되었다.

공화당 일당체제가 종식되고 1950년 이후 다당제가 도입되면서, '동부지역의 유권자' 개념 때문에 쿠르드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권 내에서 제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1960년대 들어 정치적으로는 다당제가 도입되고, 사상적으로는 막스-레닌주의와 같은 좌파이념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쿠르드 문제제기와 함께 출판물이 증가하게 되며, 터키어-쿠르드어 공용잡지는 1980년까지 출판과 폐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1960년대의 쿠르드 정체성 운동은 정치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이라크 쿠르드족이 무스타파 바르자니(Mustafa Barzani)의 지도하에 쿠르드 자치운동을 시작하자, 1965년 터키 쿠르드족에게 자그을 주게 된다. 1961년 압둘라 외쿠텐(Abdullah Okten)에 의해 조직된 '터키쿠르드민주당(T-KDP)' 의 본격적인 활동을 고무시켰다.

1967년과 1968년에는 경제개발과 교육기회 증대, 의료시설 확충 등을 요구하며 동부의 디야르바크르와 실반 등지에서 집단시위가 잇달았다. 1969년에는 이스탄불, 앙카라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쿠르트 엘리트들이 최초의 합법적 쿠르드 조직인 '동부혁명문화협회(DDKO)' 를 창설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쿠르드족의 자치와 분리를, 이념적으로는 막스-레닌주의를 제창하였다.

1970년대 터키를 주도했던 데니즈 게즈미쉬(Deniz Gezmis) 마히르 자얀(Mahir Cayan) 은 '터키인민해방정당-전선(THKP-C)' 과 '터키인민해방군(THKO)' 을 각각 조직하였으며 이들은 대표적인 막스계열의 급진좌파자였다.1970년대를 통해 적어도 20개 이상의 지하조직이 주로 자얀을 추종하며 창궐하였다. 또 다른 좌파조직은 '막스-레닌계 터키공산당' 의 틀 속에서 생성된 '터키 노동자-농민 해방군(TIKKO)'였다. 이 조직은 수많은 투쟁과 무장테러에 가담하였으며, 대터키 테러 활동에 가장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70년대 터키내 극단적인 정치혼란과 경제적 악화는 쿠르드 민족주의자들에게는 자신들의 Identity를 확인하고 제한된 목표설정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쿠르드 지하세력들은 두 가지의 다른 노선을 추구하였는데, 하나는 기존 좌파정당의 체제 속으로 스며들어 제한적인 민족투쟁을 지속하는 세력이며, 또 다른 하나는 독자적으로 비합법적인 투르드 정당을 조직하여 조직적 투쟁을 하려는 급진적인 행동세력이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까지도 터키 내에서 노선갈등과 쿠르드 단체끼리의 대결을 조장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4)1차 세계대전 중에 해외에 망명 중인 쿠르드 지식인들에 의해 결성되어, 쿠르 드인 다수지역의 자치를 위해 투쟁하였던 조직.

쿠르드 노동당, Partia Karkaren Kurdistan (PKK)의 등장


PKK(5).의 태동은 1974년 혁명 청년단(DEV-GENC)에 가담한 압둘란 외잘란과 그의 쿠르드 동료들의 저항운동으로 볼 수 있으나 공식적인 설립은 1978년 11월 27일 터키 쿠르디스탄의 상징적인 수도인 디야르바크르에서였다. 그러나 1980년 혁명 이후 PKK는 세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다. 이들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이라는 목적 하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PKK의 지하활동은 1970년대 터키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에 편승하여 터키 국민들에게 극도의 위압감을 주게되나, 그들의 폭력적 방법과 비인도적 인명살상 방식에는 대다수 터키 쿠르드인들은 반감을 갖고 있다.

1980년 군부 쿠데타 이루 PKK는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투쟁의 현식을 전환한다. 첫째 단계는 전략적인 방어기(1990~1995)로, 지하 무장공격을 통한 기습공격과 터키의 체제혼란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군사적 평형기(1995~2000)로, PKK의 자유지대를 설정하여 터키 내부의 모든 좌파 무장세력들과 연대하여 대규모의 군사봉기를 획책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단계는 적극적인 공격기(2000~)로, 2000년 이후 터키 동남부에서의 민중봉기를 통한 쿠르디스탄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쿠르디스탄해방연대(HRK)'의 창설을 공표하고 터키 군부와의 전면적인 게릴라전에 돌입했다.

PKK는 아르메니아의 대터키 투쟁단체인 ASALA 와도 연대하며 효과적이고 총체적인 '기습-잠복' 이라는 산악 게릴라전을 계속 펼치고 있다. 1990년부터는 이스라엘에서의 팔레스타인봉기, 즉 Intifadah 방식을 도입하여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외부세계에 쿠르드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PKK는 폭력투쟁을 한층 강화하고 있으며 터키와 거의 전면전 상황에 돌입해 있다. 1994년에서 1995년에는 대도시에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쿠르드민족 문제를 부각시키려고 하며, 터키 동부의 일정지역에서 소위 그들의 '해방지역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10년간 쿠르드와의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무려 14000명(TDN, 1994.12.27)에 이르며, PKK에 희생당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터키 쿠르드인이라는 것이다. 동족상잔의 문제가 터키 쿠르드 민족문제가 안고 있는 또 다른 비극인 것이다.

PKK가 터키 내에서 효과적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배경은 외부로부터의 엄청난 물량지원과 함께 쿠르드 지역 내부의 동조와 지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는 쿠르디스탄의 험준한 지형뿐만 아니라, 쿠르드 지역을 경원시하고 무차별 소탕을 하고 있는 터키 정부의 무절제한 정책도 동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