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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지식창고지기 2010. 3. 10. 08:07

이라크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이라크 쿠르드 저항운동의 개관

이라크에서 쿠르드 운동이 지역적인 개념을 갖게 된 것은 1916년 아랍 봉기 때부터이며, 이라크 쿠르드 족은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해 오스만 터키 제국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로 설정된 협정구역인 이라크에 잘려진 산악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 이란, 이라의 3국에 접경된 완충 지대 로서 국경지대 역할을 해왔으며, 실질적인 쿠르드족 저항운동은 국경지역 지방도시와 마을지역으로 제한되어 있다. 특히 모술과 키르쿠크 유전 지역은 경제이권문제로 이라크 정부와 쿠르드족 간의 의견충돌을 불러일으키는 정치문제이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통일에 크게 기여해 왔다. 16세기부터 오스만 터키제국에서 페르시아 제국과의 완충지대까지 자치 환경을 누리고 있던 쿠르드족은 19세기에 오스만 술탄이 직접 통치하자 쿠르드인이 이에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이 쿠르드족 저항운동의 시발이었다. 오스만 터키에서부터 뿌리를 가진 쿠르드족 분리주의 운동은 이라크 내에서도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소수민족 문제이다. 18백만명의 이라크 인구 중 쿠르드인은 4백만명에 해당되며 지리적으로 1/3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영국의 위임통치하에서 쿠르드인들은 준자치적인 삶을 누리고 국가건설의 희망을 안고 있었다. 또한 영국은 쿠르드 지역에서 쿠르드어 사용, 교육언어로 쿠르드어 인정, 쿠르드 지역행정어로 쿠르드어 인정 등을 이라크가 받아들이도록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였다.(8) 그러나 1932년 이라크의 독립 후 이라크는 쿠르드족에게 지역적으로 준자치적 환경을 허용했으나 분리독립을 요구하는 쿠르드 운동에 대해 강경정책을 취하고 있다.

바르자니 쿠르드 족의 저항운동

1930년대 중반부터 도시지역에도 쿠르드 저항조직이 바르자니 세력의 민족투쟁에 영향을 받아 조직되기 시작했다. 이라크 쿠르드 무장 세력인 무스타파 알바르자니와 도시지식층과 중산층 중심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세력을 이끌고 있는 '함자 압달라(Hamza Abdalla)'와 제휴하여 1946년 8월 독자적인 이라크 KDP를 창당하였다.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정당의 성격을 가진 쿠르드 민주당(KDP)(9) 과 쿠르드 애국동맹(PUK)(10) .로 나뉜다. 특히 바르자니 세력은 봉건주의 환경의 충성심이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탈리바니가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토지개혁을 반대하고 있다.

무스타파 알자르바니가 쿠르드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였던 1979년까지는 탈라바니의 PUK세력은 바르자니 세력 영향력 밑에서 저항운동을 해왔다. 그러나 무스트파 알바르자니 사후 독자적으로 도시 중심의 파업 또는 사부타지 등 테러 중심전략과 군사전략을 병행한 쿠르드 저항운동을 이끌고 있다. 1958년 이후부터 1979년 운명할때까지 무스타파 알바르자니에 의한 쿠르드봉기는 쉴새없이 계속되었고, 그는 이라크의 쿠르드족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이라크의 바아쓰 정권은 같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사회주의 정책과 토지개혁 정책으로 이념적으로 같은 노선인 탈리바니의 PUK 세력을 지원하여 쿠르드족을 분열시키고 있다.

1979년 무스타파 사후 이라크의 KDP저항세력은 무스타파의 아들인 마수드 형제(Massud: 동생은 Idris)가 이끄는 KDP세력과 1975년 6월 잘랄 탈라비니가 조직한 쿠르드 애국동맹(The Patriotic Union of Kurdistan; PUK)세력이 중심이 되고 있다.

걸프 전쟁과 쿠르드족 저항운동

이라크 정부는 이라크 영토 내의 일부에서 살고 있는 이라크 국민으로서 쿠르드 자치를 인정한다는 원칙하에서 쿠르드족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반면 쿠르드족은 민족투쟁을 하는 과정을 통해 정치 경험을 배우면서 점진적으로 독립된 국가 건설을 위한 쿠르드 민족 분리주의 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후세인 대통령은 쿠르드족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이라크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는 정책으로 쿠르드 문제를 제일 정책으로 결정하였다.

이라크는 이란과의 지역전쟁을 하면서 국내에서는 북부 지역의 쿠르드족들과 계속 싸울 수밖에 없었다. 쿠르드족은 바르자니 시대를 종언하고 도시 혁신 세력인 탈리바니가 이끄는 PUK 세력의 쿠르드 저항시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보수 세력인 KDP는 PUK가 독자적으로 세력이 신장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이란-이라크 종전과 사암 후세인 정권의 대쿠르드 강경책으로 쿠르드족의 저항운동은 새로운 재난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쿠르드봉기는 1991년 3월 걸프전쟁에서 패배한 이라크 정부에 대한 쿠르드 민족의 선전포고인 제 2의 전쟁이었다. 걸프전 이라크 패배 1주일 만에 바르자니 쿠르드인들이 이라크에 귀환하여 Ranya 지방 도시에서 봉기를 시작하여 단기간 내 전 쿠르드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쿠르드인들은 쿠르드 전지역의 95%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1991년 4월 11일 한달만에 쿠르드족은 정부의 강경정책인 휴전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 또한번 쿠르드인의 수난시대가 시작되었다. 쿠르드 봉기로 남은 정치문제는 쿠르드 난민문제이다. 쿠르드 지역 대부분이 70년 이상의 민족저항운동으로 파괴되어 터키와 이란내 쿠르드 난민문제 뿐만 아니라 이라크내 쿠르드 난민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쿠르드족은 1990년 걸프전쟁을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였다는 전략적 평가를 받고 있다. 쿠르드인들은 유럽인에 대한 불신감으로 걸프전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또한 이란-이라크 전쟁중의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저항운동을 강경 진압하였기 때문에 쿠르드 지도자들은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쿠르드인들이 민족주의 운동과 유엔 연맹에 대한 쿠르드 대표들의 호소는 영국에 의하여 좌절되었지만 영국은 유엔연맹의 현지조사 보고서의 건의에 의하여 이라크 정부가 쿠르드 지역의 문화적인 특성을 인정하도록 노력하였었다.


바르자니에 의한 산악 농촌 지역 중심의 전통 보수 세력.

탈리바니에 의한 도시 중산층 중심의 혁신주의 세력


현재 상황과 전망


쿠르드족의 오늘날의 상황과 앞으로의 전망 (결론을 대신하여...)

쿠르드족에 대한 이번 연구 조사를 통해서 내다본 그들의 앞날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체계적이고 총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쿠르드 정체성의 부정과 민족성 말살 정책으로 쿠르드족에게 가해지는 지배 세력의 박해와 차별에 대한 그들의 자세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민족적 정통성과 문화적 주체성 유지를 위한 저항보다는 자기들 자신의 생활 개선을 위한 동화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가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는 실정이지만 다방면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고 나름대로의 존재를 지키기 위한 힘겨운 투쟁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

민족자결권에 대한 국제법의 명백한 보장에도 불구하고 소수 민족 집단은 국가를 이루지 않는 한 자신들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권리가 지배 국가에 의해 제한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쿠르드족에 대한 억압이 가장 심한 터키의 경우에 있어서 쿠르드 문학작품과 자취 의식을 고취시키는 정치적인 서적들이 암암리에 배포되고 있으며 쿠르드 말을 잃어버리고 2세 쿠르드인들을 위해 터키어로 된 이념 서적을 출간하여 잃어버리고 있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작업도 병행되고 있다. 또한 소설 작품과 영화를 통해 호소하고 있는 쿠르드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대중성을 바탕으로 한 민족주의야말로 쿠르드의 문화적 회복을 위한 더 없는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활동에서도 보면 쿠르드 지역에 대한 사회. 경제적인 지원, 교육. 의료시설의 확충과 같은 비정치적인 분야에 주력하는 등, 민족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이 국회로 진출하고 장관직에도 등용되고 있는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산악 목축 지대의 쿠르드인들이 오랫동안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전통과 고전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통과의례를 포함한 많은 생활의 부분에서 쿠르드족 나름대로의 전통적인 의미와 그 절차가 남아 있다.

이처럼 쿠르드족들은 언어, 춤, 음악, 민요, 구전 같은 여러 다른 요소와 함께 자신들의 고유한 전통적 통과의례를 유지, 계승해 가고 있는 한 그리고 지배 세력의 박해와 차별이 계속되는 한 쿠르드 정체성의 유지는 당분간 강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족 스스로만의 노력으로는 어느 정도의 유지는 될지라도 그 이상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자국의 이익을 생각하기보다는 세계적인 인류애 차원에서 다양한 외신 보도를 통하여 세인의 관심과 여론을 조장하는 들의 방법으로 인해 국제적인 문제로 더욱 더 부각시켜 강력한 외교적인 차원으로 쿠르드족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