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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지식창고지기 2010. 3. 10. 08:08

이란 쿠르드족의 저항운동과 대 쿠르드 정책 

 

이란 무르드족의 개관

이란에 거주하고 있는 쿠르드족은 이라크나 터키의 쿠르드족보다 탄압의 강도는 약했으나. 마찬가지로 분리주의 운동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이란의 쿠르드족은 이란인들과 언어적·문화적 유사성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어서인지 이란정부는 그들에게 문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성으로 인해 오늘날의 쿠르드족은 이란으로부터의 분리·독립보다는 오히려 동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란의 경우 많은 소수민족들이 산재해 있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기타의 소수민족들의 반응을 고려해 더욱 쿠르드의 독립을 저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 정부는 항상 쿠르드족을 '순수 이란인' 이라 주장하며 쿠르드인과 이란인의 구분을 회피한다. 또한 인구 구성에 대한 공식통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인구 파악이 불가능하다. 쿠르드족은 이란 인구 6천만명 중 1천만명 이상이 자신들이라 주장하나, 이란정부는 사실을 왜곡 축소하는 실정이다. 이것은 이란내 쿠르드인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다.

심코의 봉기와 레쟈 샤의 대쿠르드 정책

제 1차 세계대전 동안 이란령 쿠르드 지역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군의 전투장이 되었으며, 1차 대전 작전에 쿠르드, 아르메니아, 앗시리아, 터키, 이란, 아랍인 등의 갈등 속 상호공존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오스만 술탄은 연합군에 대항하여 대 이슬람 성전을 호소하며 무슬림 쿠르드족으로부터의 지원을 유도했다. 쿠르드족과 아르메니아 소수민족 사이의 배타적 종교관계(6) 를 이용한 술탄은 쿠르드족을 제 1차 세계대전에 동원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민족감정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오스만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쿠르드족은 그 지역에 있는 각국 정부에 대항하여 격렬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중 쿠르디스탄 북부의 Sahkak 쿠르드 종족의 부족장 심코(Ismail Agha Simko)는 1918년 여름부터 1922년까지 우르미예(Urmi도) 호수 서부 및 남부 전 지역을 장악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했다. 그는 모든 쿠르드 종족의 독립을 부르짖었으며 영토를 계속 확장해나갔으나 아제리인과 쿠르드인 사이의 불화를 증폭시키는는 문제를 야기시켰다. 그러나 결국 심코의 봉기는 레자 칸에 의해 수습되고 1930년 심코는 전사한다.

심코의 봉기는 이란에 독립된 자치지역을 설립하려는 최초의 중요한 시도였으나 초기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쿠르드 국가를 세우지 못했다. 그 원인은 첫째, 쿠르드 민족의 정체성이라는 명확한 이데올로기가 결핍된 상태에서 개인적인 야망과 외부의 희미한 민족주의 조류를 타고 봉기했으며, 둘째, 조작적으로 지원해 줄 정당이나 현대적 의미의 행정체계가 갖추어져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다. 셋째로 비쿠르드 부족뿐만 아니라 쿠르드 부족들간의 파벌주의를 그복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920년대 민족국가 형성과정에서 이란 정부가 중앙집권화 정책에 따라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운동을 강력히 억제한 것에 기인한다.

이란 전지역에 걸쳐 심코와 다른 부족 지도자들에 대한 레쟈 샤(7) 군대의 승리로 많은 소수민족 집단에 대한 새로운 억압과 탄압이 시작되었다. '국민 계도 위원회'라는 기구에 의해 모든 언론매체를 통제하면서 쿠르드족 등 소수민족의 인종적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말살하려 했다. 또한 교육, 출판, 그리고 대중 연설ㅇ레 있어 쿠르드어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쿠르드 전통 민속의상의 착용이 금지되었다. 더불어 근대화 추진에서 쿠르드 지역은 제외되어 낙후된 곳으로 남아있게 된다.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1941년 2차 세계대전 중 레쟈 샤 중앙정부의 붕괴에 편승한 쿠르드 민족 독립운동의 절정은 1946년 이란에서의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 창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하바드 공화국은 쿠르드 민족주의의 중요한 상징이다. 이 공화국의 창성ㄹ을 계기로 쿠르드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국으로서 국가의식을 완전히 자각하며 실질적인 쿠르드 민족의 자결권과 자주권을 1년 남짓 갖게 된다.

당시 신생국 이란, 이라크, 터키의 민족주의 강화정책과 강대국 영소불의 대중동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쿠르드족은 자신이 거주하는 이들 중동 각국에 동화될 것인가 아니면 파멸될 것이가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러한 위기감 속에서 창설된 쿠르드 공화국은 치명적인 민족생존의 위협에 대한 자위적인 유일한 대응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소 연합군의 점령에 의한 힘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1942년에 '쿠르디스탄 부흥위원회(Komala-e Zhaian-e Kurdistan)' 라는 결사체를 설립하고 약칭해서 코말라(Komala) 라고 불렀다. 후에 코말라는 소련과 더욱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지원을 받게 된다.

쿠르드 민주당(KDP)와 마하마드 공화국

소련의 대이란 침투 및 압력 정책의 도구는 이란 좌익세력 민중전선 투데당과 이란 내의 소수민족들의 분리 독립을 지워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련은 코말라와 아제르바이잔 민주당(Democrat Party of Azerbaizan) 을 연계시켜 쿠르드- 아제르 분리주의 운동을 강화시켜 대이란 압력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코말라와 아제르바이잔 민주당의 적대관계를 감지하고 있던 소련은 쿠르드-아제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코말라 조직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쿠르드 신당을 창당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1945년 9월 새로 창당된 쿠르드 민주당 KDP(Kurdish Democratic Party) 인 것이다. KDP는 미국식 모델에 기초한 민주주의라는 당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소련에 의하여 조정되는 KDP는 코말라의 민주주의적 의사구조 결정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 곧 밝혀졌다. 코말라가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는 반면에, KDP는 카지 무함마드 중심의 1인 독재 권위주의적 체제로 판명되었다. 결국 카지 무함마드를 대통령으로 1946년 1월 22일 정식으로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The Kurdish Republic of Mahabad)이 선포되었다. 드러나 이란의 유엔과 미국을 통한 대내외적인 양면 외교전략으로 결국 1946년 5월 9일 소련군은 이란 북부지역에서 완전히 철수 완료했다. 마침내 쿠르드 공화국은 1946년 12월 17일 붕괴되고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이미 며칠 전에 패망했던 것이다.

이란군부는 마하바드 국가의 과거 흔적을 모두 지우기 위해서 쿠르드어 사용금지, 쿠르드어 인쇄기 폐기, 쿠르드서적 소각, 민중교육 등을 금지하고 사회간접시설들도 파괴시켜 쿠르드민족이 재흥할 잠재력의 근원을 모두 제거하고자 했다. 공화국 붕괴의 결정적 요인은 그동안 국가를 갖지못한 경험으로 국가운영의 미숙, 외세 특히 소련에 의존한 카지 무함마드 정부의 사상노선에 대한 동족들의 의구심, 국익에 따른 소련의 대쿠르드족 이용과 배반, 아제르바이잔과 연합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이란 정부에 대한 위기감 조성, 사병을 거느린 봉건적인 각 부족장들과 도시 출신 엘리트 쿠르드 지도자간의 갈등, 이슬람 종파에 따른 쿠르드 동족간의 비협조, 그리고 쿠르드족의 민족국가 의식의 결핍 등이다.

팔레비 독재정치와 쿠르드 민족주의

마하바드 쿠르드 공화국의 멸망 이후 샤는 자국의 여러 소수민족의 무장해제 및 중앙집권화 강화정책에 따라 정치적 탄압을 시작했다. 1949년 2월 4일 테헤란 대학에서 샤 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수백명의 KDP 무장독립군과 그 동조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그 후 1951년 모사데그(Mossadegh) 수상의 민족주의에 기초한 자유선거를 통한 민족주의적 이상에 고무된 쿠르드 지식인들과 샤 정권하에서 불법화된 KDP당원들은 은밀히 정치무대로 복귀하였다.

反샤 정책노선을 취하며 1953년 8월19일 쿠르드족이 지지하던 모사데그 정권은 영국과 미국의 CIA의 지원을 받는 샤 왕당파의 쿠데타에 의해 붕괴됨으로써 이 정권하에서 그들의 권리를 찾으려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1956년 KDP는 비밀회동을 갖고 사회주의 강령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샤 정권은 군사력에 의한 무력 뿐만 아니라 정치적 및 경제적 보상을 통해서 선별적으로 쿠르드족 지도자들에게 회유정책을 구사했다. 쿠르드족의 정체성을 부정하려는 샤는 학교의 정규과목에서 쿠르드어를 제외시키고 민족언어 말살정책을 시도하였다.

한편 이란정부는 이라크 정권을 약화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이라크의 민족지도자 물라 무스타파 바르자니와 쿠르드 전사 Peshmergas에게 원조를 해주게 된다. 그러나 물라 무스타파의 샤 정권 및 외세에 대한 의존정책, 더 나아가서 공조정책은 결국 쿠르드 민족운동에 역기능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 혁명과 호메이니의 대쿠르드 정책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시킨 이슬람 혁명에 편승하여 쿠르드 민족주의는 1946년 마하바드 공화국 시대보다 훨씬 더 정치적으로 활성화 및 조직화되어 자치권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게 된다. 그러나 쿠르드족의 자치권 획득 희망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이슬람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 Khomeini)에 의해 깨지고 만다. 그는 이란에서 쿠르드민족 자치권의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1979년 4월 후세이니는 호메이니에게 쿠르디스탄의 자치권과 이에 대한 헌법초안의 수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호메이니는 쿠르드족의 자치권 요구는 이슬람 공화국에 대항하는 막시스트 사주에 의한 음모라고 주장하고 1979년 봄과 여름동안 쿠르드와 이란 정부 사이에 빈번한 충돌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이슬람 혁명정권은 KDP 지도자들과 협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5가지 계획안을 제시했으나 요구를 거부당하였다.

KDP의 민족주의 운동

이란 쿠르드 민주당 KDP사무총장이 된 가셈로우(Abdul Rahman Ghassemlou)는 마하바드 공화국 멸망 이후 지하화된 KDP를 합법적인 쿠르드 정치조직체로 재편하여 대중정당으로 변모시켰다. 가셈로우는 1973년부터 그가 암살당한 1989년 까지 KDP를 이끌었다. KDP는 국가형태와 새로이 제정될 신헌법에 쿠르드 민족의 자치권을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되도록 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그러ㅏ 1979년 6월 18일 KDP가 주장했던 쿠르드 자치권의 요구는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대이란 침공시 KDP는 사담 후세인 정권으로부터 병참 및 군사지원을 받으려 했다. 이것은 이란 영토통합을 지지한다는 가셈로우의 주장과 배치되는 행위로서 KDP의 많은 당원들이 그의 신뢰성에 의문을 갖고 정치적으로 내분을 일으켰다. 1988년 이라크의 쿠르드족 마을 비인도 공격을 계기로 가셈로우는 바그다드 정권과 단교하였다. 가셈로우가 1989년 7월 13일 저격당하고 KDP는 마르크스 노선을 따르는 코말라의 재등장을 막지 못했고, 쿠르드 민족세력의 힘이 결집될 수 없을 정도로 국내외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가셈로우 사망 후 신임사후 총장으로 Sadeq Sharafkandi가 선임되고 그 역시 1992년 7월 17일 암살당한다.

Komala와 민족주의 운동

이란 KDP는 교사, 상인, 공무원 등 도시 중산층 및 지식인 계층에 기반을 둔 반면에 Komala는 쿠르드 ㅈ역의 하층 노도자 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코말라의 기원은 사회주의자인 Sharifzadeh, Sulayman, Abdullah Moini에 의해 조직되었다. 테헤란과 타브리즈에 있는 일단의 쿠르드 대학생들이 여기에 고무되어 1969년 쿠르드 및 이란의 프롤레타리아를 위한 지하혁명조직 기구로 코말라를 결성한 것이다. KDP와 같은 쿠르드 조직이 과거 역사와 투쟁에 대한 심리적 연대를 통해 민족서성을 강화하려 했던 것에 비해, 코말라는 정치교육을 중점적으로 실시하고 지방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계급의식 및 게릴라전 원리를 가르쳐서 민중의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삼고자 했다.

초기 코말라는 쿠르드 소수민족 문제를 넘어서서 초민족적 기구로 발전하는 가운데 당원수의 확장을 위한 노력에 성공했으나, 이란의 쿠르드 민족전체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는 할 수 없었다. 코말라는 자체 내분 및 KDP와의 많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쿠르드 민족의 자치권과 민족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향후 이란에 대항한 무장투쟁도 계속할 것으로 생각된다.

레자 칸은 1921년 2월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이란군 총사령관겸 국방상이 되었다. 그는 소수민족 진압작전에 착수하여 국가 기강을 확립하며 1925년에는 팔레비 왕조의 초대 군주 레쟈 샤(Reza Shah)로 등극했다.
(6)쿠르드족은 순니 무슬림이며, 아르메니아인은 기독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