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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현대예술 - 영화와 드라마

지식창고지기 2010. 3. 22. 08:45

중국의 현대예술 - 영화와 드라마

 

 

영화는 근대 과학기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하나의 종합예술이다. 영화의 출현은 1백년도 안되고 중국에서의 역사는 더욱 짧다. 그러나 영화예술은 오히려 영향력이 가장 크고 성장이 가장 빠른 예술인데, 그것은 중국에서도 그러하다. 오늘날 중국의 영화는 십 몇 억의 관중을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시장에도 진출하여 세계 영화계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최초의 영화는 1905년 북경 풍태(豊泰) 사진관(지금의 琉璃廠 부근)에서 촬영한 고대희곡 ≪정군산(定軍山)≫이다. 중국 최초의 극영화는 1913년 정정추(鄭正秋)가 각색 연출한 무성영화 ≪난부난처(難夫難妻)≫이다. 중국 최초의 영화사는 1918년에 설립된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의 활동영희부(活動影戱部)이다. 그 후에 각종 영화사가 잇달아 설립되면서 중국의 영화사업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10∼20년대 초기 영화는 예술상에서 유치하고 기술상에서 낙후되었는데, 주로 윤리편 애정편 무협신괴편 탐정모험편 해학편이 대부분이며, 이외에도 풍경편 시대편 시사편 흑막편 등이 있다. 대다수의 영화에는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색채가 충만하다.

 

당시에는 몇몇 진보적인 영화 관계자들만 소량의 비교적 양호한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그것은 바로 정정추(鄭正秋) 연출의 ≪난부난처(難夫難妻)≫ ≪고아구조기(孤兒救祖記)≫ ≪상해의 어떤 부인(上海一婦人)≫, 홍심(洪深)이 연출한 ≪풍대소야(馮大少爺)≫ ≪애정과 황금(愛情與黃金)≫, 전한(田漢)이 연출한 ≪민간으로 가다(到民間去)≫ 등이다.

 

30∼40년대에 이르러 좌익 문예운동의 추진하에서 중국영화는 비록 여러 가지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은 방향을 바로잡아 차츰차츰 성숙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영화창작의 절정기를 맞이하게 되어 많은 우수한 영화와 영화시나리오 감독 배우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에 비교적 유명한 영화로는 하연(夏衍)의 ≪봄누에(春蠶)≫, 전한(田漢)의 ≪세 명의 신식 여성(三個摩登女性)≫ ≪여인행(麗人行)≫, 채초생(蔡楚生)의 ≪어광곡(漁光曲)≫, 홍심(洪深)의 ≪겁후도화(劫後桃花)≫, 원매지(袁枚之)의 ≪도시풍광(都市風光)≫ ≪거리의 천사(馬路天使)≫, 심서령(沈西 )의 ≪선가녀(船家女)≫ ≪네거리에서(十字街頭)≫, 사동산(史東山)의 ≪팔천리의 구름과 달(八千里路雲和月)≫, 양한생(陽翰笙)의 ≪삼모유랑기(三毛流浪記)≫, 진백진(陳白塵)의 ≪까마귀와 참새(烏鴉與麻雀)≫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사상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모두 비교적 높은 성취를 이룩하여 강렬한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신중국 성립 이후에 정부에서 영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영화의 제작 조건이 크게 개선되었다. 문화대혁명 이전 17년 동안에는 극영화만 650편이 제작되어 우수하거나 비교적 우수한 영화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주요 작품으로는 ≪백모녀(白毛女)≫ ≪남정북전(南征北戰)≫ ≪도강정찰기(渡江偵察記)≫ ≪동존서(董存瑞)≫ ≪청춘의 노래(靑春之歌)≫ ≪임칙서(林則徐)≫ ≪오타금화(五朶金花)≫ ≪이쌍쌍(李雙雙)≫ ≪무대위의 자매(舞臺姐妹)≫ ≪갑오풍운(甲午風雲)≫ 등이 있다. 10년에 걸친 문화대혁명 중에 중국의 영화 사업도 마찬가지로 타격을 받아 거의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갔다.

 

10년에 걸친 정치적 동란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을 실행한 이후 중국영화는 매우 빠른 속도로 회복하여 새로운 발전 단계에 진입함으로써 비교적 번영을 누리는 국면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주로 다음과 같은 방면으로 표현되었다.

 

첫째, 창작 사상이 해방되었다. 중국영화 발전사상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국 영화의 표현 수법을 폭넓게 흡수하여 형식 기술 기교 등 각 방면에서 모두 혁신을 일으켰다.

 

둘째, 반영된 제재와 내용의 범위가 확대되어 많은 성역을 타파하고 갈수록 다양해졌다.

 

셋째, 기성 감독과 기성 배우 외에도 재능이 뛰어난 중청년 감독과 배우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넷째, 우수한 영화가 대량으로 창작되면서 중국영화는 이미 세계 영화계로 진출하였다. 예를 들면, 서안(西安) 영화제작소의 감독 장예모(張藝謀)는 40여세에 젊은 여배우 공리(鞏?)와 합작하여 잇달아 촬영한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 ≪국두(菊豆)≫ ≪홍등을 높이 걸다(大紅燈籠高高掛: 홍등)≫ ≪추국의 소송 이야기(秋菊打官司: 귀주이야기)≫는 모두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입상하여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도 이 몇 년간에 나온 우수한 영화로는 ≪목마인(牧馬人)≫ ≪성남구사(城南舊事)≫ ≪천운산전기(天雲山傳奇)≫ ≪중년에 이르면(人到中年)≫ ≪부용진(芙蓉鎭)≫ ≪높은 산기슭에 놓인 화환(高山下的花環)≫ ≪개국대전(開國大典)≫ ≪대결전(大決戰)≫ ≪주은래(周恩來)≫ ≪모택동과 그의 아들(毛澤東和他的兒子)≫ 등이 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중국의 드라마는 그 출발이 비교적 늦은 편이다. 중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인 북경TV(현재의 중앙TV)가 1958년 5월 10일 창설되었으며, 그해 6월 15일 여기에서 중국 최초의 드라마 <차이빙즈 한 입(一口菜餠子)>를 방송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 드라마의 효시이다. 중국의 드라마 역사는 대체로 다섯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 : 1958년~1966년, 중국 드라마의 초창기.

 

이 시기에 방송된 드라마의 수는 아주 적습니다. 8년동안 북경TV에서 방송된 드라마는 87편에 불과하며, 내용은 일반적으로 영웅적인 인물을 찬양한 것에 편중되어 있어 제재의 폭이 좁고 수준도 아주 낮았다.

 

제2단계: 1966년~1976년, 중국 드라마의 침체기.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 기간으로 한편의 드라마도 창작되지 않았다.

 

제3단계 : 1978년~1983년, 중국 드라마의 회복기.

 

이 시기에는 드라마의 창작면에서 비교적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1983년 중앙TV에서 방송된 드라마는 428편에 달한다. 종류와 양식, 예술성 면에서 점차 풍부하고 다채로워졌으며, TV 연속극, 다큐멘터리 드라마, 역사 인물 전기 드라마, 희극 드라마 등이 출현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인 창작면에서 보면 그다지 호전되지 못하고 예술적인 수준도 많이 결여되어 있었다.

 

제4단계 : 1984년~1990년, 중국 드라마의 발전기.

 

이 시기에는 드라마의 수량이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1989년 전국적으로 2035편의 드라마가 창작되었는데, 현실을 반영하고, 보통 사람들의 헌신적인 정신을 찬양한 것이 창작의 주종을 이루었다. 예술적인 면에서도 그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창작면에서는 드라마 예술 규칙의 모색과 인물 성격, 내면세계의 묘사를 중시하였으며, 감상을 위한 배려도 나날이 강화되어 갔다.

 

제5단계 : 1990년~현재, 중국 드라마의 흥성기.

 

중국의 드라마는 현재 드라마의 "기지화" 생산 단계에 접어들었다. 드라마의 연속화, 통속화 및 실내극의 흥기로 1996년에는 8000여편의 드라마가 창작되었다. 시대성과 풍부하고 다양한 예술성을 갖춘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드라마 시청 열기가 한층 고조되고 있다.

 

최근 십 몇 년간 중국경제의 발전과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을 따라서 TV가 신속하게 보급되면서 TV를 시청하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졌다. 이에 TV 드라마는 신속하게 성행한 예술분야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 전국에 방영된 TV 드라마 중에서 비교적 큰 영향을 미친 우수한 TV 연속극으로는 ≪서유기(西遊記)≫ ≪홍루몽(紅樓夢)≫ ≪양가장(楊家將)≫ ≪사세동당(四世同堂)≫ ≪위성(圍城)≫ ≪신생(新生)≫ ≪갈망(渴望)≫ ≪편집부이야기(編輯部的故事)≫ ≪송경령과 그의 자매들(宋慶齡和他的姉妹≫ ≪밖에서 온 누이(外來妹)≫ ≪뉴욕의 북경인(北京人在紐約)≫ 등이 있다.

 

통계에 의하면 현재 중국에는 이미 3억대의 TV와 9억여명의 시청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7년 드라마의 생산량은 1만여편에 달합니다. 현재 중국의 드라마는 갈수록 다른 나라 시청자들의 환영을 받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많은 드라마가 일본과 동남아 여러 나라에 방송된 후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TV 드라마는 내용 전개와 방영 시간이 영화보다 훨씬 탄력성이 있어 1~2집이나 몇 10집, 심지어 100집 이상까지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극장까지 갈 필요 없이 집안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매우 편리하다. TV 드라마의 번성은 영화예술의 세계를 확대시키고 사람들의 문화생활을 풍부하게 해준 동시에 영화의 강력한 라이벌이 되어 영화사업에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영화계는 더욱 큰 진보와 혁신을 통하여 비교적 많은 관중을 쟁취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20여개의 각종 영화 제작소가 있고 TV 방송국이 각 성(省)과 시(市)에 모두 있는데, 이곳에서 매년 100여편의 극영화와 수천편의 TV 드라마를 제작하고 있다. 영화와 TV 드라마의 창작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관련 부처에서는 정기적으로 우수 영화와 TV 드라마 시상식을 거행하고 있다. 중국에서 영화 인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대학은 북경영화학원(北京電影學院)이다. 이 학교는 개교 40년 이래로 영화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중국영화 예술가의 요람(中國電影藝術家的搖籃)"으로 불린다. 중국은 국산 영화 외에도 문화교류를 통하여 계획적으로 대량의 외국영화와 TV 드라마를 도입하여 더빙하였다. 특히 우리나라의 드라마 중에서도 "사랑이 뭐길래" "별은 내가슴에" 등이 중국에서 가장 인기를 끈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