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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교육사상 - 제자백가와 유가

지식창고지기 2010. 3. 27. 19:50

공자의 교육사상 - 제자백가와 유가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산동성에 위치한 제(齊) 나라의 수도였던 임치(臨淄)라는 도시에 "직하"(稷下)라고 불리는 학술기구가 있었다. 직성(稷城)의 아래에 수도의 서쪽 문이 있는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직하" 혹은 "직하문"이라고 불려졌고, 그 곳은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을 함께 논하는 곳이어서 일종의 학술기구이기도 하고 후진을 양성하였기 때문에 일종의 학교이기도 한 곳이었다.

이 기구는 기원 전 318년에 제 나라의 선왕(宣王)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곳에 거주하는 학자들은 모두 대부(大夫)의 서열을 받아 임명되고 왕실에서 제공한 높은 대문의 큰 집에서 살면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거기에는 70여명의 대부들과 1천여명의 학사들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그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유래로 말하면, 제 나라가 태공(太公) 때부터 어업과 염전을 개발하고 후에 철의 생산까지 발전시키면서 상공업을 진작시켰고 후에 관중(管仲)은 어업과 염전업에 세금을 부과하여 형성한 재정으로 학술을 장려한 것이 그 출발이었다. 위왕(威王), 선왕(宣王), 양왕(襄王) 등 후대의 왕들도 그 뒤를 이어 임치를 학술의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맹자(孟子), 추연( ), 신도(愼到), 윤문(尹文), 순자(荀子), 묵자(墨子) 등을 포함하여 유가, 도가, 명가, 법가, 음양가 등의 학자들이 직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저작을 통하여 통치술을 논하였고, 평시의 국정을 토론하였으며,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분위기가 주어져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3 세기 초에 이르러 혼왕( )은 무력을 숭상한 데다가 학자들의 충고를 거역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여 학자들은 점차로 직하를 떠나버렸다.

물론, 당시의 직하에서 고대의 학문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아니다. 기원전 500 년 경에 이미 고도의 학술적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직하의 규모와 학풍과 역할을 미루어 볼 때 고대 중국의 학술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다양한 노선의 사상가들이 형성한 학풍, 그것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서서, 그리고 그것에 못지 않는 수준의 다양한 사상적 체계가 발달해 있었다.

중국사의 최근 연구는 고대 중국에서의 학술의 발달은 주(周)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되면서 시작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馮友蘭, 중국철학사, 정인재 역, 서울: 형설출판사, 1990, pp. 56-58) 봉건제도의 붕괴는 어느 시기부터인가를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일반적으로 기원전 7세기 경부터 3세기까지를 사회적, 정치적 변동기로 보며 이 시기에 봉건제도가 붕괴되어 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봉건시대에는 왕실의 관리들이 학문분야의 대표들이었으나, 봉건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관리 혹은 귀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개인적 노력으로 사상을 전하는 직업적 교사가 됨으로써 여러 다양한 학파들이 형성되었다. 이 학파들을 통칭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일컫고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이르러 고대 중국의 학문적 개화가 시작하였고, 제자백가의 시대는 기원전 500 - 250 년 사이에 절정기를 이루었다. 학파들 가운데 중국사상의 양대 조류가 되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가 그 대표적인 것이지만 기원전 5-3세기까지만 해도 수많은 학파 중의 둘에 지니지 않는다.

물론 제자백가의 분류는 사마담(司馬談), 유흠(劉歆) 등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된 것이다.

사마담은 사가(史家)들 가운데 제자백가를 6가로 분류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기원전 2세기 후반의 사가이다. 그가 분류하여 명명한 6가에는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등이 포함된다. 다른 한편 유흠(기원전 46 - 기원후 23)은 제자백가를 사마담의 6가에다, 종횡가, 잡가, 농가, 소설가를 더하여 10가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그 중 소설가는 별로 주목할 만큼의 무게를 두지 않았다. 물론 유흠이 제자백가의 배경과 특징을 분석한 것에는 수정되어야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였다. (풍우란, [중국철학사], 정인재 역, 서울: 형설출판사, 1990, pp. 53 - 56)

(1) 유가(儒家)는 대체적으로 주 나라의 교육을 맡는 관직인 사도(司徒)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음양의 도에 순응하면서 군주를 도와 교화를 밝히는 것을 직책으로 삼았다. 이 학파는 어느 다른 학파보다 그 지위를 확실히 하였고, 6경을 즐겨 연구했으며, 인의 도덕에 뜻을 두었고, 요순(堯舜)의 시대를 동경하였으며, 공자(孔子)를 최고의 스승으로 삼아 학술을 닦았다.
(2) 도가(道家)는 대체로 사관(史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성패, 존망, 화복 등 고금의 도를 빠짐없이 널리 기록하였으며 그 요점을 파악하여 근본을 알고자 하였다. 군주의 통치방법으로 청허한 마음, 그리고 욕심을 멀리하고 자신을 낮추며 유연한 태도를 가질 것을 가르쳤다. 그러나 도가는 본래 양주(楊朱)의 사상에서 그 근원을 가진 것이나 주로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사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흠은 주로 노자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장자의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3) 음양가(陰陽家)는 천지와 사계절의 변화에 대응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리였던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하늘을 삼가 존중하고 해와 달과 별들의 운행을 추산하여 천문을 보고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일어 주었다.
(4) 법가(法家)는 옥사(獄事)를 심리하던 이관(理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상벌을 엄격하게 함으로써 예절의 제도적 관습을 보충하였다.
(5) 명가(名家)는 예절을 관장하던 예관(禮官)의 출신들이었다. 옛날에는 명칭과 지위가 다르면 그에 따라서 예의와 범절도 달랐다. 공자는 사물의 질서와 행동의 도리를 바로 나타내어야(이름을 바로 붙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 도리를 바로 나타내지 못하면 말이 순조로울 수가 없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떤 일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6) 묵가(墨家)는 종묘의 관리인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검약을 귀하게 여겼으며 겸애를 주장하였고 현인을 존경하였으며 묘제(廟祭)를 엄숙히 지내고 효도하는 생활을 천하에 보여 주었다.
(7) 종횡가(縱橫家)는 나라의 외교를 맡은 관직인 행인(行人)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일을 처리할 때 실제에 비추어 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국가의 명령을 접수하더라도 그것을 실제의 상황을 보고 처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8) 잡가(雜家)는 간쟁하는 벼슬을 뜻하는 의관(議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유가, 묵가, 명가, 법가의 학설을 한데 통합시켰다.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제가의 주장과 관행을 모두 구비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러 다른 주장에 대하여 관용성을 보였다.
(9) 농가(農家)는 농업을 관장하던 벼슬인 농직(農稷)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여러 가지 곡식의 씨를 뿌리고 밭갈며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의식을 풍족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10) 소설가(小說家)는 거리의 풍속을 기록하는 패관(稗官)의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거리에서 들은 것, 길에서 말한 것 등을 채집하여 이야기로 엮고 그것을 백성의 의견으로 수용하였다. 주 나라 말엽의 여러 학파를 일컬어 "제자백가"라고 하지만 유학(儒學)이 학술상의 정통이며 또한 주류였다. 제자백가는 모두 그 지류 혹은 아류이며 마치 해가 가운데 자리잡고 뭇 별들이 그 주위를 둘러 싼 격이라고 할 수 있다.[장기윤, [中國思想의 根源], 중국문화연구소 역, 서울: 문조사, 1989, P. 43] "유"(儒)라는

글자는 본래 "학자" 혹은 "문사"를 뜻하는 것이었다. 유에 속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옛 경전에 밝은 교사들이었고, 고대적 문화유산의 상속자들이었다. 공자는 이러한 사람들의 지도자였으므로 그의 사상을 따른 학자들이 "유가"(儒家)라고 부른 것이다. 춘추시대의 말엽까지만 하더라도 유가는 다만 직업상의 한 계급일 뿐이지 학파로서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었다. 유가가 학파로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전국시대의 초엽이었다. [공자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 [춘추](春秋)의 연대기에 포함된 부분을 "춘추시대"라고 부르나, 그것은 기원전 481년으로 끝난다. 보통은 그보다 훨씬 후인 기원전 5세기의 종말까지 춘추시대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어 기원전 403년 당시의 강국인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의 3국으로 분리된 시기부터의 역사를 기록하였고, 그 이후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공자가 죽은 후에 그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스승의 도를 이어 받아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어떤 이는 연줄을 찾아 당시 전국시대의 어느 왕가의 조정에서 벼슬을 얻어 관료가 되거나 교육에 종사하거나 했다. 그들은 공자의 도를 전하면서 유학의 기초를 형성하고 하나의 독특한 학파로서의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가 하나의 학파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이를 본받아, 그리고 이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척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묵작(墨雀)의 사상을 이은 묵가(墨家)와 양주(楊朱)의 사상을 이은 도가(道家)가 그것이다. 장기윤(張其윤)은 유가가 도가와 묵가와 다른 점을 두 가지로 언급하였다.[P. 46] 하나는 자유의 개념에 관련된 것이다. 도가는 방임을 위주로 하고 묵가는 통제를 위주로 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었으나. 유가는 중용을 숭상하여 예의 개념으로 둘을 절충하였다. 다른 하나는 평등의 개념에 관련된 것이다. 묵가는 겸애(兼愛)를 제창하고 도가는 제물(齊物)을 제창하여 모든 차별을 없앤 절대적 평등을 주장하였으나, 유가는 의(義)의 개념을 내세워 적절한 질서의 필요를 강조하고 차등주의를 표방하였다.

위의 세 학파 가운데 묵가의 사상은 후세의 사람들이 발전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한(漢) 나라 이후에는 더 이상 성행하지 못하였다. 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중에서 후에 사상의 양대 주류를 형성해 온 학파는 유가와 도가이다. 표면상으로 볼 때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풍우란은 둘은 동일한 막대기의 양쪽 긑일 뿐이라고 비유하였다.[풍우란, P. 37] 그들은 모두 농업을 근본적인 생업으로 하는 고대의 사람들이 해와 달의 운행과 사계절의 순환과정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배경으로 나타난 사상체계이며, 그러한 생활 속에서 자연사와 인간사를 두고 통찰한 결과가 다른 의견으로 나타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유가가 [주역]을 해석하여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면 추위가 온다"[寒往則署來, 署往則寒來, [周易], 繫辭 下]고 하고 자연적 순환의 새로운 출발을 가리키는 복괘[복괘의 해설]에서 천지의 핵심을 파악한다고 한 것과 유사하게, 노자의 [도덕경]에는 "되돌아 가는 것은 도의 움직임이다"[反者道之動,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 10장]라고 한 것이 있다. 두 학파는 자연과 우주의 운행에 대한 동일한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도가는 원시사회의 단순성을 이상화하고 문명을 비판하는 경향을 취한 반면에 유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도리를 밝히는 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도가는 전원적 농촌의 평화를 이상적인 세계로 묘사하였고,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적인 것을 동경하면서 자연, 즉 우주와 합일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유가는 농경사회의 경제조건에 따른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사회제도의 질서을 세우는 도리를 추구하고 이론화하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우리는 유가적 전통을 중심으로 교육사상사를 다루게 된다. 그것은 한국의 교육사상에 도가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혹은 구체적으로 미친 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육사상사로 말하면 중국 유학의 영향과는 별도로 삼국시대, 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의 불교를 비롯한 교육사상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의 교육사상의 배경과 그 흐름을 이해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히려 고전유학과 신유학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검토하는 것이 우선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장기윤은 전목(錢穆)을 인용하여 유가사상의 핵심을 "중용(中庸)의 도"에 있다고 하였다.[p. 68) "중용"은 곧 "중화"(中和)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중"(中)이며 나타나되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가 "화"(和)이다. [[중용]] 그러므로 중과 화의 두 개념은 희노애락의 전후 상태에 각기 적용되는 것일 뿐, 본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다. 중은 천하의 근본이고 화는 천하에 통용되는 도이므로, 중과 화가 철저히 발휘되면 만사가 제자리를 지키는 것이 된다. 주자(朱子)는 중의 개념을 해석하여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중용장구 2)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평상"(平常)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바뀔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자와 유가의 중용은 인성론적 혹은 행위론적 수준의 개념만이 아니라 우주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중용"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golden mean)이 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실천적 이성이 작용하는 원리로서 사용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이성을 이론적 이성과 실천적 이성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인간의 마음이 사물을 관조할 때 제일원리를 발견하고 종(種)과 유(類)의 개념적 망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할 때 작용하고, 후자는 인간의 행위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도적 위치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였다. 중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으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공장의 중의 개념과는 무관하지만 화의 개념에 가까운 것이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인간의 기질적 특징이 작용할 때 과다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상태, 예컨대 만용을 부리거나 비겁하지 않는 상태의 것을 용기라고 하듯이 실천적 행위가 덕성(virtue)을 가지게 하는 조건이다. 이에 비하여 공자와 유가의 중용은 인성론적, 행위론적 수준만의 개념이 아니라 우주론적 개념이기도 하다.]

유가사상은 치우치지 않으며 지나치지 않고 모든 일에 있어서 전체의 한가운데를 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무엇의 한가운데라는 말인가? 전목과 장기윤은 유가사상, 특히 공자의 사상은 묵가와 도가 사이의 한가운데를 이룬다고 하였다.(전게서, p. 68) 물론, 공자는 묵자나 양자보다 앞선 시대의 사람이므로 두 사상을 절충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묵가는 묵가대로 도가는 도가대로 발전하였지만, 공자의 사상은 이미 그 중도를 취하여 있었다는 것이다. 전목과 장기윤에 의하면, 중용의 도는 양자의 이기주의와 묵자의 정열을, 양자의 개인편중과 묵자의 사회편중을 조화시키는 사상적 체제로서의 지녔다는 것이다. 공자의 사상은 하늘을 떠받드는 묵자의 정신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양자의 정신을 보존하면서 어느 것으로 치우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