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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교육사상 - 정명사상과 일이관지의 논리

지식창고지기 2010. 3. 27. 19:51

공자의 교육사상 - 정명사상과 일이관지의 논리



공자가 증자에게 자신의 도에는 하나로써 꿰뚫는 원리(一以貫之)가 있다고 암시한 바 있으며(논어 4), 그 하나의 원리가 중요함을 말하기 위하여 자공(子貢)에게 이렇게 물었다. "너는 내가 많은 것을 배워서 많을 것을 기억하여 모든 도리를 안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은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다. 나는 하나의 도리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고 하였다.(논어 15) 공자가 이와 같이 하나로 회통하는 원리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자신의 우주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천지의 만물은 천차만별의 복잡성을 띠고 있지만 그 가운데 전체를 하나의 조리바른 계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일이관지에 대하여 하안(何晏)은 이렇게 주석하였다. 즉 "만가지 선에는 그 근원되는 것이 있고 만사는 모이는 데가 있다. 천하에 각가지 길이 있지만 돌아가는 데는 결국 같다."[善有元 事有會 天下殊塗而同歸]

증자가 공자의 일이관지를 충서로 이해한다고 언급한 이래 충서의 개념은 유가의 인을 이해하는 기본적인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충서의 개념을 도덕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인식론적 개념으로 이해할 것이냐를 두고 다른 의견이 있어 왔다. 도덕론적으로 이해하면 충서는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자기를 타인에게 미치게 하는 것"[盡己之心推己及人]이나, 인식론적으로 이해하면 그것보다 넓은 의미가 된다. 호적은 대대례 삼조기(大戴禮三朝記)에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충서의 개념을 인식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편에 서고자 하였다.


충(忠)이라는 것을 알면 반드시 중(中)을 알고 중을 알면 반드시 서(恕)를 알고 서를 알면 밖(外)을 안다. ... 안으로 생각하는 일이 모두 마음에 합하는 것을 말하여 중을 안다고 한다. 이 중을 실제로 응용한 것을 말하여 서를 안다고 하고, 마음 속으로 서하여 바깥 세계에 견주는 것을 말하여 밖을 안다고 한다. [호적 p. 119]

이러한 의미의 충서는 도덕론적 개념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호적은 장태염(章太炎)의 [정공하](訂孔下)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충서의 의미는 바로 일이관지 그대로를 말해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마음이 사물을 견주어 볼 수 있는 것을 서라고 하고, 널리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충이라고 한다. 고로 하나를 듣고 열을 알며 한 모퉁이를 들어서 세 모퉁이를 미루어 아는 것은 서이다. ... 널리 사물을 관찰하고 그것을 적절히 증거로 삼아 그 중추의 이치를 가릴 수 있는 것은 충이다. (p. 119)

여기에서 충과 서의 두 개념은 서로 의미상 가깝기 때문에 구별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충서"라는 두 글자의 의미는 "서"자의 의미 그대로라고 해도 좋다. 그리하여 호적은 결론적으로 충서는 공문(孔門)의 인식론적 추론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단지 자기를 미루어 타인에게 미치게 한다고 하는 인생철학적 의미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는 공자의 "일이관지"와 증자가 말한 "충서"라는 것은 단지 조리 바른 계통을 발견하고 이것으로써 추론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를 듣고 열을 알게 하고 하나를 들어 셋까지 유추하게 하는 것을 기대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충서가 인식론적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도덕적 행위도 어떤 의미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거기에도 충서의 개념이 적용되고, 공자가 인의 실현을 인간의 자질이며 과업으로 생각하는 이상 충서의 개념이 거기에 일차적으로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로 회통하는 원리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포착하는 것일가? 호적은 [역경](易經)에서 그 뜻을 찾고자 하였다. 그에 의하면 역경의 기본적인 개념을 역(易), 상(象), 사(辭)로 들 수 있고, 역은 만물의 변화과정을 상정하는 개념이라면 그것의 질서를 인식할 수 있게 하는 단서는 상과 사의 개념이며, 상과 사가 나타내어 주는 바에 의해서 우리는 사물과 우주의 복잡한 구조와 과정을 회통하고 있는 원리에 접근할 수 있다.

우주와 만물, 그리고 그 생성과 변화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원리를 구하려는 노력은 옛부터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의 사유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체계적인 철학은 삼라만상의 구성과 변화의 원리를 근원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원리가 무엇일가를 두고 출발하였다.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사물과 현상의 변화를 지배하는 보편적 질서가 있다는 생각이 바로 그들의 기본적인 가정이다.

서양의 고대 철학자들, 특히 플라톤은 변화하는 것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은 실재(實在)가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에, 동양의 철학자들은 오히려 변화 그 자체를 본질적이라고 보고 그 변화의 과정에 내축된 원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취하였다. "역경"은 바로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우주의 현상과 인간의 삶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을 담고 있다.

그 세 개념은 주역에서 전개된 복잡한 것들을 구조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설명력을 지닌다. "역"은 만물이 변화 속에 있다는 기본 가정을 나타내는 말이며, "상"은 그 변화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사물의 상태 혹은 형상을 나타내는 말이며, "사"는 상을 언어로써 기술하고 설명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천지만물은 도도하게 흘러가는 냇물과 같이 현재에 이르면 곧장 과거를 이룬다. 만물의 변화과정, 이것이 곧 "역"이라는 글자의 뜻이다. 역은 만물의 생성과 창조적 작용을 하는 원천적인 힘으로써 그것이 작용한 결과는 온갖 형상으로 나타나므로 우리는 상을 통하여 역의 진행과 그 질서를 알 수 있다. "하늘에서 형상을 이루고 땅에서 형태를 이루어 변화를 들어낸다."(在天成象 在地成形 變化見矣--易繫辭傳)고 하였듯이 상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우리가 역의 질서에 접근하는 일 혹은 역을 설명하는 일이 어렵다. 모든 상의 원본을 "法象"이라고 한다. 이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유사한 것이다. 공자는 인류 역사상에 있는 각종의 문물과 제도는 그 기원이 모두 이 상에 있는 것이라고 했고 모든 것들은 하나하나의 법상을 모방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 즉, 상 혹은 법상은 원본적 모형이며 사물은 이 모형을 모방하여 된 것이다. "사"는 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 뜻을 규정하며 또한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물상"(物象)이든지 사람의 마음 속에 지니고 있는 "의상"(意象)이든지 간에 상이 포착되었을 때에야 가능한 것이다.

상의 개념은 우주나 사물, 그리고 인간의 제도와 행위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설명력을 지닌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었다. 역은 상에 의하지 않고 이해될 수 없으며 사는 상을 발견하거나 성립시키지 않고 그 뜻을 지닐 수가 없다. 상은 그림으로도 비유될 수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의식이나 지각의 작용이 사물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깨닫거나 설명하고자 할 때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지각되는 대상의 구조 혹은 과정의 특징을 의미한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사물 자체가 지니고 있거나 우리의 마음이 성립시키거나 간에 그러한 상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은 사물의 지각 혹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특질", 혹은 특질적 구조에 상당하는 것이다.

물상은 자연계의 여러 현상을 나타내는 상이고(계사하 2) 의상은 물상을 관찰하여 마음 속에 일으킨 상이다. 주역에서 팔괘는 각기 물상을 표시한다.[주역의 구조] 팔괘들 중에서 둘씩 배합된 64괘의 각각은 의상을 표시한다. 천하의 복잡한 사물을 관찰하여 그 형용을 본따서 사물의 형상을 포착한다. 그것이 "상"이다. 성인은 바로 천하의 움직임을 보고 거기에 회통하는 것(상)을 파악하여 그 전례(典禮)로 삼고 말을 붙여서 길흉을 판단한다.(계사상 12) 공자는 "성인은 상을 세워서 모든 뜻을 밝히고 괘(卦)를 세워서 모든 판단을 하고 사를 맺아서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하였으며, 우리가 상을 필요로 하는 글로써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로써 뜻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기 때문에 상을 두어 생각한다고 하였다.(계사상 2)

역경에는 64괘(卦)와 384효(爻)가 있다. 각 괘와 각 효에는 하나의 "상"이 있다. 예컨대 --== ㅡ== (겸, 謙)과 같은 괘는 단지 "지중유산"(地中有山), 즉 대지 가운데 산이 있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상을 지니지만 그 이상의 길휼과 선악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계사(繫辭), 즉 말을 붙여서 무엇을 고한다. 그 고하는 바가 괘사(卦辭)로서 표현되며, 그것은 --== ㅡ== 겸형(謙亨) 군자유종(君子有終), 즉 "겸손하면 어떤 일에도 형통한다. 이러한 군자는 그 몸의 끝을 온전히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괘사만으로는 길흉을 충분히 알 수 없는 까닭에 각 효에 대한 효사(爻辭)가 또한 따른다.

괘사와 효사의 "사"는 개념 혹은 판단에 해당한다. 그것은 달리 표현해서 상의 "이름"이다. 이름으로서의 사는 의상의 추향(趨向)을 표시하고 행위의 길흉을 밝혀 주는 지침이 된다. 계사하전에 이런 말이 있다.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고, 성인의 큰 보배를 위(位)라고 한다. 무엇을 가지고 자리를 지킬 것이냐? 인으로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가지고 사람을 모을 것이냐? 재물로써 한다고 말한다. 재물을 다스리고 말을 바르게(正辭)하여 백성의 잘못을 금하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계사하 1)

이 말을 이가원(李家源)은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이가원 역해, [주역], 서울 평범사, 1976) 천지의 큰 덕은 낳고 그것을 모두 기르는 것이요, 천자(天子)의 위치에 있으면서 만민을 기르는 것이 성인의 큰 보배이다. 성인이 천자의 지위를 보존하는 것은 어진 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민중을 모아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물질을 풍부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민중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 주고 민중에게 교육을 시키고 법에 의해서 나쁜 일을 금하는 것, 이것이 곧 의로운 정치이다.

정사(正辭), 즉 말을 바르게 한다는 것은 바른 것을 가르쳐 준다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이름을 바로 붙인다는 뜻, 즉 상에 이름을 붙여 사물을 바로 설명해 준다는 뜻이 되기도 하고, 명분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정사"와 "정명"은 같은 것이다. 정사 혹은 정명은 한 편으로 천하의 모든 것을 제대로 보살피고 옳지 못한 것을 금하는 것이다. 이것이 공자의 "정명사상"의 요지이다.

어느 날 자로(子路)가 위(衛) 나라의 임금이 나라의 일을 의논할탠데 무엇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하겠는가고 무었을 때, 공자는 "말할 것도 없이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자의 논리는 이러하였다. 즉, 명분이 서지 않으면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며, 말이 순리에 맞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고, 일을 이루지 못하면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며, 예악이 진흥되지 않으면 형벌이 바로 되지 않으며, 형벌이 바로 되지 못하면 백성은 수족을 둘 데가 없어지므로 군자는 명분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로 3)

정명사상은 바로 시비와 선악의 표준을 세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것은 사물의 상에 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 즉 사물을 바르게 이해하고 판단을 바르게 하며 행위의 규범을 바르게 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온갖 복잡한 현상과 이들에 회통하는 상을 포착하여 바른 이름을 붙이는 것이므로, 정명사상과 충서사상과 일이관지는 종국적으로 같은 정신과 윈리를 나타내는 개념들이다. 정명사상은 정치를 논할 때, 충서사상은 도덕을 논할 때, 일이관지는 교육을 논할 때 각기 일차적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