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69. 끌어내려진 애로 호의 영국국기-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지식창고지기 2010. 4. 22. 09:43

69. 끌어내려진 애로 호의 영국국기-제2차 아편전쟁(1856--1860)

 


  이편전쟁의 패배로 맺은 남경조약은 오랫동안 지켜오던 중화의식이 무너짐을 의미했다. 그렇다고 중국이 한순간에 호락호락 서양 세력들의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주지는 않았다. 5항구를 열어 무역을 허용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 실행을 미루고 있었고, 아직은 내륙지역까지 외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영국 상인들은 항구를 벗어나지 못하는 제한된 무역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 이후 영국산업을 이끌어왔던 면제품 산업이 생산과잉이 되면서 하루빨리 넓은 시장을 개척해야 했다. 중국은 그들에게는 아주 먹음직스러운 떡이었다. 서양 자본주의 국가들은 다른 분쟁을 만들어서라도 중국을 굴복시켜 내륙 깊숙이 진출려고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외국 자본주의의 침략에 대항 저항이 커지고, 영궁에 대항하는 민중운동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광동의 영국상관이 공격받았으며, 광동성의 관리가 영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성내의 중국인 지역으로 영국인들의 출입을 허용했을 때 격렬한 저항이 있어 결국 그결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던 사건도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얼마 동안은 영국도 러시아와 크림전쟁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무력압력의 시기를 늦추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애로 호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애로 호는 홍콩에 선적을 둔 중국인 소유의 배로서 선장이 영국인이었다. 이 배가 광동성에 정박하고 있을 때 중국관리가 배에 올라 영국국기를 끌어내리고 해적혐의로 중국 선원 12명을 체포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광동의 영국영사 파크스는 양광총독에 항의하고 사건의 마무리를 위한 교섭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그러자 바로 다음날 영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광주를 공격하고 청의 관청에 쳐들어갔다.


  물론 이 모든 사건의 바탕에는 영국의 자본주의가 중국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영국 내에서는 "법률적으로 보나 도덕적인 면에서 보나 정당하지 않는 싸움이다"라는 반대 여론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중국을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했다.


  중국인민들의 반영감정은 더욱 높아져갔고 두 나라는 극한적인 대립상태가 되었다. 영국해병이 목 잘리는 사건이 있었고 영국은 이를 이유로 영국인이 죽은 지역의 마을을 불살라버렸다. 또한 영국은 홍콩의 중국인 빵집의 빵에서 비소가 나온 것을 중국인의 음모라고 하여 홍콩에 사는 중국인 약7만여 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중국과의 싸움에 프랑스를 끌어들이려 했다. 프랑스 역시 아시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참에 때마침 중국에 선포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중국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한 명이 중국관리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57년 6천여 명의 영, 프 영합군은 광동을 점령하고 청에게 교섭에 응할 것을 요구했으나 청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영, 프 연합군의 공격은 계속되어 북경 가까운 천진을 위협하게 되자 청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서양 강대국들과의 교섭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맺어진 조약이 천진(텐진)조약과 북경(배이징)조약이다. 북경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서양의 외교사절이 북경에 상주할 수 있게 할 것
  * 남경조약 때 5개항 외 10여 개 항구를 추가 개항할 것
  * 외국인의 중국 내륙지역 여행권리를 인정할 것
  * 크리스트 교의 선교의 자유를 인정할 것
  * 홍콩 옆에 있는 구룡반도를 영국에게 할양할 것


  중국은 북경조약으로 인해 항구뿐만 아니라 내륙지방에도 외국인들의 활동을 허용하게 되었으며, 서양 자본주의가 내륙 깊숙이 침투하여 중국민중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 조약은 또한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전쟁에 가담했던 프랑스는 크리스트 교 종교활동의 자유를 승인케 함으로써 강희제 이후 활동을 할 수 없었던 크리스트 교에 대한 제한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