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70. 지상에 세우려 한 농민들의 천국-태평천국 운동(1850--1864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2. 09:44

70. 지상에 세우려 한 농민들의 천국-태평천국 운동(1850--1864년)

 


  태평천국을 이끌었던 홍수전은 영국에 의한 아편무역의 한창이던 19세기 초 1814년 광동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집안은 다른 지역에서 그곳으로 이사해와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 홍수전은 총명하여 그의 집에서는 다른 형제들에게는 농사일을 돕게 하면서도 그에게는 공부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상승의 거의 유일한 통로라고 할 수 있는 과거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하고 실망과 좌절감, 그리고 주변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한 죄책감들로 괴로워하면서 방황하게 된다. 1837년 또다시 과거시험에 떨어진 후 그는 높은 열레 휩싸이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죽음과 삶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이 열병의 고통을 겪으면서 신기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어떤 노인으로부터 "악마와 요괴들을 무찌르고 세상을 악으로부터 구해내라"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 꿈의 내용이 그가 꿈을 꾸기 몇 년 전에 서양 선교사로부터 우연히 받았던 (권세양언)이라는 크리스트 교 포교를 위한 책의 내용과 일치함을 알고 그 꿈속의 노인을 상제, 즉 여호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신이 계시한 지상천국을 만들기 위한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의 이름이 '배상제회'다. 처음에는 간청의 눈을 피해 포교활동에 나서 1년 만에 그의 뜻을 따르는 무리 2천여 명을 모았다. 그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은 주로 지주들의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농민들, 숯을 굽거나 광산에서 일하거나 하여 생계를 이어가는 억눌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홍수전의 주변에 모여든 것은 그가 내세운 평등이념 때문이었다. 현실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홍수전이 제시하는 평등사회는 천국으로 비쳤을 것이다.


  홍수전을 중심으로 한 배상제회는 사람들을 모아 교단의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그들을 하나로 할 수 있는 교리를 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오직 여호화만을 섬기며 남녀와 신분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선전했다.


  1850년 배상제회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모두 모았을 때 1만여 명이 모였다. 그들은 자기의 전재산을 내놓고 모두 공평하게 분배하는 등 모임 내에서부터 평등을 실현했다. 또한 가족을 풀어 헤치고 남녀를 따로 나누어 군대를 편성했으며, 청나라의 지배에 반대한다는 의미로 만주족이 강요했던 변발을 버리고 머리를 길렀다. 그래서 그들은 자발적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이듬해(1851) 이 모임의 지도자들은 광서의 금전이라는 곳에서 태평천국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선포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사회는 나라이름에 보이슥이 평등한 지상낙원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어 태평천국군은 청나라 군대와 싸우면서 북쪽으로 거슬러올라가기 시작했다. 홍수전을 천왕으로 하고 그 주변에 양수청이 동왕, 조소귀는 서왕, 풍운산이 남왕, 위차휘가 서왕, 석달개가 익왕으로 가각 군대를 이끌었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면서 그들이 정복한 지역에서 적과 내통한 자나 약탈, 폭행을 일삼는 자들을 처벌하고 태평천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 등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대했다. 53년초 호남성의 중심지인 무창을 함락했을 때 태평천국군은 5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53년 3월, 마침내 양자강 유역의 남경을 정복하여 남경을 천경, 특 태평천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들이 봉기한 지 2년여 만이었다.


  세력을 확대하고 국가조직을 갖추어나가면서 사회제도 역시 정비되어갔다. 태평천국 내의 백성은 모두 평등한 형제 자매였으며, 전족을 없애고 여자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았다. 또한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는 천조전무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사유재산은 인정하지 않았다. 즉 "밭이 있으면 함께 경작하고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먹고 돈이 있으면 함께 쓰며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혜택받을 수 있는" 평등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멸만흥한의 깃발을 내걸고 만주족의 중국지배에 반대하여 청나라를 몰아내고자 했다.


  태평천국의 이러한 정책을 억눌렸던 농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었지만, 기득권 계층, 즉 재산을 많이 가진 지주, 청나라 지배 아래서 관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가려는 위험한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에게도 매우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청나라는 태평천국군의 제압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중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외국세력도 태평천국군의 세력확대를 원치 않았다. 중국 내의 움직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영국은 1853년 영국공사가 태평천국의 수도인 남경을 방문하여 청나라와 영국이 맺은 남경조약을 태평천국 지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태평천국의 지도자들은 아편무역 이외의 자유로운 통상은 인정하지만 외국이 태평천국의 통치권에 간섭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말했다. 결국 외국세력은 태평천국의 확대가 그들이 중국에 침투하는 데에 별로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각 지방의 유력자들을 '향신'이라고 불렀는데, 이들도 태평천국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길러 대항했는데, 그중에 가장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던 사람은 호남의 중국번이었다. 청나라의 군대보다는 이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리고 있던 군대가 태평천국의 세력확대를 막는 데 더 큰 역할을 했다.


  태평천국군은 향신층의 반격으로 주춤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의 내분에 있었다. 1856년 태평천국군은 엄청난 내분에 휘말려 지도자인 양수청이 위창휘에게 살해된 데 이어 위창휘 역시 내분의 와중에서 살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태평천국의 평등사회 이념은 빛이 바래가기 시작했다. 군기는 문란해지고, 태평천국의 관리들은 토착 실력자들과 야합,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엄격한 규율과 금욕주의, 사유재산 금지의 원칙도 허물어져갔다.


  마침내 64년 7월 중국번이 거느리는 상군이 남경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하여 남경을 함락시켰다. 홍수전은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하기도 한다. 나머지 지도자는 중국번에게 잡히기나 죽거나 하여 14년 동안 중국의 중요지역을 대부분 장악했던 태평천국은 끝을 맺었다. 태평천국을 무너뜨리는 데는 중국번의 상군뿐만 아니라 그의 부하였던 이홍장이 이끈 회군, 그리고 영국인 장교에 의해 훈련된 중국인 부대인 상승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양세력의 처지에서는 태평천국이 처음에는 크리스트 교 국가를 선언했기 때문에 서양이 중국에 침략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는 예측 아래 지켜보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들이 곧 한족의 민족주의적인 모습을 드러내자 태평천국을 공격하는 데 가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