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100. 지는 해 뜨는 별 - 한, 중 수교 (1992년)

지식창고지기 2010. 4. 27. 09:39

100. 지는 해 뜨는 별 - 한, 중 수교 (1992년)


  그때 우리나라는 -
  1990년 / 한, 소 수교
  1991년 / 지만자치체 부활,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1992년 / 한, 중 수교

 

  1992년 8월 한국과 중국은 국교를 열었다. 중국은 한국과 수교하는 조건의 하나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다. 대만은 한국에서는 자유중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두 나라는 1930년대 항일투쟁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뿌리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한국의 독립운동을 했으며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당시 한국임시정부와 중국국민당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공동의 적으로 두고 있었던 우방이었다. 한국의 독립이나 중국의 영토회복은 일본을 물리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국민당과 공산당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갈라져 갈라져 이었듯이 한국에서도 항일운동세력은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갈라져서 거의독자적인 활동을 했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과 관련을 가지면서 활동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주로 국민당과 관계를 맺고 있?고 장개석의 지원을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이념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나 또 한차례의 내전이 전개되었고, 1949년 공산덩에 패한 국민당과 장개석은 그의 50만 군대 및 국민당 조직을 대만으로 옮겨삳. 그리고 대만의 중화민국은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국교를 열고 중국이유엔에 가입하면서 밀려날 때까지 미국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면서 냉전체제하 반공국가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해방 이후 이념대립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점령에 의해 남북이 갈라져, 남쪽에는 대한민국이 수립되었고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어 북한의 남침으로 6, 25라는 동족상잔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6, 25때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덩연히 남한을 지원했고 중국공산당은 북한을 지원했다. 수십만의 중공군 개입은 전쟁을 북한에게 유리하게 했다. 이 전쟁이 냉전체제 아래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이념의 차이에 의한 적과 동지관계는 매우 분명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 남한은 대만의 국민당 정부만을 인정했고 북한은 공산덩의 중국정부와 친선관계를 맺고 있었다. 남한은 중국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중국공산당이라는 말을 줄인 '중공'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남한은 철저한 반공국가였고 그 점에서 대만의 국민당정부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대만의 장개석도 공산당과 끈질기게 싸웠으며 결국에는 그들에게 패해 대만으로 밀려나야 했었던 쓰라린 경험이 이었고 남한은 북한의 남침을 받아 거의 공산화되기 직전까지 가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했다.


  남한에서는 5, 16군사정권이 들어서서 반공을 국시로 하게 되어, 대만은 여전히 자유중국이었고 가장 소중한 우방이었다. 미국은 대만과 남한을 동시에 지원했다. 냉전체제 아래서 두 나라는 소련과 중국이나는 두 개의 거대한 사회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국가의 세력확대를 막는 동북아시아의 방파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대 이른바 데탕트라고 하는 화해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런 절대적인 관계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수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공을 이념으로 하는 남한은 70년대까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원치 않았다. 대만과의 우정은 계속 강조되었다. 미국이 대만을 버렸을 때도 한국과 대만과의 우정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념대립이 완화되고 사회주의가 몰락하는 등 세게사적인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이와 같은 관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현실론이 대만과 대한민국 사이에도 어김없이 적용되었다.


  이념보다는 자국의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시작하면서 남한은 중국을 이념적인 적대국가라기 보다는 막대한 잠재력을 가진 교역 상대국으로 보게 된 것이다. 중국도 그들의 경제발전을 모델을 남한에서 구하면서 남한의 자본을 끌여들여 경제 발전에 도움을 받고자 했다.


  남한과 중국은 점차 비공식적인 관계를 확대시켜나가기 시작했다. 무역거래가 이루어지고 남한인의 중국방문이 제한적으로나마 허용되었다. 결국 1992년 8월 대한민국과 수교하는 조건으로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했고 대한민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했다. 대만인은 한국의 배신에 분노했으며 외교관계 및 무역관계 등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반공으로 묶인 수십 년간의 혈맹관계는 이로써 막을 내렸다. 한국정부는 대만대사관을 비워주기를 요구했고 그 자리는 주화인민공화국 외교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내려지고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걸리게 된 것이다. 해는 떨어지고 붉은 별이 뜨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