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 이세민과 정관의 치
수말의 반란과 당왕조의 흥기
수말을 고하는 불길한 조짐
수 양제의 가혹한 주구에 대하여 인민은 어떠한 저항을 했을까. 이미 양제 즉위 7년째가 되는 610년[대업 6] 정월 원단에 도둑 수십명이 소복차림으로 향을 피우며, 꽃을 들고 미륵불이라 부르며, 동도 낙양 궁성의 정면으로부터 난입하여 문위[門衛]가 얼떨결에 인사를 하고 있는 동안에 그 무기를 빼앗아 날뛰었다. 그러나 침착한 제왕 간[齊王 ? : 양제의 아들]의 행동에 의하여 이 사건은 안정되었으나 관계자를 조사한 결과, 천여가가 연루된 꽤 큰 사건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미륵불이란 말세에 미륵보살이 하생[下生]하여 석가의 교화에서 누락된 중생을 구한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에 바탕한 것이다. 미륵불을 제창하고 봉기하는 것은 북위[6세기초] 무렵부터 나타났는데 이와 같은 반란을 미륵교비[彌勒敎匪]라고한다. 613년에도 송자현[송자현]이 이와 같은 반란을 일으켰는 데, 이 610년의 사건은 그 선구가 되는 것이었다. 610년의 사건은 그대로 진압되었다고는 하지만 양제의 앞길에 불길함을 예언하는 듯한 사건이었다.
지금까지 수말의 반란은 611년[대업 7년]부터 시작되었다고 이야기 되어져 왔지만, 나는 본격적인 반란기는 613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611의 반란은 사료에 “도[盜]”라든가 “군도[群盜]”라고 쓰여져 있고, 게다가 612년에는 전혀 반란 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또 611년은 양제의 제1차 고구려 원정을 위한 징모[徵募]가 겨우 시작된 해이다.
수말의 반란은 현재의 산동성 일대에서 많이 일어났다. 이 부근은 황하의 옛 물길이 많았고 또, 그곳은 반란군이 숨을 절호의 장소로, 송·원의 사이에 완성된 백팔명의 도적소설 “수호전[水滸傳]”에 나타나는 도적들이 결집하는 양산박[梁山泊]도 여기에 있었다. 이 무렵 이 일대에 반란이 많이 있어난 것은 고구려 원정의 모순이 여기에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여기는 원정육군의 기지인 탁군[?郡 : 지금의 북경부근]과 수군의 기지인 동래[東萊 : 산동성 掖縣]를 한 변으로 하는 정삼각형의 지대에 있고, 병사 및 수송대의 징발에도 가장 형편이 좋은 곳이었다. 또 611년에는 황하의 대범람이 일어나 이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받은 것도 반란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612년 제1차 고구려 원정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백만이상의 군대를 동원하고도 패전으로 끝났다. 그 다음해 613년, 또 다시 제2차원정이 계속되는 것이 결정되었다. 여기에 “요동을 향해서 쓸데없이 죽는 일은 없어지게 하라”라고 외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자신의 수족을 상처내고 “복수, 복족 : 福手, 福足”이라고 외치는 등, 염전적인 분위기가 일어나서, 그 가운데 수왕조는 반란기에 돌입해 간 것이다.
양현감의 반란
隋末 群雄 割據 要圖
613년[대업 9] 6월 3일,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 중 양제 옹립의 최고 수훈자인 양소의 아들로 당시 예부상서[육부 중의 예부의 장관]의 높은 직위에 있던 양현감[楊玄感]이 대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후방의 수송기지의 하나인 여양[黎陽 : 하남성의 황하의 북쪽 濬縣]에서 독운[督運 : 수송사령관]의 지위로 십여만명을 이끌고 갑자기 행동을 일으킨 것이다. 그 구호는 인민의 생명을 구제하고, 양제를 부인하여, 정치를 양제의 아버지인 수문제의 구체제로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양현감의 참모로 후에 수말반란기 최대의 반란을 형성한 이밀[李密]은 양현감에게 세가지 책략[三策]을 건의하였다. 제1안은 곧 고구려 원정군의 목덜미를 급습할 것, 제2안은 서경 장안으로 진격하여 그 요충지에 의거할 것과 제3안은 동경 낙양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제3안은 공격에 세월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열책[劣策]으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현감은 당시 낙양에는 고구려 원정군의 장군들의 가족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여기를 습격하는 것을 최상책으로 간주하여 이 제3안을 채용하였다.
반란이 일어나자 양제는 당시 장안부군에 있던 위현[衛玄]에게 4만의 군대를 이끌고 양현감의 군에게 대항케 하였으나 도리어 퇴격당하였다. 그래서 양제는 전 고구려 원정군에게 철퇴를 명하고 양현감의 군에게 향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현감의 군은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군과 위현의 군과의 사이에서 협공당하여 격파되었다. 같은 해 8월 1일의 일이었다.
이밀 집단의 대반란
이 무렵이 되자, 반란은 각지에서 발발하고 전국으로 확대되었으며 가장많았을 때는 그 집단수가 2백에 달하였다. 가장 큰 집단은 산동성의 “아구의 적[阿舅의 賊]”이라고 불리어지는 유패도[劉覇道]로서 그 수가 수십여 만명이나 되는 반란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러나 615년[대업 11]무렵까지의 반란은 도·군도·적이라고 칭하여지고 있듯이 도적 집단적인 요소가 많았으며, 수왕조 타도를 향한 혁명적 색채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가혹한 징발에 괴로워한 많은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이에 가담하고 있었다고 보여지며, 그 구호도 여전히 양제 타도를 외치고 있기는 하였지만 겨우 “개황의 구[開皇의 舊 : 문제의 치세]”로의 복귀를 말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617년[대업 13]이 되자, 그 때까지의 약탈파괴 본위의 소규모적인 반란집단이 점차 통합되어 대규모의 열 몇개의 군웅할거의 형세가 되었다. 그 최대의 것이 일찍이 양현감의 참모였던 이밀의 집단이다. 이밀은 서위의 팔주국의 한사람인 이필[李弼]의 증손에 해당한다. 당왕조를 세운 이연의 조부 이호, 북주의 사실상의 개창자 우문태, 수문제의 황후 독고의 아버지인 독고신도 마찬가지로 서위의 팔주국이었다. 이밀의 가문은 전형적인 북주·수·당으로 일관하는 지배집단=관롱[關?]집단의 출신이었다. 이밀은 문무를 겸비하였으며, 뜻이 크고 원대한 일류의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양제를 섬기며 무관이 되었는데, 이윽고 관직에서 물러나 독서생활에 들어갔다. 일찍이 양소에게 그 인물됨을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양현감에 의해 그의 참모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양현감의 거병에 있어 세가지 책략을 건의 한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만약 양현감이 그 제1책에 따라 곧 고구려 원정의 목덜미를 습격하든가 혹은 제2안에 따라 장안을 점령했더라면 양현감의 천하제패는 실현되고, 이밀은 최고의 공신이 되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양현감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 간 후, 이밀은 각지의 반란집단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도망생활을 계속하였고, 수왕조측은 이를 집요하게 추적하였다. 반란집단 중에서도 이밀을 수측으로 밀고하는 자도 있었지만, 잘 도망가서 마지막에는 와강군[瓦崗軍]이라고 불리던 적양[翟讓]의 집단에 들어갔는데 일찍 도둑 무리 성질을 버리고, 대의에 의거한 규율있는 집단의 형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적양은 자신의 능력의 한계성을 깨닫고 결국 이밀에게 군의 주도권을 주었다.
그래서 이밀은 우선 수의 곡창인 낙구창[洛口倉 : 興洛倉이라고도 한다. 하남성 공현 鞏縣]을 습격해서 굶주리고 있던 민중 수십만에게 식량을 주고, 수십만의 군을 이끌게 되었다. 617년 2월의 일이다. 수왕조측은 양제의 손자 월왕 동[越王 ?]으로 하여금 낙양을 지키게 하였지만, 그 해 7월 당시 난을 피해 남방의 강도[江都 : 양주]에 있던 양제는 용장인 왕세충[王世充]을 파견하여 이밀에 대적케 하였다. 이에 낙양을 둘러싸고 이밀과 왕세충의 격전은 계속되었다.
같은 해의 11월에는 후술과 같이, 당왕조를 일으킨 이연이 장안을 점령하는 데, 이와 같은 무렵, 이밀은 그 집단 내에서 구주[舊主]인 적양과 전리품의 분배일로 다투었고, 결국 그를 죽인 것이 원인이 되어 이밀집단 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 다음해, 이밀은 왕세충에게 패하여, 결국 이연에게 항복하여 등을 돌리자 죽임을 당하였다. 한때, 수황실 양씨에 대신해서 천자가 되는 자는 이씨라고 하는 요언이 흘렀는데, 이로 인해 수왕조 창업 때 양견에게 몰래 제위에 오를 것을 권했던 이목[李穆]의 아들인 이혼[李渾, 자는 金才]은 살해당하였다. 이것은 실은 이밀의 일이라고도 말하여졌지만 지금은 이와같은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연의 거병
이연[당 고조]은 서위 팔주국이었던 이호의 손자이다. 또 어머니인 독고씨는 서위 팔주국 독고신의 딸로 수문제의 독고황후 및 북주 명제의 독고황후와 자매지간이다. 따라서 이연은 양제와 어머니측에서의 사촌에 해당한다. 또 이연의 처, 즉 후에 두황후[竇皇后]의 어머니는 북주의 문제[우문태]의 딸인 양양공주[襄陽公主]이므로 우문태의 손자에 해당한다.
이연 부처는 이상과 같은 관계로부터 말하자면, 서위·북주·수라고 하는 세 왕조의 덕을 입어 왔는 사람들이다. 또 이연은 서량[西? : 오호십육국의 하나]의 무소왕[武昭王]이 된 이고[李暠]의 7대의 손[표24 참조]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계도에는 의문점이 있음을 진인각은 상세히 고증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이연의 가문은 혹은 서위의 팔주국의 가문이 거의 다 그러하듯이, 북위의 황실과 마찬가지로 선비계이며 그 호성[胡姓]으로서 증여받은 것이라고 말하여지는 대야씨[大野씨]가 그 본래의 성일지도 모른다.
이연은 566년[북주 무제의 天和 원년]에 태어나, 16살 때 수문제를 섬기고 그 시위관인 천우비신[千牛備身]이 되었다. 이 후 지방장관, 중앙관을 역임하였는데, 가문에 비해서는 그다지 중요한 관직에는 오르지 않았다. 613년[대업 9], 48세 때 양제의 제2차 고구려 원정에 있어, 독운[수송사령관]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 때 일어난 양현감의 반란에 호응하여 병부시랑[차관]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측으로 도망갔는데, 양제는 그 곡사정의 친척인 자가 홍화[弘化 : 감숙성 경양현 甘肅省 慶陽縣]의 유수[留守]라고 하는 중임에 있던 것을 파면하고, 이연을 기용하여 섬서성으로부터 감숙성에 걸쳐 13개군의 병을 통솔케 하였다.
비상시에 신뢰가 가는 모친측의 일족을 등용한 것이다. “유수”라 하는 것은 국가비상시에 황제의 대권을 그 지역에 한정해서 위양받는 임시의 관직이다.
잇따라 616년[대업 12]말에 이연은 태원[산서성]유수로 승진하였다. 태원은 동쪽으로 정형구[井?口 : 낭자관 娘子關]을 넘으면 화북의 대평원으로 나오고, 서남으로 황하를 넘으면 장안[서안시]이 나오며, 남하하면 낙양으로 나올 수 있다고 하는 혁명의 근거지로서는 옛부터 절호의 지역이다.
617년 7월, 천하동란의 형세를 보고, 이연은 태원유수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근의 문무관을 아래에 편입하여, 3만의 군으로 장안[서경]을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 태원거병에 즈음하여 아직 이연이 망설이고 있을 때, 태원에 있었던 이궁[離宮]에서 양제의 행행용의 궁녀를 살짝 데려다 연회를 열었다. 이것을 빌미로 사형당할 것이라며 배적[裴寂]이 이연을 협박해서 결단케하였다는 이야기 등은 이연의 차남 이세민의 획책이라고 하여, 이 태원기의[太原起義]는 이세민 한 사람의 공적인 것처럼 기재된 사료가 많다. 그러나 당시 이세민은 20세, 아버지 이연은 52세,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李建成]은 29세였다. 그러므로 20세의 세민이 기의 때 모든 일을 혼자서 해냈다고 하는 것은 세민을 지나치게 미화시킨 사료 탓일 것이다.
이연은 3만의 군으로 대장군부[大將軍府]를 구성하고, 장사[長史 : 본부의 장관]에는 태원에 있었던 이궁의 부감[副監 : 차관, 당시의 장관은 흠원 欠員]인 배적이 지명되었다. 배적은 당시 태원에 있어서 이연에 다음 가는 수의 고관이었다. 또 사마[司馬 : 본부의 차관]에는 태원에 있던 진양현[晋陽縣]의 장관 유문정[劉文靜]이 지명되었다. 이 두 사람은 후에 당왕조 창업시의 최고관직에 취임하게 된다.
군은 좌·우·중의 삼군편성을 취하고, 좌군을 이연의 장남인 건성이 통솔하고, 우군은 차남인 세민이, 중군은 세민의 아들인 15살의 원길[元吉]이 통솔하였며, 태원의 수비부대가 되어 남았다. 이 이연집단을 당시의 호족집단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태원에 부임하여 겨우 2년 남짓한 이연에게는 호족집단을 구성할 틈이 없었다. 또 대장군부에는 이연과 그 세 아들이외에는 호족집단의 중핵이 될 만한 이연일족의 참가는 거의 없었고, 지휘관도 태원근방의 문무관이 많았다. 그러므로 이연집단은 태원유수의 지위를 이용한 관료집단의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된다.
7월에 태원을 출발한 이연군은 도중에 약간의 수군의 저항은 있었으나, 파죽의 진격을 보이고 빠르게도 그해 11월 9일에 장안을 점령하였다. 발진 때의 3만의 군대가 이 때는 20만의 대군이 되어 있었다.
장안을 점령한 이연과 양제의 횡사
이연은 장안점령 후, 곧 당시 장안에 있었던 양제의 손자로 나이 13세의 대왕 유[代王 侑]를 옹립하여 수의 공제[恭帝]로 하고, 양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하였다. 연호는 대업 13년[617]을 의녕[義寧] 원년이라고 개원하였다. “수서”에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양제는 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이연의 완전한 일방적인 조치였다. 이윽고, 공제로부터 선양[禪讓 : 평화혁명]의 형식으로 당왕조를 여는 복선을 설정한 것이다. 따라서, 다음해 3월, 양제가 우문화급에게 살해될 때까지 양제조[煬帝朝]는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이연은 공제로부터 가황월·사지절·대도독내외제군사·상서령·대승상·당왕[假黃鉞·使持節·大都督內外諸軍事·尙書令·大丞相·唐王]에 임명되었다. 즉, 북주의 정제가 양견[수문제]을 대한 경우와 같은 형식으로 정치의 실권을 위임받아 당왕조 창업의 기초를 굳혔다. 이연은 대승상부[大丞相府]를 열었지만, 그 실질은 대장군부의 조직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무렵에서부터 그 다음해에 걸쳐, 당시 최대의 군단을 구성하고 있던 이밀은 월왕 동[越王 ? : 이연이 옹립한 공제와 형제]을 낙양에서 옹립한 왕세충과 심하게 싸우고, 당측도 이에 파병해 보았지만 그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철수하였다.
한편, 양제는 천하의 전란을 멀리하고, 남쪽의 강도[양주]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게으런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들 시위하는 군사에는 장안부근의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이연의 장안점령의 소문이 전해져서 동요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618년[의녕 2] 3월, 수의 명장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인 우문화급[宇文化及]은 양제가 독약을 들이키고 자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이를 교살하고 스스로 대승상이라고 칭하며, 수문제의 손자인 진왕 호[秦王 浩]를 옹립하여 황제로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양제 살해의 보고가 전해지자, 우선 후량[後梁 : 서위, 북주, 수의 괴뢰정권] 선제의 증손에 해당하는 소선[蕭銑]이 강릉[호북성]에서 제호를 칭하고, 낙양에서는 왕세충이 앞에서 말한 월왕 동을 황제로 하여 연호를 황태[皇泰]로 하였다. 따라서 이 황제를 황태주[皇泰主]라고 한다.
당왕조의 창업
이연은 618년 5월 20일, 공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에 오르고, 당왕이었던 점에서 연루하여 왕조의 이름을 당으로 하였으며, 연호를 무덕[武德]이라고 정하였다. 이연은 묘호[廟號]에 따라 고조라고 한다. 이것이 당왕조의 창업인데, 아직도 천하는 궁웅할거의 상태였기 때문에 통일왕조의 황제라고 하기에는 미진하였다. 그러나, 고조 이연은 곧 배적[裴寂]·유문정[劉文靜]에게 율령의 수정을 명하고, 국가의 기본법인 율령의 완비를 목표로 하였다.
그리고 6월 1일, 장자 이건성을 황태자로, 차자인 이세민을 최고관인 상서령[상서성의 장관]에 임명하였으며, 배적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상서성의 차관]에 임명하였고, 유문정을 납언[納言 : 후에 문하성의 시중=장관에 해당]에, 또 두황후[竇皇后]의 일족인 두위를 내사령[뒤에 중서령=중서성의 장관]에, 마찬가지로 후량 명제의 아들이면서 양제의 두황후의 동생이기도 하며 공제의 민부상서[民部尙書 : 당의 호부상서에 해당한다]가 되어 있던 소우[蕭瑀]를 내사령에 임명하고, 이하 제관의 임명을 행하였다. 그리고 수의 대업률령[大業律令]을 폐지하고, 신격[격은 율령의 보족] 53조만을 공포하였는데, 율령은 수문제의 개황률령을 부활시킨 것일 것이다.
그 무렵 이밀은 일단 왕세충이 옹립한 황태주[월왕 동]로부터 제위를 받았지만 왕세충과 맞지 않았다. 또 양제를 살해하고 양제의 소황후와 진왕 호를 옹립하여 북상해 온 우문화급과 싸워서 그 훌륭한 군사와 말[强兵良馬]들을 잃었으며, 게다가 왕세충에세 패하여 왕년의 이밀의 면모는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당에 투항하기로 결의했다. 이것에는 전년에 이연이 장안으로 진격하던 중, 두 사람은 편지를 교환하였다. 그런데 이연은 자신에게는 천하를 차지할 대망은 없고, 단지 당왕의 지위가 보장되면 좋다고 말하여 이밀을 속였고, 이밀은 이를 믿었던 안일함이 있었다. 이밀은 이연 진영에 투신하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해 줄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투항한 이밀에게 이연측은 냉정하였다. 이밀은 결국 뜻이 맞지 않아 도망가다 살해당하였다. 군웅할거의 형세 속에서 일시적이지만 최대의 세력이었던 이밀이 이렇게 망한 것은 이연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밀군은 붕괴하였지만, 고조 이연의 무덕 9년간은 군웅과의 싸움이 끊임이 없었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최대의 적은 낙양의 왕세충이었다. 620년[무덕 3] 7월부터 당군은 왕세충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왕세충측도 하북 최대의 농민군을 이끄는 두건덕[竇建德]의 원조를 구하여 두건덕은 10여만의 군을 거느리고 있는 왕세충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 속에서 이세민의 분전은 훌륭하였기 때문에 결국 왕세충·두건덕 연합군을 무너뜨리게 되었는데, 다음해 5월에는, 두건덕이 평정되어, 왕세충도 낙양에서 항복하였다. 즉 여기서 당왕조는 최대의 군사적 위기에서 벗어났다.
624년[무덕 7], 당왕조 최초의 율령인 무덕률령[武德律令]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왕조 창업 당초에 우선 공포되었던 53조의 격을 개황률령에 삽입한 것 뿐이라고 말해지고 있기 때문에[현존하고 있지 않다], 개황률령과 큰 차이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수문제 치세의 부활이었다. 한편 최근 수말의 반란을 중시하고 이 속에서 당왕조의 창업, 즉 수당혁명을 파악하려고 하는 역사가도 있는데, 당시의 반란에 참가하던 농민에게 혁명적인 의식을 과도하게 구하는 것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말 반란의 최후에 남은 군웅은 수왕조 관료의 퇴관자가 많았고, 수당혁명은 북주, 수이래의 지배집단을 뒤집을 만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양제의 주구[誅求]에 대한 인민의 저항으로서 수말의 반란은 결코 역사상 무시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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