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마르크스주의 전파와 모택동사상의 발전

지식창고지기 2010. 5. 28. 09:34

마르크스주의 전파와 모택동사상의 발전

 

 

레닌의 10월 혁명은 5.4시기 많은 지식인을 자극하였다. 1919년 이대조는 『신청년』에 「마르크스연구」 특집호를 실었고, 이후 엥겔스와 레닌의 저작을 소개하였다. 그런데 방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 가운데 그들의 실제 행동을 결정한 것은 계급투쟁설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이대조, 진독수, 모택동 등이며, 그 가운데 이대조는 처음으로 과학과 민주를 사회주의적으로 재해석하였다. 그가 말한 ‘민주’는 서민과 노동자의 민주였으며, ‘과학’은 유물사관이었다. 그는 호적과 ‘문제와 주의 논전’을 일으켜 사상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대조의 마르크스주의는 농업소생산의 전통 사회에 기초한 인민주의와 도덕주의였으며,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농업국가의 전통 문화와 결합한 모습이다.

 

1927년 대혁명이 실패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면 문제 해결을 위해 역사유물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보다 응용에 주력했던 것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이론 탐색을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소련 유학파인 구추백은 변증유물론을 도입하였다. 역사유물론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으로의 중점 이동은 마르크스로부터 레닌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특히 구추백은 중국혁명 전략에 관한 핵심 문제에서도 가교 역할을 하였다. 당시 모택동은 농촌에 기반 한 실천을 바탕으로 ‘농촌에 의한 도시의 포위’, ‘농촌 근거지의 건설’, ‘16자 전법’ 등의 전략 전술을 내어놓았다. 모택동은 초기에 자유주의․공상적 사회주의․무정부주의를 비롯하여 선진 제자사상과 독일 고전철학에 관심을 보였고, 진화론 같은 당시 유행한 대부분의 사상을 학습하였다. 따라서 초기에는 유물론과 관념론적 요소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으면서 역사유물론과 유물변증법을 중국현실 문제에 적용하였다. 또한 「중국 혁명전쟁의 전략문제」 등을 발표하여 전쟁 문제를 마르크스주의 변증유물론의 인식론적 이론형태로까지 끌어올려 논증하였다.

 

모택동 저작의 논술형식은 일반에서 특수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사유의 실제과정은 특수에서 일반으로 나아가는 경험적인 총괄을 꾀하고 있다. 이러한 모택동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중국 현실과 전통 병가사상에 결합시킨 것이었다. 「실천론」에서 모택동은 실천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을 제기하였으며, ‘직접경험(親知)’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하였다. 모택동은 사상은 주관적이며 실천은 주관이 객관에 나타난 것인데, 이것이 인류의 특수한 능동성인 ‘자각적 능동성’이라고 하였고, 아울러 실사구시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경험론적 유물론은 ‘자각적 능동성’이 맹목적인 행동에 빠지지 않게 하여 혁명전쟁과 정치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경험이성’이 보증해 주는 것이었다. 모택동은 또 당 내부의 교조주의를 반대하기 위하여 「모순론」을 지어 모순의 보편성과 특수성, 주요 모순 사이의 동일성과 투쟁성 같은 이론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변증법의 삼대 법칙 가운데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을 부정의 부정 법칙이나 양질전화의 법칙보다 상위 개념으로 파악하였다.

 

1949년 혁명이 달성되었지만 여러 가지 내부 장애들이 생겨났고, 모택동은 극좌 비판에서 극우 비판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항일기간 중에 자신이 제기한 ‘신민주주의’의 우경적 착오를 비판하면서 사회주의 개조단계로 넘어갈 것을 주장하였다. 모택동의 주요 관심사는 생산관계에서의 끊임없는 혁명이었으며 이를 위해 엄중한 정치투쟁이 필요했다. 이 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양군대전(兩軍大戰)’이었으며, 이데올로기에서 일상생활까지 모든 영역에 적용되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과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였다. 이 시기 모택동은 인간의 주관의지와 노력을 지나치게 강조한 동시에 끊임없는 계급투쟁을 절대화시켰다. 결국 극단적인 주관주의로 흐름으로써 자신이 만든 실사구시의 원칙을 벗어나고 말았다.

 

사인방(四人幇)의 몰락과 함께 문화대혁명은 끝이 난다. 1981년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의 혁명 활동과 사상에 대해 객관적이고 전면적인 평가를 하면서 모택동사상의 과학적 가치와 공헌을 긍정하였다. 동시에 만년의 심각한 착오를 비판하면서 모택동사상을 모택동 개인과 구별하였다. 모택동 사후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인도주의(人道主義)’에 관한 논쟁에 잘 나타난다. 이는 계급투쟁을 강조하였던 중국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었다. 현 시기 중국 마르크스주의는 계급투쟁 일변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색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