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슬림의 몰락
중국 이슬람의 역사는 명나라 건국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명나라 건국으로 인해서 중국과 이슬람국가들간의 교류와 왕래의 활성도 및 무슬림들의 사회경제적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중국 이슬람 역사 후기의 무슬림들은 전기의 무슬림들에 비해서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전기와 후기와 전환과정을 살펴볼 것입니다.
초창기에 중국에서 활동하던 무슬림들은 중국과 중국 외부를 자유롭게 오가며 통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이슬람계 중국인들은 대체적으로 일반 중국인들에 비해서 부유했으며, 재산 등을 바탕으로 무슬림들은 일반 보통 한족(漢族)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중국 이슬람의 최고 전성기는 바로 원나라 시대로서, 무슬림들은 원나라의 카스트 제도에서 4등급 중에서 2등급인 색목인 계급을 부여받아서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군림했습니다. 이 당시의 무슬림들의 위상은, 근세 유럽에서의 브루주아들의 권세에 빗댈 수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행정관료 및 의사와 상인 과학자 등으로 맹활약했으며, 원나라는 아랍식 화폐를 발행하고 이슬람식 병원을 지으며 무슬림을 시켜서 원나라 역사서까지 편찬하는 등 이슬람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합니다.
사실 무슬림들의 중국 내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제약은 원나라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나라는 행정요원 및 군인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무슬림들을 징발해서 중국에 강제로 정착시켰으며, 이 외에도 많은 무슬림들이 생업을 찾아서 몽골 치하의 중국에 정착했습니다. 무슬림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동방 정교 기독교인들 역시 중국 땅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주로, 앗시리아 네스토리우스파, 중앙아시아 네스토리우스교도, 시리아의 야코부스파와 마론파, 아르메니아 정교도, 그루지야와 러시아에서 병정으로 뽑혀온 동방정교도 등이 중심이었습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자마자 동방기독교도 및 유태인들이 중국 내에서 순식간에 전멸했다는 사실은, 중동출신 사람들에 대한 명나라의 탄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말해주는 한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사실 무슬림들의 황금기였던 원나라의 역사는 중국사에서 상당히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원나라 궁정은 라마교를 지나치게 광신하여 여러가지 실정을 저질렀고, 제정을 방만하게 관리하여 국력이 빠르게 고갈되었습니다. 많은 한족 농민군들이 원나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원나라는 여러차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국가 체제 자체가 붕괴됨에 따라서 몽골인들은 어쩔 수 없이 중국을 포기하고 몽골로 도망가게 됩니다.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는 시점. 즉 몽골인들이 중국 지배를 포기하고 다시 고향인 몽골로 돌아가는 시점에서, 많은 몽골인들이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여 고향인 몽골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내에 갇혀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몽골인들 중 많은 수는 자신들이 한족인 것처럼 사칭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반수 이상은 명나라에게 투항하거나 포로로 잡혀서 하급 군졸로 강제 징병되고 맙니다. 또한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노예로 잡힌 뒤 거세당해서 명나라 황실을 위해서 천역을 담당하는 내시로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색목인들의 처지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색목인들은 전쟁포로의 신분으로 강제 징집을 당하는 처지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예전 직업인 관료,무역상인,의사직을 내놓아야만 했습니다. 역법과 천문분야 등을 담당하던 일부 무슬림들만 간신히 예전 직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신분과 계급이 형편없이 굴러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시대의 무슬림들의 사회계층이 낮아진 진짜 이유는 정부와 민간에서의 이슬람탄압이 아닌 다른데에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중화주의에 입각하여 외국의 영향을 차단하고자 해외통상을 엄격하게 규제하였으며, 명나라와 다른 국가들간의 교역 특히 이슬람권과의 교역이 크게 위축되고 맙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명나라는 해양세력이 독자적인 군벌로 성장하여 명나라 황실의 중앙집권을 방해하는 것을 염려하여, 해상활동도 대부분 금지하였습니다.
결국 무역은 커녕 본국과의 연락이나 이동조차도 두절된 무슬림들은, 경제적으로 영락한 상태에서 한족 사회 내에 고립되고 맙니다. 무역업이 불가능하게 된 무슬림들은 경제적으로 빠르게 몰락했습니다. 당나라 때부터 송나라 때까지 중국의 무슬림들은 주로 장사로 큰 돈을 벌었지만, 명나라 때부터 이들은 도축업을 전문적으로 담당하거나, 쥐꼬리만한 봉급을 받으며 한족 군대에 자원하거나, 혹은 지방의 잡상인이나 농민으로 정착하는 등 경제적으로 궁핍한 처지에 몰렸습니다.(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현대 중국에 와서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락한 무슬림들은 결국 다각도로 삶의 방향을 모색하다가, 한족과 동화되는 방향을 택합니다. 이 때부터 무슬림들은 본격적으로 중국어와 한학(漢學)을 배우며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명나라 시대엔 중국내의 많은 울라마들이 무슬림 신앙과 유교를 조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유교에 이슬람을 흡수시키려 했던 일부 울라마들의 노력은 이들의 중국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결국 이러한 노력은 완전 실패였다는 것이 얼마 안가서 입증되고 맙니다. (실제로 공자와 맹자를 선지자로 끌어들이는 과정은 시작부터 모순투성이 작업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피르아운 우상숭배, 쿱파르, 아사비야 등등의 세 가지가 근거이지요.)
하지만 무슬림들은 중국 토속신앙과 이슬람신앙과의 타협은 엄격하게 배격하였으며,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중국 무슬림들은 한족에게 동화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중국 무슬림들을 보면 귀신을 막겠답시고 모스크 문 밖에 사자 조각상을 설치하거나, 유교 신자들이 선현에게 제사를 지내듯 성자의 묘에 예비를 보는 관습 등의 어느정도 타락을 보였지만, 고립되고 탄압받는 와중에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성공적으로 지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무슬림들이 명나라 시기 다소 친유교적 성향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명 왕조는 설립 초기부터 무슬림들과 사이가 떫떠름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러한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많은 유학자들이 이슬람이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대해 주장하는 것을, 미신에 바탕을 둔 혹세무민이라고 공격하였으며, 명나라 조정은 이러한 입장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여 이슬람교를 은근슬쩍 배척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정책은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소외감과 박탈감, 저항감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박탈감은 청나라 때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터져나오지만, 벌써 명나라 때부터 이미 여러차례 무장투쟁으로 저항이 터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례로 명나라의 중요한 요새 중 하나였던 하미성이 투르판(현 우이구르의 지방 중 하나)의 술탄에 의해서 함락되자, 명나라 내의 무슬림들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명나라 시기의 회족들의 반란은 대부분 작은 규모였으며, 이 시대의 무슬림들의 무력 투쟁은 그렇게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결국 무슬림들은 중국에 탄압에 맞서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탄압을 참고 인내하는 쪽을 택했으며, 명나라 시대를 기점으로 이들은 점차 소외받는 집단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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