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명나라 말기 군사적으로 활약한 중국 무슬림들

지식창고지기 2010. 6. 23. 17:41

명나라 말기 군사적으로 활약한 중국 무슬림들

 

 

1. 명나라 초기의 중국의 국방상황 및 그로 인한 무슬림들의 용병 입대 배경

  

초창기 명나라 군은 몽골군과의 전투보다, 다른 한족 독립운동 군벌세력들과의 전투에 더 많은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중국은 많은 농토가 버려진 채로 황무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황무지를 다시 개간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때문에 명태조 주원장은 군인들의 약탈도 막고 황무지도 개간할 목적으로, 군인들에게 농사를 시켜서 군량을 자급자족하게 하는 정책(둔전제)를 실시하는데, 이 둔전제도는 얼마가지 않아서, 명나라 수비군의 기본방침으로 확립됩니다. 

  

명나라에서는 한족 평민이 직업에 따라서 군호(세습 군인),민호(농민),장호(상공업자),조호(제염업 노동자) 이 네가지 카스트로 구분되었습니다. 초기 명나라군은 군호 카스트에서 병력을 징집한 바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때때로 상황에 맞추어 융통성있게 비상사태에는 민병대를 동원하거나, 용병을 고용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초기 명나라 군의 절대다수는 징집된 군호를 바탕으로 한 위소군이 근간이 되었습니다. 

 

내용과 관계있는 쓸데없이 딴소리를 하나 하자면... 예전에 저희 누나가 다니던 중학교는 특이한 전통이 있었습니다. 학교 현관에 큰 어항이 있었는데, 거기에 잉어를 많이 넣어 키우면서도 사료를 아예 주지 않았습니다. 잉어들은 어항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몸 색깔이 변하다가,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선 잉어가 굶어죽으면 사료를 넣는게 아니라, 잉어만 꾸준히 넣어줄 뿐이었습니다. 가끔 학교에서 손님들이 오시는 특수한 날이 많았는데, 이러한 날에는 학교에서 간만에 사료도 한번 왕창 넣어주고, 잉어도 평상시보다 더 많이 넣어주고... 


제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는, 과거 명나라의 변방을 수비하던 위소군의 세습군인들의 상황이, 이 어항속에 잉어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명나라에는 사막이나 밀림 또는 설원 한가운데에 여러 요새들을 설치해놓고 병사들을 주둔시키면서, 동시에 요새 주변에서 병사들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그러니까 사막과 설원과 정글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으로 군량을 마련하게 했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짓는 농사는, 병사들의 경험부족까지 더해져서 형편없는 소출만을 줄 뿐이었습니다. 때때로 수비 요새의 장수들이 개인 돈을 긁어모아서 곡물을 사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장수들이 그나마 모자른 군량조차 횡령하는 일이 좀 더 많았습니다. 적지않은 군인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굶어죽었고, 차마 굶어죽기 싫었던 병사들은 차라리 탈영을 택하였습니다. 이렇게 군량부족으로 많은 병사들이 손실되었지만, 조정에서는 식량공급은 안하고 계속 군인들만 징병해서 넣어주는 방식으로만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명나라 세습군인들은 이외에도 고된 요역에 지나치게 자주 동원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은 커녕 멸시와 차별을 많이 받았습니다. '새옹지마'같은 한자성어 그리고 "좋은 쇠로는 못을 만들지 않고, 유능한 남자는 군대에 가지 않는다."같은 중국 속담에서 볼 수 있듯이, 한족들은 병역복무를 불행이나 불명예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위소군에 소속된 군인들과 그 가문들은 기회가 닫는데로 병적에서 이름을 빼돌렸습니다. 이미 굶어죽거나 전사한 병사, 탈영한 병사들의 손실분이 메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군인 카스트를 부여받은 계급원들의 수가 늘어나기는 커녕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점차 용병을 고용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명나라 후기에 새로 확립되고 확대된 이 용병제도는, 아래에서 설명하는 바대로 명나라 내의 회족들에게 짭짤한 수입원으로 기능하게됩니다.

 

2. 16세기부터 본격화된 회족들의 용병입대 배경 및 복무환경

 

명나라 후반기는 내외의 군사적 위협이 증가하고 이로인해 보다 대규모의 병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필요성과는 반대로 위소군에 등록된 군인들과 가문들이 지속적으로 감소하자, 명나라는 용병들을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용병들에게 위소군과 다름없는 봉급만이 주어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초창기의 용병들은 주로 마땅한 밥벌이감이 없어서 지원한 범죄자나 거지들 중에서 충원되었으며, 이들은 전투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지독히도 명령을 안듣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결국 군인들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기존의 위소군 세습군인 가문이 아닌, 새로 입대한 용병들에 한해서 위소군에 다섯배에 해당하는 봉급을 주었고, 이에 자극받은 많은 평민들이 용병으로 자원하였습니다. 특히 회족들은 한족들에 비해서, 보다 모험성이 강하고 상무적인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했으며, 농업보다는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적지않은 회족들이 이때부터 명나라의 용병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용병이란 직업은 분명 회족들에게 좋은 직업이긴 했지만, 한족 군대 내에서 복무하는 일은 두가지 이유로 회족들에게 껄끄러운 면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회족들은 우상숭배 및 그와 관련된 일을 끔찍히도 싫어하였지만, 명나라 당국은 이러한 바에 대해서 거의 배려해주지 않았습니다.<주1> 명나라 시대에는 우상숭배가 군대내의 일상 풍습으로 굳어져 중국군은 대포를 신성시하여 사람처럼 여기고, 술과 고기를 공양으로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명나라 군은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킬 목적으로 주둔지마다 유명한 중국 장수들의 조각상을 세우고 조각상을 숭배하는 행사를 여러차례 행하였습니다. <주2> 회족 용병들은 따로 회족들만으로 구성된 부대에 편재되지 않고 한족 군인들 사이에서 복무했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우상숭배를 비롯해서 여러모로 불쾌한 종교적 곤욕에 시달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두번째 이유로는, 당시의 명나라는 군사행정이 매우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에, 명나라 군은 이길때보다는 패배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한 군사행정상의 비효율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군인들의 머릿수로 밀어부치는 방법이 애용되습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명나라 후반기의 중국군 전사자는 여러차례 기록적인 수치를 갱신하였습니다. 많은 회족들이 명나라의 용병으로서 참전하였지만, 이들이 따로 혁혁한 전공을 세울만한 기회는 적었고, 많은 회족 용병들 역시 생환하지 못했습니다.

 

회족들 이외에도 무슬림들은 여러 방면에서 명군을 위해서 복무했습니다. 17세기 만주족의 침입이 본격화되자 명나라는 포르투칼로부터 대포 및 포병을 구입하여, 이를 실전에 적극 활용하였습니다. 포르투칼로부터 수입된 대포들을 다루는 포병들은 대부분 스와힐리 무슬림 출신 노예들이었으며, 이들은 포르투칼 상인들한테 노예로 잡혀온 동아프리카의 아랍인 혼혈 흑인들이었습니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 새로 남명(南明) 정권이 들어서서 청나라에 대항할 때도, 포르투칼은 수백여명의 군인들을 파견하여 남명 정권을 원조해주었습니다. 포르투칼 스와힐리 흑인노예 병사들은 이 와중에도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이들은 비록 전멸당했지만 남명 최강의 정예전사들로 평가를 받는 명예를 누립니다.

 

3. 명나라에 대항한 무장세력으로도 활약한 회족 전사들

 

명나라는 16세기 초반 왜구의 창궐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왜구들은 일본인에 의해 지휘받고 일본식으로 무장하며 일본식 전술을 구사하였지만, 이 당시에 중국에서 활약한 왜구들 가운데 일본인들은 소수였고 절대다수가 중국 출신이었습니다. 이 당시의 왜구들은 약탈과 밀무역을 병행하며, 혼슈와 큐슈의 상인가문들로부터 많은 지원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왜구로서의 해적생활은 높은 수입을 보장해주었으며 많은 중국인들이 매력을 느끼고 왜구에 가담합니다. 하지만 이에 매력을 느낀 것은 한족들 뿐만 아니라 남방의 여러 소수민족 그리고 중국계 무슬림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철저히 실시하면서 하천을 통한 선박운송까지 제한하고, 바다에서 고기잡이하는 행동까지 범법행위로 지정하자, 명나라의 해안도시에 거주하던 회족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이런저런 연유로 몇몇 회족들 역시 왜구에 가담하여 명나라와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도 잠시... 16세기 후반부터 일본의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자, 일본의 상인들은 왜구 관련 사업들을 접기 시작했습니다. 왜구를 지휘하고 지원하던 수뇌부들이 사라지자 왜구들은 얼마안가 명나라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해안지대의 무슬림들이 왜구에 합류하여 명나라군과 전투를 치루었다면, 내륙의 무슬림들은 섬서성 농민반란에 대규모로 합류했습니다. 원나라 때 몽골인들은 중국 서쪽의 많은 무슬림들을 강제 징집하여 중국 서북지방 변경에 눌러살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로 인해 명나라 시절에는 많은 무슬림들이 중국 서북방 지역인 감숙성과 섬서성을 중심으로 모여살았습니다. 이 감숙성과 섬서성은 척박한 지역이었지만, 북쪽 변방지대로서 말이 많이 생산되었고 이 지방 사람들은 승마술이 뛰어났습니다. 특히 이 지역의 무슬림들은 본래 출신이 중앙아시아 기마민족인 경우가 많았으며, 이들은 명나라군과 농민반란군 양쪽 모두에 우수한 기병들을 공급해주었습니다.

 

이들 감숙,섬서출신 용병기병들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참전하여, 여러차례 일본군에게 패배했습니다. 또한 명나라는 만주족 정벌작전에서 기병을 중심으로 한 15만대군을 동원하였으며, 이들 중 반수 이상은 한족(그리고 소수의 회족) 용병들이었습니다. 15만기의 정벌군들은 합동포위공격이 차질을 빚어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막대한 사상자를 남기고 퇴각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례들은, 서북방 지역의 무슬림 기병들이 명나라 말기에 비교적 신뢰할만한 전력을 제공해줬다는 점을 시사해줍니다.

 

회족들은 명나라 군으로 복무할 때보다는, 섬서성의 농민반란군으로 복무했을 때 훨씬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17세기에 발생한 섬서성과 하남성에서의 대규모 농민반란은 명나라를 멸망시킨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이 농민반란에는 농민뿐만 아니라 많은 탈영병들과 무슬림들이 합류하였습니다. 무슬림들은 기마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투력도 가공할만한 수준이었으며, 기동성이 매우 뒤어나 유격전 및 퇴각 기습 등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보다 우세한 병력을 만나면 접전을 회피하고, 보급부대를 습격하여 명나라군을 굶게만드는 방식으로 전투를 수행하여, 섬서성 농민반란군들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우수한 무슬림 기마병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명나라는 만주족으로부터 요동지방을 지키던 병사들을 활용하였습니다. 이들은 기마술이 매우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병들을 제압하는 전술에도 익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동지방의 방언은 섬서방언과 서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바람에 요동출신의 탈영병이 농민반란군에 합류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요동출신 병사들은 섬서지방 농민반란 진압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언발에 오줌누기 비슷한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요동지방의 방어가 뚫린 틈을 타서 만주족들이 때맞춰 쳐들어왔습니다. 명나라는 이 농민반란군들을 거의 다 진압해놓고도 마무리를 제대로 짓지 못한 상황이었는데(왜냐면 기병들은 빨리 잘 도망가니까...), 이 상태에서 만주족이 들어닥친 것입니다. 명나라는 서쪽에서는 농민반란군을, 동쪽에서는 만주족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을 맞딱드렸습니다.

 

결국 동쪽과 서쪽 양쪽에서 전쟁을 벌이게 된 명나라는 것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국운이 쇠하기 시작합니다. 아까 말한 바 있는 무슬림 반군기병들의 "우세한 병력을 만나면 도망가고, 보급병력을 주로 공격하여 식량 보급을 끊는 전술"은 섬서성 농민반란군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많은 기병들이 명군의 진압작전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도주하였고, 이들은 이자성의 리더십 아래 다시 결집했습니다.

 

이자성은 무슬림들과 다수의 기병을 주축으로 한 6만명의 군인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중 대부분이 훌륭한 기수로서 이자성의 반군들은 이동할 때는 거의 전원이 말을 타고 행군했습니다.이들은 전면전을 피하고 보급부대만 공격하는 방식으로 명나라 군에 대항했습니다. 이자성을 인해전술로 진압하려 했던 명군은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이자성과 맞서 싸웠지만, 이자성의 기병들이 식량보급을 전부 끊어버리자 40만대군은 집단탈영하며 뿔뿔이 흩어졌고, 이 때에 명나라가 입은 손실은 결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남성과 사천성 일대에서 40만대군을 무찌른 이후, 이자성과 섬서지방 반군들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북경을 함락시켰고, 이와 마찬가지로 반대쪽에서 싸우던 만주족들도 이자성의 이러한 승리 이후로 명나라의 영토들을 빠른 속도로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자성의 활약 뿐만 아니라, 수십여년 가까이 이어진 섬서지방의 농민 반군들의 활약은 명나라의 몰락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청나라의 등장의 간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섬서지방 농민군들의 동맹으로 활약한 무슬림들은 결국 중국사의 변혁에 적지 않게 일조한 셈입니다.

 

4. 이슬람적인 시각에서 본 명나라 회족 군인들의 활약상

 

명나라 관군에 용병으로 소속되어 싸운 회족 군인들은, 이교도로부터 이슬람을 방어하기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닌,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①우상숭배자의 군대 내에서 ②우상숭배자들과 같이 ③우상숭배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웠습니다.

 

중국 이외에도 많은 무슬림들이 서아프리카지역, 인도에서 다신교도들 밑에서 용병으로 활약한 바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이들은 포교에 유리한 환경에서 복무하여 실제로 이 지역의 이슬람 전파에 적지 않게 기여하고, 또 다신교도들과 분리된 부대에서 복무하여 종교적으로 보다 정결한 환경 내에서 복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족 용병들은 한족들과 섞여서 복무하였고 이들은 하급 병졸로서 군대 내에서의 입지도 약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한족들의 정책에 끌려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명나라 관군에 입대한 회족 용병들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평가는 왜구 편에 가담한 회족 전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서북방 변경에서 반란을 획책한 무슬림들에게는 이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합니다. 이들 중 일부는 서북방 변경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명나라의 이슬람 탄압에 저항하고, 명나라를 공격했던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을 원조하기 위해서도 전투를 벌인 바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섬서성 농민반란으로 인해서 보다 구체화되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관군들은 부족한 봉급을 보충하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지나가는 지역의 주민들을 약탈하는 관행에 익숙해 있었습니다.<주3> 대부분의 한족 농민반란군들은 이보다도 더욱 잔인하여 지나가는 지역에 민간인들에 대한 납치,살인,약탈,방화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자성 밑에서 복무한 무슬림 기병들은 민간인들에게는 온후하고, 적병들과는 용감하게 싸우는 자세를 보여주어, 이자성 반란군 세력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군복무는 그 어떤 종류이든간에 이슬람 원리 자체 내에서는 별로 긍정적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특히 이슬람에선 지하드의 원리(즉 이슬람에 대한 탄압에 맞서기 위한 전쟁만 정당화됩니다.)를 어기는 모든 종류의 전쟁 및 전사들을 그 어떠한 경우에서건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회족 전사들의 명나라 시기에 활약한 바는 무슬림들 입장에서 별로 자랑스러운 바가 아니었으며, 때문에 이들의 소소한 활약은 결국 역사 속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 중에 하나로서 뭍혀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Written by Muhammad Ahmed

 

<주1> 우상숭배는 이슬람 내에서 가장 심각한 범죄 중 하나로 간주하는 사항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행사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반강제로 참여한 개개인에게 엄청난 공포와 혐오감을 주는 일입니다. 따라서 많은 무슬림 병사들이 반강제적으로 강요된 우상숭배로 인한 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고통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주2> 임진왜란 당시. 한 번은 명나라 진지 내에 설치되어 있는 관우의 조각상에서 빨간 땀(명나라군의 주장에 의하면...)이 흘렀다는 소문이 퍼졌고, 명나라 군인들은 이를 불길한 징조로 해석하여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빨간 땀 사건에 관한 소문이 퍼진지 얼마 안가서 명나라 군 내에서 대포 조작의 실수로 오폭사고가 발생하였고, 이 오폭을 일본군의 기습으로 착각한 명나라 군인들은 겁에 질려서 무질서하게 도주하였습니다. 이 와중에 도망가던 명나라군 수천명이 강물에 빠져죽었답니다. 이 사례는 명나라 군영 내의 우상숭배의 맹목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에 불과합니다.

 

<주3> 명나라는 배어온 적에 수급에 따라 병사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적병의 목은 만주족과 몽골족의 목은 1급, 티베트인은 2급, 남방의 소수민족은 3급, 한족 반란군은 4급으로 죽인 적에 따라 급을 다르게 매겨 포상하였습니다. 기강이 해이했던 명나라 군 사이에서 이 관행은 얼마 안가서 크게 오용되었습니다. 명나라 군인들은 전쟁포로나 민간인들을 참수한 뒤 이를 적군의 수급이라고 주장하면 이른바 '부가 소득 창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채득하였으며, 이는 단순히 아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한족 민간인들에게 커다란 재앙으로 이어지니, 결국가서는 한족 마을들이 명나라 관군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따로 용병을 구입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