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

지식창고지기 2010. 6. 16. 19:56

중국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



 

사마천(司馬遷)의 자는 자장(子長)으로서 기원전 145년 경 사관(士官)인 태사령(太史令)을 역임했던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천이 7살 나던 해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 역법과 도서를 관장하는 태사령(太史令)이 되였고 이후 무릉(武陵)에 거주하며 고문을 독서하던 중,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 산동(山東), 하남(河南) 등 지방을 여행하였다.

 

기원전 111년에는 파촉(巴蜀)에 파견되었고 110년에는 무제의 태산 봉선(封禪) 의식에 수행하여 장성 일대와 하북, 요서 지방을 여행하였다. 이 여행에서 사마담은 크게 견문을 넓혔고 "사기"를 저술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원전 110년 사마 담이 죽으면서 자신이 시작한 "사기"의 완성을 아들 사마천에게 부탁하였다. 그 유지를 받들어 사마천은 기원전 108년 태사령이 되면서 황실 도서에서 자료 수집을 시작하였다. 아버지 사마담은 역사서와 문서를 정리하는 직책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마천은 자연스럽게 역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04년(무제 태초 원년) 사마천은 천문 역법의 전문가로서 태초력(太初曆)의 제정에 참여한 직후 사기セ 저술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사마천 일생의 전환은 그가 한 실패한 군인을 위해 변화한데서 비롯되었다. 기원전 99년 대장 이릉(ì°Òø)은 군대를 거느리고 서북부의 흉노민족을 들이쳤다. 전쟁초기 이릉의 군대는 연속 승리하였다. 그 소식이 궁전에까지 전해져 관원들은 황제가 이릉을 등용한 것이 현명한 책략이라고 하면서 황제에게 축하를 표시했다. 그런데 뒤이어 발생한 일은 황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겼다. 이릉은 전쟁에서 시급히 이기려고 군사를 이끌고 사막지역에 깊이 쳐들어간 후 흉노에게 포위되었다. 며칠간의 혈전 끝에 이릉은 하는 수 없이 투항하였다. 소식에 접한 한나라 황제는 노발대발하여 이릉의 가족들을 즉시 체포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궁전 관원들도 붙는 불에 키질하면서 이릉을 비방 중상하였다. 그런데 유독 정직한 사마천만이 이릉과 그 가족들을 위해 변명하였다. 그는 이릉의 공훈과 실패를 공평하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마천의 변호는 한나라 황제를 노엽혔다. 사마천은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기원전 99년 남자로서 가장 치욕스러운 궁형(宮刑)을 받았다. 당시의 관행에 따라 사형도 돈으로 사면 받을 수 있었지만 사마천은 집안이 넉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돈으로 목숨을 구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사형 대신 거세형을 택했던 것이다.

 

"보임안서(報任安書)"라는 글에서 사마천은 당시 "사기"의 완성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 없었던 심정을 술회하였다. 옥중에서도 사마천은 저술을 계속하여 기원전 95년 황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의 최고 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었으며 기원전 90년에는 마침내 "사기"를 완성하였다.

 

왕조의 폭정, 왕조의 교체, 시대의 변화, 통치 구조의 형성과 발전, 경제 생활의 양상, 이 모든 것들이 예로부터 지금까지 역사 서술의 주 대상이 되어 왔다. "본기(本紀)", "태", "서(書)", "열전(列傳)"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사기"는 1백30편, 모두 52만6천여자라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전설시대인 황제 때부터 한의 무제까지 약 3천여 년의 역사를 기록했다. "본기"는 제왕의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표는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시간적 통일성, 연계성을 주로 한 연표(年表)이고 "서"는 특정한 사회 현상을 개별적으로 기술한 것이며 "세가"는 정치 질서에 있어 제왕의 다음 가는 위치에 있는 제후(諸侯)의 행적을, 그리고 "열전"은 제왕과 제후를 둘러싸고 역사에 남긴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고대사를 명쾌하게 정리해주는 탁월한 역사서일 뿐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언제나 신선한 충격을 느끼게 하는 고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볼 때, 사실 사마천의 일생 전체가 "사기"의 저작을 위해 바쳐진 생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땀과 눈물과 한이 얼룩져 있는 생애의 농축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다음의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탄생 후 저작 착수 전까지의 역사가적 자질과 지식을 갖추기 위한 예비 단계이다.

두 번째 단계는 38살에 태사령이 되어 사기저술의 준비 작업을 하고 이어 실제로 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이다.

세 번째 단계는 48살에 이릉(李陵) 사건에 연루되어 궁형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이다.

네 번째 단계는 50살 경 출옥한 후 환관의 최고 직인 중서령(中書令)이 되어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살까지의 시기이다.

 

사마천의 글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이 곧 열전이다. 왜냐하면 시대정신 또는 그 시대의 인간상의 상징적 인물을 부각시켜 독자로 하여금 시대와 인간을 탐구하게 하는 것이 곧 이 열전이기 때문이다. 열전 속에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과의 싸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괴로움과 기쁨을 찾을 수 있고 거기에서 공감 또는 위화감을 느껴 가면서 역사의 세계와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게 된다.

 

70권에 달하는 열전에는 위로는 재상, 장군, 아래로는 시정(市井)의 협객(俠客), 상인에 이르기까지 200명에 달하는 상징적 인간이 제 나름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 하면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사기" 130권 중 반 이상을 차지하는 열전의 맨 앞에는 백이 열전(伯夷列傳)이 놓여 있다. 폭력으로 폭력을 대처하려는 주 무왕(周武王)을 말리다가 뜻이 이루어 지지 않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불의(不義)의 땅에 안주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연명하다가 죽는다는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하고자 하는 것이 백이 열전의 의도는 아니다. 의(義)가 현실에서 제대로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인간 세계의 오랜 숙제를 놓고 백이 형제의 연약한 운명에 대하여 무언가 지불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백이와 같은 인간을 기록에 남김으로써 현실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의 가치를 그에게 부여하려 했다는 것이 열전의 존재 이유이다. 백이 열전이 사마천의 열전 전체의 총론이라고 지목된 까닭도 그것이 열전 전체를 관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들에게 "사기"는 단순히 역사서로서뿐 아니라 문학으로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사기"는 일반적인 문학과 다르고 허구를 가미한 역사 소설하고도 물론 다르다. 열전은 실재했던 상징적 인간형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서술되었다는 데서 문학이며 예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