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공산주의 치하에서 중국의 이슬람

지식창고지기 2010. 6. 23. 17:42

공산주의 치하에서 중국의 이슬람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자, 무슬림에 대하여 매우 신중한 정책을 취했다. 이슬람은 서구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독교와는 달리, 의심할만한 종교가 아니었다. 동시에, 중국의 불교나 도교처럼 공식적으로 "사망한" 종교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박물관 전시실에 과거와 현재에도 보관된 민중봉기에 공헌을 한 일로 치하를 받았다. 이슬람은 중국의 심장에서 살아있는 '외국의' 종교였다.

무엇보다도, 공산당 정부는 중동, 남아시아, 아프리카의 이슬람 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기를 바라고 있었다. 공산당은 권력 초기부터 무슬림 소수민족을 신중하게 대우했다.  1950년 6월 30일에 공포된 중화 인민공화국의 농지개혁법에서도 특별히 이슬람  사원의 토지에 대한 무슬림의 권리를 보호하고 있으며, "아훙"(Ahungs, 종교지도자)이 다른 생계수단이 없다면 일할 수 있는 토지를  지급받아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무슬림 지역에 배정받은 공산군 부대는 이슬람 사원을 존중하며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하고, 무슬림 여성들에게 존경을 표하도록 특별 지시를 받았다.  뻬이징과 첸진에 "할랄"(halal)이라는 음식을 제공하는 특별 병원이 세워졌다.  1953년 5월에는 중국 이슬람 연합이 형성되었고,  뻬이징에 중국 이슬람 신학교가 건축되었다.


아랍어를 못하고 고전 중국어도 잘 하지 못하는 후이족들 대다수가  이용할 수 있도록 처음으로 코란의 번역이 자기 종족의 언어로 준비되었다.  무하메드 마 치엔에 의해 이루어진 버역은 이슬람과 막시즘 사이의 조화에 중심을 두었다. '후이족 인민 문화 증진을 위한 중국 연합'이 또한 이 무렵 초에 세워졌다. 1952년에는 "하즈"(Haj, 메카로의 순례여행)를 시작할 수 있도록 무슬림 파견단이 허락을 받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에 의해 "헤자즈"(Hedjaz) 출입을 금지당했다.

중국의 주요한 두 개의 무슬림 민족은 자신들의 민족 지역인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자치 정부를 허가받았다.  문화적 다양성이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장려되었지만,  중국의 자치지역의 상황은 구 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의 것과 비슷하며  인민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후이족과 중앙정부의 관계가 항상 원만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1950년대 초에 토지개혁 기간과 1958년의 반우파 투쟁 기간에는 한 동안 불화가 있었다. 많은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이 비판을 받았고, 후이족 인민 문화 증진을 위한 중국 연합은 폐쇄당했다. 심지어는 무슬림들의 무장봉기까지 있었지만,  이것은 소규모 지방사건에 불과했고 청나라와 공화국 당시 북서부를 휩쓸었던 대반란에 견줄 바는 아니었다. 한족과 후이족 간 마찰의 한 가지 계속된 원인은 중국 중부에서 북서쪽으로  비 무슬림들이 대량 이주한 것이었다.


무슬림의 종교적 자유에 대한 공산당의 정책은 개인의 예배의 권리를 인용하는 정도였지만, 전도에 대해서는 눈쌀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산당이 중요하게 고려했던 것은  뻬이징에 대한 무슬림들의 충성에 의심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다음과 같았다. "새 중국에 있는 모든 종교 인민들처럼, 무슬림도 자신의 자유로운 조국을 열렬히 사랑해야 한다.  그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때만, 그들은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차별없이 자신의 종교를 실천할 수 있다."

문화혁명기 동안 이슬람의 지위는 불확실했다. 이 기간 동안 중국에서 온 정보는 무슬림들이 코르반(Corban)과 바이람(Bairam)을  기념하고 있는다는 간단한 보고로 제한되었다.  중국의 무슬림들은 이 기간 동안 홍위병의 광란으로 고통을 겪었음이 확실하며,  '이슬람 제거를 위한 혁명투쟁소조"라는 이름을 가진 조직이 형성되기도 했다.  아랍학문의 연구는 반 중국적인 것으로 매도당했으며, 심지어 할례도 비난받았다.  중앙정부가 이러한 극단적인 운동을 시작한 것 같지는 않으며,
그들은 오히려 홍위병을 진압하여 이를 중단시킨 것 같다. 무슬림들은 다른 어떤 종교집단보다 훌륭하게 문화혁명에서 살아남꾀으며 이 모든 기간에도 일부 이슬람 사원은 계속 문을 열었다.  문화혁명 이후로는 정보가 거의 없지만,  중국의 무슬림들의 지위가 다시 개선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 옳겠다.

중국의 이슬람이 다시 제 기능을 하게 된 제한적 환경 속에서도, 뎅샤오핑(등소평)은 20년간의 그 어느 때보다도 이슬람에 대하여 더 관용을 베풀었다. 종교 일반과 관계된 조직과 특히 이슬람이 다시 부흥되었다.  1980년 4월에 중국 이슬람 연합은 17년만에 처음으로 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마오의 후기 지도부의 보다 자유로운 정책은 여러 파벌로부터  많은 분노를 일으켰다. 여러 지역에서 종교와 연합한 "봉건적이고  미신적인 관행"의 재출현이라며 분명한 어조의 혐오감을 표출했으며,  정부가 린빠오(임표)와 4인방의 종교 억압을 축출하려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린바오와 4인방이 정당했다고 믿는 중국인들이 확실히 많은 것 같았다.

이처럼,  통치권력의 변화가 보다 많은 종교의 자유를 결과짓게 한 것 같지는 않다. 이상한 것은 새 정부는 더 관용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덜 관용적이 된다는 점이다.  이슬람의 관용과는 멀어진 급격한 변화는 중동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중국의 필요에 따라 완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슬림의 반란은 1962년 신장에서 일어났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 소련의 이익에 이용될 수도 있었다.  대약진과 문화혁명기 동안 중국의 행동이 보여주었듯이,  일정한 상황 하에서 실용주의 정책은 보다 이데올로기적인  순수 정책을 위해서는 포기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