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윈난성 다리(大理)에서 쿤밍으로

지식창고지기 2010. 6. 25. 11:38

윈난성 다리(大理)에서 쿤밍으로

 

 

윈난성 다리(大理)에서 쿤밍으로 가는 길목에 추슝(楚雄)이라는 이족(彛族)들의 도시가 있다. 추슝을 향해 달리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마유춘(馬游村)으로 들어간다. 노란 유채꽃이 환하게 피어있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고운 마잉화(馬纓花)가 수놓아진 옷을 입고 있는 이족 여성들을 만날 수 있다. 이족 여성들의 옷은 화려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앵둣빛 꽃무늬가 수놓아진 찬란한 옷들은 그들의 심성 역시 그렇게 경쾌하고 밝을 것임을 추측케 한다. 길거리에서 만난 이족 할머니는 말이 통하지 않음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곰방대를 물고 포즈를 잡아주신다. 주름진 얼굴 가득 퍼지는 그 미소는 이족의 창세 여신 아헤시니모를 닮았다. 

 

금빛 바다에서 태어난 거인 여신 아헤시니모는 가무잡잡한 피부에 맑은 눈을 가졌다. 금빛 바닷물을 마시고 하늘과 땅을 낳았으며 별과 달, 구름과 비를 낳았다. 소와 말 등의 동물, 풀이나 메밀 같은 식물까지 낳은 아헤시니모는 14개의 눈과 귀, 그리고 24개의 젖을 가진 천지만물의 어머니이며 그 젖으로 자신이 낳은 천지만물을 키운다. 여기서 아헤시니모의 가슴에 달린 24개의 젖에 관심이 간다. 터키 에베소에 사도 바울이 들어온 뒤 뒷방신세가 된 아데미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지역에서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받들어졌던 아데미(그리스신화아르테미스와 같은 이름이다)의 가슴에도 24개의 젖이 달려 있었다. 그녀를 위한 에베소의 신전은 파르테논 신전의 네 배나 되는 크기였다. 에베소와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아데미 여신상에는 소와 호랑이 같은 동물들도 새겨져 있다. 이것은 천지만물뿐 아니라 동물들까지도 만든 창조의 신이라는 아데미의 위대한 신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신의 가슴에 달린 24개의 젖은 '음탕함'이 아니라 '풍요로운 생명력'을 뜻한다. 바울이 들어오기 이전, 에베소의 최고신은 아데미였다. 그렇다면 기독교 문명의 도래와 함께 사라진 터키의 여신 아데미와 이족의 여신 아헤시니모 사이에 혹시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왜 그녀들의 가슴에는 똑같이 24개의 젖이 달려있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물론 지금 당장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윈난에 사는 이족이 쓰촨성 청두(成都) 방향에서 왔을 것이라는 주장과 더불어 '이(yi)'라는 발음이 '이스라엘'의 '이'라는 견해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두 여신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은 충분히 가져볼 만한 것이다.

아헤시니모/ 하늘과 땅의 어머니/
만물의 어머니/ 인류의 조상이라네
인류의 역사/ 아헤시니모 가장 길고/
인류의 나이/ 아헤시니모 가장 많다네
아헤시니모 이야기/ 엄숙하게 말해야지/
들을 때도 진지하게/ 절대 함부로 하면 안된다네


이렇게 시작된 이족의 서사시 '아헤시니모'는 여신의 세상 창조와 인간 창조를 노래한다. 이족의 신화에는 많은 창세이야기가 있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이 '메이거(梅葛·'오래된 이야기'라는 뜻)'와 '차무(査姆·'만물의 기원'이라는 뜻)'인데 야오안(姚安)현의 마유춘은 바로 메이거 구연자들이 사는 마을이다. 마유춘 들어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이제 막 산을 뚫고 길을 내서 붉은 흙이 드러나 있는 산을 두 개나 넘어가야 마을이 나타난다. 마유춘에는 메이거를 노래하는 분들의 모임이 있고 그 예인(藝人)들은 마유춘 당위원회 건물에 자신들의 작은 공간을 갖고 있다.

세상의 시작과 인간의 기원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는 길고긴 이야기 메이거는 입에서 입으로 오랜 세월 동안 전승되어 왔다. 외부인들이 "메이거가 뭐야? 마유춘에서 나오는 매실 같은 과일이야? 무슨 맛이야?"라고 물어도 마유춘 사람들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청랑한 목소리로 자신들의 '뿌리'이자 '족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노래를 들려준다.

아득한 옛날 하늘도 없었고/ 아득한 옛날 땅도 없었네/ 하늘을 만들어야 해/ 땅을 만들어야 해/ 무엇으로 하늘을 만들지?/ 무엇으로 땅을 만들지?

거쯔(格滋)천신이 아홉 개의 금 과일을 내놓으니 그것이 아홉 명의 아들로 변했고, 은 과일 일곱 개를 내놓으니 딸로 변했다. 아홉 아들 중 다섯 아들이, 일곱 딸 중 네 딸이 각각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아들들은 고운 구름으로 옷을 해 입었고 딸들은 푸른 이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이슬과 흙을 먹으며 그들은 하늘과 땅을 만들었다. 거미줄을 하늘의 바닥으로, 고사리뿌리를 땅의 바닥으로 삼아 우산 모양의 하늘과 다리 모양의 땅을 만들었다. 딸들은 쉬지 않고 열심히 땅을 만들었지만 아들들은 놀면서 만드느라 하늘을 다 만들지 못해 땅이 하늘보다 넓어졌다. 거쯔천신의 명을 받은 아푸가 세 명의 아들에게 하늘을 잡아당기라고 해서 겨우 하늘을 늘렸고, 세 쌍의 도마뱀이 땅을 둘러싸고 힘껏 조여 땅에 주름을 잡았다. 개미는 울퉁불퉁해진 땅의 가장자리를 깨물어 가지런하게 정리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아직 완전하지 못해 그만 구멍이 뚫려버렸다. 다섯 아들은 솔잎 바늘에 거미줄 실을 꿰어 예쁜 구름으로 하늘을 기웠고 네 딸은 병풀 바늘에 넝쿨 실을 꿰어 나뭇잎으로 땅을 기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땅에 거쯔천신은 만물을 채워 넣는다.

산에 호랑이가 살지/ 세상의 모든 것들 중에서 호랑이가 가장 용맹스러워/ 호랑이를 잡아와라/ 호랑이 등뼈로 하늘을 받치고/ 호랑이 다리뼈로 사방을 받쳐야지

이족은 예전에 '뤄뤄(羅羅)'라고 불렸다. '뤄'는 '호랑이'라는 뜻으로, 지금도 윈난에서는 사람들이 호랑이 복장을 하고 춤을 추는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용감무쌍한 호랑이는 그들의 수호신이었고, 신화 속에서 호랑이는 반고(盤古)의 온몸이 세상 만물로 변했듯이 해와 달을 비롯한 만물로 변한다. 이제 마침내 인간을 만들 시간이 왔다. 거쯔천신은 눈을 한 주먹 움켜쥐고 세상에 뿌려 인간을 만들었다. 첫 번째 뿌린 눈이 변해서 된 인간들에겐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다. 키도 아주 작아서 혼자 길을 걷지 못했고 두 사람이 서로 목을 받쳐줘야 다닐 수 있었다. 진흙과 모래를 먹던 그들은 달빛이 비치면 살았지만 햇빛엔 약해 말라서 죽어버렸다. 두 번째 뿌린 눈은 키가 엄청나게 큰 인간들로 변했다.

그들은 산의 열매를 따먹으며 동굴 속에 살았다. 하늘에 아홉 개의 태양과 달이 나타나자 이들도 말라서 죽었다. 마침내 거쯔천신은 세 번째 눈을 뿌렸고 그것이 직목인(直目人)이 되었다. 천신이 불도 만들어주었고 곡식 씨앗도 내려주었지만 눈이 세로로 달린 이들은 게으름을 피우며 밤낮으로 논에서 잠만 자고 먹기만 했다. 게다가 곡식을 함부로 다루어 먹을 양식으로 둑을 만들기도 했고 메밀가루로 담을 쌓기도 했다.

이렇게 곡식을 함부로 다루다니/ 이놈들의 마음이 착하지 않구나/ 새로운 인간들을 만들어야겠어!

그리하여 천신은 착한 인간 남매만 남겨두고 홍수를 내려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한 후 조롱박 속에 숨은 그들을 찾아내어 둘이 혼인하게 한다. 하지만 남매는 신의 뜻을 거부한다. 산 위에서 맷돌을 굴려보아 그것이 산기슭에서 합쳐지면 혼인하라는 신의 말에 따라 맷돌을 굴렸고 그것이 산 아래에서 합쳐졌지만 남매는 "맷돌은 맷돌일 뿐이에요, 우리는 남매인데 어찌 혼인하겠어요?"라며 끝까지 혼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나, 인간은 태어나야 하는 것을. 결국 강가로 간 오빠는 상류에서 목욕하고 누이는 하류에서 그 물을 마시고 임신, 마침내 오늘날 이족의 시조이자 새로운 인간들인 횡목인(橫木人)이 탄생한다.

물론 메이거에는 이런 창세신화만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유춘 사람들은 청아한 목소리로 남녀의 사랑을 노래하고 슬픈 음성으로 노인들의 죽음을 노래한다. 산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는 노래, 그것은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다.


 

<사진: 마유춘입구에서 만난 이족 사람들>

↑ 메이거 예인이 전시관 앞에서 생이라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족 여성.

↑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 있는 아데미 여신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