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요리의 시대적 발전
중국 역사에 있어 하(夏), 상(商), 주(周)의 세 왕조는 청동기시대에 해당한다. 특히 주 말기에 이르면 철기가 출현하여 생산활동에 급격한 발전이 있게 되고 음식생활에도 큰 변화가 와, 겨우 불 맛을 보인 음식 수준을 벗어나 청동제 솥 따위의 조리기구로 익혀낸 음식을 먹기 시작한 것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의 하나인 시경(詩經)에는 이때의 생활 모습이 담겨 있거니와, 이 책에 먹거리로 등장하는 것이 식물 130여종, 동물 200여종, 물고기류 19종, 가금류 38종이고 그밖에도 소금, 장, 꿀, 생강, 계피, 후추 따위 조미료가 보인다.
3000년전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이 고기를 굽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들은 돌아가며 침을 뱉었다. 침의 아밀라아제 효소를 이용한 조리법이었다고 하겠다. 서양에서 고기를 불 위에 걸어 놓고 침을 뱉어 가며 조리할 적에 중국에서는 커다란 솥에 넣은 고기에 갖은 양념을 뿌려 익혀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음식문화도 역시 지나치면 문제가 생긴다. 상의 마지막 임금인 주(紂)에 이르면 술이 연못을 이루고 고기가 숲을 이룰 정도로 넘쳤다 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까지 생기게 되었다. 전한(前漢) 때의 환관(桓寬)
당시 주왕(紂王)이 상아로 젓가락을 만든 것을 보고 기자가 ꡒ상아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자면 그릇은 옥그릇을 써야 할 것이고, 그릇이 옥이면 아무 음식이나 담아 먹을 수가 없어 진귀한 요리를 만들어 먹을 것이니 이렇게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보면 나라를 망치지 않겠는가?ꡓ
은의 뒤를 이어 주나라가 들어서고는 조리법이 더욱 발전하여 통돼지구이, 개의 간구이 등 여덟 가지 진귀한 요리(八珍料理)가 등장하는데 이때 황제의 음식을 돌보는 관리가 208인이고 일꾼만도 2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춘추시대의 제(齊)나라에는 뛰어난 인물이 특히 많았다. 그 중에 역아(易牙)라는 사람은 조리법에 정통해 맛있는 음식으로 제의 환공(桓公)을 기쁘게 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끓인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주식인 곡물도 쪄서 손으로 집어먹었다. 숟가락은 없고 젓가락은 국의 건더기를 집어먹을 때만 사용하였다.
공자가 길을 가는데 어떤 노파가 보리죽 한 그릇을 바쳤다. 공자가 기꺼이 받아먹고 사례를 하였더니 제자가 말했다. ꡒ끓인 것은 싸구려 음식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정중하게 사례를 합니까? 공자는 ꡒ그 뜻이 훌륭하기 때문이다.ꡓ라고 답하였다. 이것을 보면 당시는 끓인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춘추 전국시대는 7개의 강국이 대립하며 패권을 다투었다. 각국의 지도자들은 천하의 인재를 불러모아 손님으로 모시고 그들의 재주를 활용하였다. 그래서 이때를 다른 말로는 식객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은 식객이 워낙 많아 식객이 삼천(食客三千)을 헤아렸다.
하루는 맹상군이 식객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식객이 주인과 자신의 밥상에 차별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이를 섭섭히 여겨 떠나려했다. 이를 알고 맹상군이 자기 그릇을 들어 보여 오해임을 밝히자 식객은 부끄럽게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목을 찔렀다 한다.
전국시대의 초(楚)나라 왕은 반란군에게 붙잡혔을 때 시간을 벌기 위해 ꡒ이 세상의 추억으로 곰발바닥을 먹고 싶다.ꡓ고 부탁을 했다. 곰발바닥은 4, 5일은 삶아야 하므로 구원군이 오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거절되었고 죽음을 맞았다.
진의 통일과 혼란기를 거쳐 천하의 패권은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의 싸움으로 압축이 되었다. 결국 유방이 경쟁에서 이겨 한나라를 세우게 되지만 이때 항우는 유방을 불러 연회를 열고 그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가졌으나 자만과 어리석음으로 천하를 쥘 기회를 놓치고 만다.
한나라가 대륙을 통일하고 개국 이래의 두통거리인 흉노를 물리치며 서역으로 진출한 것은 서기 전 138년 전의 일이다.
이 때만해도 주식으로는 기장이나 보리를 먹었으며, 만주 쪽에서 들어온 콩은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이후 장건(張騫)이 이른바 실크로드(비단길)를 열며 지금의 이란, 이라크에 중국의 비단, 황금, 칠기 따위를 전하고 그곳의 말, 향료, 유리와 함께 석류, 포도, 마늘, 오이, 호도, 향채(香菜), 녹두, 파,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중국 왕실의 식탁이 더욱 풍성해졌음은 말 할 필요도 없겠다. 중국 음식문화를 살찌게 한 밀도 이 때 전해졌으리라 생각된다.
손권의 형인 손책(孫策)이 사탕수수로 만든 시럽(蔗漿)을 먹으려는데 그 위에 쥐똥이 떨어져 있음을 알았다. 환관이 보관책임자를 파면시킬 것을 상주하자 손책은 책임자를 불러 물었다. ꡒ너는 저 환관에게 원한 살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느냐? ꡓ 그러자 그는 관물을 빌려달라는 것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영리한 손책은 쥐똥이 푹 젖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는 창고에서 가지고 오는 동안에 넣은 것이라며 환관을 처벌했다.
삼국 쟁패의 시대가 끝날 무렵인 진(晋)나라 무제(武帝) 때의 일이다. 하루는 무제가 사위인 양수(羊琇)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통째로 삶은 돼지가 나왔는데 그 맛이 각별해서 비법을 물어 본 즉, 인간의 젖을 먹여 키운 것이라는 대답이었다. 무제도 처음에는 이런 사치풍조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사회 전체의 풍조에 물들어 그 자신도 점점 사치와 향락에 빠져 일찍 죽고 말았다. 그에게는 궁녀가 1만명이나 있었고 석숭(石崇)같은 대신도 첩이 100여명에 어린 종이 800명이었다고 한다.
석숭은 낙양(洛陽) 근처의 금곡(金谷)에 별장과 정원을 꾸며 놓고 매일 친구들과 연회를 벌였는데, 왕의 외척인 왕개(王愷)가 40리 길이의 장막을 치자 경쟁심에서 50리나 되는 비단 장막을 칠 정도로 허황된 심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그가 연회를 가질 때면 아름다운 미인들로 하여금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도록 하였는데 만일에 손님이 술잔을 비우지 않으면 여인의 목을 베어 버렸다고 한다.
죽림 칠현이라고 하는 이들이 세상을 피하여 신선처럼 대밭에서 술 마시고 놀던 것도 그 시대의 일이고, 우리나라에 불교를 처음 전래한 것은 이 무렵 북쪽지방에 있던 전진(前秦)이었다. 광개토대왕이 동북아시아 대륙에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은 그 얼마 후의 일이다.
혼란기가 끝나고 수(隋)가 들어섰으나 통일국가를 세운 지 불과 30여년만에 고구려와 싸우다 지쳐 제풀에 넘어졌다. 수의 양제(煬帝)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를 정도로 포악하고 사치가 심했고, 강남지역에서는 게를 술지게미나 설탕에 절여(糟蟹, 糖蟹) 그에게 올렸다고 한다.
이후 당나라에 이르면 조리기법이 크게 발달하여 눈으로 즐기는 단계까지 이르는데, 예를 들면 팔선반(八仙盤)이니 소증음성부(素蒸音聲部)니 하는 것은 풍경이나 연주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당의 전성기에는
전에는 좁쌀이나 수수를 주식으로 먹었으나 당나라 때부터는 쌀밥 먹고 비단 옷 입는 것을 사치로 여기기 시작했다. 또한 밀가루 음식이 유행하여 밀가루 음식 파는 집(餠屋)이 많았는데 영왕만(寧王曼)이라는 사람은 단골집의 여주인에게 눈독을 들여 첩으로 삼기도 하였고, 어떤 관리는 겨울철 출근길에 밀가루 떡을 사오게 하여 언 손을 녹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당나라가 망하고 송나라가 들어서기까지는 5대 10국이라는 혼란기를 겪게 된다.
송나라 때는 중국의 3대 발명품인 활자 인쇄와 나침반, 그리고 화약이 크게 활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식생활에서도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식용기름이라고 하면 동물성 기름 즉 고지(膏脂)를 뜻하였는데, 여기서 고(膏)는 액체상태의 기름이고 지(脂)는 굳기름이다. 한나라 때부터 식물성 기름을 먹기는 하였으나 주로 등유로 사용하다가 송나라 때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먹게 되었다.
이때에 심괄(沈括)이라는 사람이 쓴 「몽계필담(夢溪筆談)」이라는 책에 보면 ꡒ요즈음 북쪽 지방 사람들은 고추기름을 즐겨 먹는다. 무슨 음식에나 이를 넣고 볶아 먹는다.ꡓ는 구절이 있다.
송나라의 서울인 변경(오늘의 開封)은 인구가 백 삼십만을 넘었다 하며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가 160여개소이고, 오늘날 서울 강남지역의 대형 갈비집 수준으로 큰 음식점이 72개였는데 분점의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하니 변경이 어느 정도로 화려했는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실제로 당시의 변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라는 그림을 보면 강 양편에 즐비한 상점과 음식점, 그리고 숱한 인파며 풍성한 물자로 가득한 모습에 감탄하게 된다.(사진설명 : 당나라 사대부들의 연회 모습 - 8세기 서안부근 무덤 출토 벽화)
당시 휘종(徽宗)의 총애를 받던 채태사(蔡太師)의 집에는 요리사가 15명에 주방일을 보는 하인이 수백 명이었는데 맡은 바 업무가 모두 나누어져 있어 서로가 남의 일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채태사의 집에서 일하던 자가 남쪽 지방의 큰 부잣집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채태사의 주방에서 일했다는 말에 많은 급료를 약속하고 채용하였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주인이 그를 불러 만두를 만들어 보라고 말하였다. 그가 만두를 만들 줄 모른다고 하자 주인이 화가 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 ꡒ너는 채태사 댁 주방에서 일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 만두도 만들 줄 모르다니 감히 나를 속였구나!ꡓ 요리사는 부자의 나무람에 태연히 대답하였다. ꡒ나으리. 제가 채대인 댁 주방에서 일했던 것은 틀림없사오나, 제가 맡은 일은 오로지 파를 써는 일이었으니 다른 일을 못하는 것은 당연합지요.ꡓ
송나라 때에는 음식점업이 발달하면서 특이한 사회 현상이 하나 생겨났다. 일반 백성들이 여자아이를 낳아 예쁘면 노래와 춤을 가르치고 그렇지 못하면 재봉질이나 요리하는 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방일을 보는 여자를 주낭(廚娘)이라고 한다. 이때는 주낭의 보수가 남자 요리사보다 많아서 웬만한 귀족이나 부자가 아니고서는 주낭을 고용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행세 깨나 하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 경우에는 화려한 차림의 주낭이 금방울과 은방울을 단 칼을 맵시 있게 놀리며 조리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식도락을 즐겼다고 한다. 요즈음 철판구이집의 조리사가 재주 부리는 것도 여기서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닐까?
중국의 나라 이름은 대개 나라를 일으킨 임금의 출신지와 관계가 있으나 원(元)은 주역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몽고족이 송을 멸망시키기까지 74년. 송을 멸망시키고 나서 원나라 자체가 망하기까지 불과 90년. 말을 타고 얻은 땅을, 말을 타고 다스린 결과이겠지만, 사막의 먼지처럼 피어올라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린 짧은 역사다.
그러나 문화면에 있어서는 앞서 이야기한 화약 등 3대 발명품이 서양으로 전해진 것이 이때의 일이고,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을 지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사정을 서양에 소개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덕분에 이때 마르코 폴로가 전한 국수 만드는 기술은 이태리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오늘날 파스타 요리로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다.(이 인연 때문인지 지난번 월드컵에서 우리가 이태리를 이기자 중국인들은 마치 자기네가 진 것처럼 분하게 생각했다!)
대륙이 다시 한족의 지배를 받기 위해서는 독특한 경력을 가진 주원장(朱元璋)이라는 인물의 등장이 필요했다. 그는 남경(南京)부근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거지 노릇을 하다가 절에 들어가 땡땡이중으로 유랑을 계속하던 중 농민들이 일으킨 홍건군(紅巾軍)에 가입하여 마침내 그 지도자가 되었다. 홍건군은 머지않아 미륵불이 내려와 태평천하가 이루어진다는 백련교(白蓮敎)를 믿는 무리들로서, 주원장은 세력을 급속히 확대해 1368년에는 북경을 손에 넣고 남경을 서울로 정하게 된다. 지금도 북경의 명 13능을 관람할 때 명 태조 주원장의 묘를 볼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남경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지에서 황제에까지 신분의 수직 상승을 가져온 주원장은 신분의 변화만큼이나 외모도 별나고 성격도 매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심한 곰보였으며, 지주를 타도하자며 세력을 모았지만 일단 권력을 잡고서는 오히려 지주계급의 이익을 보호해주었고 자신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백련교를 탄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일으키는 데 공을 세운 많은 이들을 죽여 없앴다. 또한 황제의 독재 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총리에 해당하는 승상 자리를 없애고 각 부를 직접 관장하였으며 친위세력인 환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그가 얼마나 권위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일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정장(廷杖)이 그 하나로, 정장이란 신하들이 눈에 거슬리면 조정의 뜰에서 즉시 매로 다스린 것을 말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ꡒ광천지하 천생성인(光天之下 天生聖人)ꡓ이라는 글로써 황제를 칭송하였지만 주원장은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원래의 뜻은 밝은 태양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았다는 아부성 찬사이건만, 주원장은 생(生)이 스님을 뜻하는 승(僧)과 발음이 같고 빛날 광(光)은 스님이 머리카락이 없는 것을 상징한다 하여 자신이 땡땡이중 출신임을 빗대어 모독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에 비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같은 외래 침략자인 몽고와도 달랐고 한족의 명나라와도 사뭇 달랐다. 적어도 초기 3대 임금(康熙, 雍正, 乾隆)의 134년 간은 한(漢)과 당(唐)의 전성기 이상으로 태평성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북방 민족과는 달리 전투에 능하면서도 문화적 소화력이 높았으므로 소수 민족으로도 268년이란 긴 세월을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주족의 뿌리는 여진(女眞)족이다.(사진설명 : 청명하상도의 일부 - 12세기 張擇瑞 작)
우리에게는 조선 인조(仁祖)때 남한산성앞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안겨주었지만 고대에는 고구려와 발해의 지배를 받는 소수민족이었고 고려초까지는 우리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다. 그래서 청나라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쳐들어올 때만 해도 우리를 한 핏줄로 생각하였던 것 같다. 병자호란을 앞두고 우리에게 보낸 선전포고를 보면, 어째서 다른 민족인 명은 섬기면서 자기들을 깔보느냐고 따지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그들은 중화 문명을 최대한 수용하고 피지배자인 다수의 한족을 활용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은 한족을 철저히 무시한 몽고와는 달리 과거를 통해 한족을 채용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펴는가 하면, 변발을 강요하고 선비들의 집단 행동을 엄벌하는 고압적인 정책을 병용하였다. 그들은 이런 당근과 채찍의 양면정책을 적절히 구사하여 270년 가까이 대륙의 지배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이들의 국가경영의 지혜는 잔치상에서도 발휘되었다. 그들은 왕실 연회에서 만주식과 한족식 요리를 모두 망라하여 만한전석(滿漢全席)이라는 중화 모듬요리체계를 내놓았던 것이다.
모택동이 장정을 끝내고 연안지역에서 국민당 정부군과 대치하고 있었던 1947년. 모택동은 폐질환으로 기침을 심하게 했고, 대대적인 공세를 맞아 연일 작전지휘로 몸은 극도로 쇠약한 상태였는데, 서북야전군(사령관 彭德懷)이 정부군 36사단을 섬멸했다는 승전보를 듣고 기분이 좋아진 그는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을 부탁한다. 그것은 모택동의 고향인 호남지방의 가정식 백반 수준의 요리로서 돼지삼겹살조림과 고추볶음이었다. 맛있게 먹는 것을 본 경호원이 다음에도 같은 음식을 준비하려 하자 모택동은 이를 만류하면서 최전선의 전사들은 죽음으로 싸우며 변변한 음식도 못 먹는데 지휘부에서 호강을 할 수는 없다고 나무랐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병사들과 고락을 함께 하는 모택동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보면 틀린 말일까.
모름지기 음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제적 여유와 통한다. 중국에서도 비교적 풍요로운 절강과 강소, 사천, 그리고 광동 지역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점했던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이 밀려나면서 부유한 자본가들이 해외로, 홍콩으로, 대만으로 떠남에 따라 그들에게 주로 봉사하던 많은 유명 요리사들도 대륙을 떠났고, 식도락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으로 인해 대륙의 식탁은 점점 무미건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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