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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지식창고지기 2010. 7. 24. 19:03

만리장성

 

 

만리장성의 기원

 

만리장성의 기원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 시대이다. 그때 제()에서 비롯되어 전국시대(戰國時代)에는 연() () () () 등 여러 나라가 장성을 구축하였다.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

 

만리장성의 위치

 

만리장성은 허베이성(河北城) 북부 옌산산맥(燕山山脈)의 높은 산마루를 따라 보하이만(渤灣)에서 중앙 아시아까지 약 64,00Km에 걸쳐 동서로 뻗어있다.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대 특히 그 후반기에 축조된 것으로, 동쪽은 보하이만 연안의 산하이관(山河關)부터 중국 본토 북변을 서쪽으로 향하여 베이징(北京)과 다퉁(大同)의 북방을 경유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황하강(黃河)을 건너며, 산시성(山西省)의 북단을 남서로 뚤고 나와 다시 황허 강을 건너고, 실크로드 전구간의 북측을 북서쪽으로 뻗어 자위관(嘉 關)에 다다른다.

 

만리장성의 건축적 특징

 

베이징의 북서쪽 팔달령(八達嶺) 부근부터 대동(大同)의 남쪽 안문관(雁門關)에 이르는 부분은 2중으로 축성되어 있는데, 2,700㎞가 전부 같은 구조로 되어 있지는 않다. 산하이관부터 황허 강에 이르는 부분은 매우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으며, 성의 외면은 구워서 만든 연한 회색의 기와로 덮여 있다. 내부는 점토를 붙여 딱딱하게 만들었다.

 

팔달령 부근은 높이 약 9m, 너비는 윗부분이 약4.5m, 아랫 부분이 9m가량이며, 총안(銃眼)이 뚫려 있는 톱날 모양의 낮은 성벽이 위쪽에 설치되어 있고 100m 간격으로 돈대(墩臺)가 설치되어 있다. 황허 강서쪽 부분은 전을 사용하지 않고 햇빛에 말린 벽돌을 많이 사용해 매우 조잡하다. 청대에 들어와 보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진 곳도있다.

 

만리장성이 건립된 목적

 

진을 멸망시키는 것은 호()이다.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도 성벽은 낮아질 줄 몰랐네 허나 누가 알았으랴 아버지 말을 거스르고 형까지 죽인 호해가 술사들이 말하던 호()였음을. 만리장성은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냥 싸우면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긴 성을 쌓은 것이다. 처음에는 진시황제가 흉노족을 막기 위해서 시작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증축, 연장되었다.

 

진시황제는 전국을 통일하고 난 다음 전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자극이 없었다. 전쟁 이후에 국민 동원을 위해서는 명분있는 동원이 필요했고, 수도 방어를 위한 장성 건립을 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실제로 중국을 위협할만한 세력도 없었고, 흉노의 공격이 있다 하더라도 산성은 필요 없었다. 왜냐하면 흉노는 기마 민족이었기에 산은 산성 없이도,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중국은 통일 이후에 비전 부재의 혼란을 우려해서 국민 동원의 명분 하에 장성을 만든 것이다.

 

진시황은 왜 만리장성을 쌓았을까?

 

"중국을 통일하고 막강한 전제통치를 하던 진시황에게 장성의 의미는 방어 외에도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서책이란 서책은 모두 불살랐던 '분서갱유'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을 두려워했던 진시황은 사상적 통제 외에도 수많은 전쟁포로와 지식인, 백성을 통제할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고 호전적인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두려워 조선침략을 결정했던 것처럼 진시황 또한 반대세력들과 백성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도구로 만리장성 축조를 활용했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까지 지배해야 안심하고 잠드는 진시황제의 고도의 통치술, 이것이 권력의 본성이다."

 

실제로 만리장성이 이민족의 침입을 막는 최후 방어선이라는 원칙은 통용되지 않는다.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의 수도인 낙양과 평성은 장성 안에 있으며 위진(魏晉) 이후 여러 민족들은 장성 안에 그들의 나라를 세웠다.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 유방 때에는 만리장성을 방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흉노족의 침입으로 평성에서 포위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를 보면 만리장성은 군사적 의미 외에도 정치적 통치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생략)

 

만리장성의 시대적 변화와 특징

 

<시대적 변화>

 

춘추전국시대 - (),(),(),(),()등의 여러 나라가 만리장성 구축

()나라(BC 214) - 진시황제가 연, 조 등이 북변에 구축했던 성을 증축 및 개축함

()나라(BC 2C) - 무제가 둔황 바깥쪽의 위먼관까지 연장

북위(北魏) 5C초엽 - 장성을 보강

북위(北魏) 5C중엽 - 수도 평성(平城) 부근에 또 다른 성벽을 구축

북제(北齊) 6C중엽 - 대통(大同) 북서쪽에서 쥐융관(居庸關),산하이관에 이르는 장성을 축조 → 뒤이어 현재의 내장성(內長城)에 해당하는 곳에 중성(重城)을 구축 → 하남성(河南城), 산서성(山西省) 경계 북부를 태행산맥을 따라 남하하는 장성 축조

()나라 - 오르도스(하남) 남변에 장성을 구축

()나라(1403~16C초엽)

- 영락연간(1403~1424) : 보강 시작

- 정통연간(1436~1449) : 내장성 구축

- 성화연간(1465~1487) : 오르도스 남변의 장성 수축

- 가정연간(1522~1566) : 동쪽 일대의 장성 완성

-15C중엽~ 16C초엽 : 오르도스 서쪽 끝에서 란저우를 거쳐 자위관에 이르는 장성을 완성

 

<시대적 특징>

 

(), () 시대 : 이 시대의 만리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뻗어 있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위치로 남하하게 된 것은 거란과 돌궐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함

 

북위~수 시대 : 북위에서 수 나라에는 만리장성을 더욱더 보강하고 축조하는 시기

 

당 시대 : 만리장성의 훨씬 북쪽까지 판도를 넓혔기 때문에 방어선으로의 장성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오대에 이르러서는 만리장성 지대가 북방민족의 점령 하에 있었으므로 거의 방치 됨.

 

명 시대 : 만리장성이 산하이관에서 자위관에 이르는 현재의 규모 및 모습을 갖춘 시기이다. 명 나라는 장성지대를 9개의 군관구로 나누어 구변진을 두고, 장성을 통과하는 교통요지, 즉 옌먼관(雁門關), 쥐융관, 구베이커우(古北口), 장자커우(張家口) 등지에는 견고한 관성을 설치함.

 

() 시대 이후 : 청 대 이후에는 군사적인 의의를 상실하고, 중국 본토와 둥베이(東北), 몽골지역을 나누는 정치행정적인 경계선에 불과

 

만리장성으로 인한 피해

 

그 당시 진시황은 만리장성 공사 이외에 아방궁 축조 등으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짜고 있었다.

 

피해일화

 

-옛제()나라에 맹강녀라는 여인이 살았다.그녀는 남편과살고있었는데,어느날 남편은 만리장성 축조에 징집되었다. 이후로 한참을 기다린 그녀는 남편이 3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자 불안한 마음에 집을 떠나 만리장성 축조 현장으로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이 일하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맹강녀는 그 앞에서 한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만리장성의 한쪽 성벽이 무너졌다고 한다.

 

이 당시 진 나라의 인구는 약 2천만 안팎이었는데, 궁성과 능묘 건축에 징발된 사람이 150, 요새 오령(五嶺)을 지키는 이가 50만 명, 흉노를 방어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는 일에 수십 만 명이 동원됨. →전체 인구의 1/10이상이 강제 노역에 동원됨.

 

진나라의 멸망 원인이 된 진승오광의 난

 

-진나라 2세 황제 원년에 진승과 오광이 마을 장정들을 인솔하여 어양군을 수비하러 떠났다. 그런데 자주 큰 비가 내려 길이 끊어지는 바람에 도저히 정해진 날에 목적지에 도달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이에 진승이 부하들을 불러, "어차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대들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본이 왕이다, 제후다, 장군이다, 재상이다 하는 것에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야 말로 각오하기에 따라서는 그런 왕후 장상이 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하고 설득하였다. 그들은 진승의 말을 따랐고 그리고 진승과 오광은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진승과 오광의 난의 시초이다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