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도교
1. 도교
● 도교(道敎):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교조로 삼은 중국의 토착 종교.
'도교(道敎 Taoism)'는 엄격하게 따져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도가사상이요 다른 하나는 도교 신앙이다. 도가 사상은 정신적으로 누릴 수 있는 절대 자유와 초월을 추구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도교신앙은 육체적으로 불로장생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한다.
1) "도교"라는 명칭의 기원
- 도교의 본뜻은 '도'를 설한 "가르침"이다. 도는 유가, 도가를 비롯한 모든 제자학설의 중심이며 중국 민중의 의식 밑바탕에 존재하고 있다. '도교'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사례는 <묵자>에서이다. 여기서 도교는 유가의 가르침. "성인, 선왕의 도에 대한 가르침 ","성인이 도를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후대로 오면서 "도를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에서 혹은 유교를 혹은 불교를 가르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방술, 주술, 도술이 혼동되어 왔고, 그 도술에 유가, 도가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더 나아가 술수 (術數), 방기 (方技) 등 각 요소가 혼합되어 쓰였던 후한 시대에는 '황로'신앙의 객체화가 진행되었고 농민 민중신앙에 의한 구체적 집단인 도가 성립되었다. 후한대에는 '황로도''오두미도'가 생겨났다. 또한 동진 이후 나타난 '천사도(天師道)'가 그 한 예이다. 그런가하면 동진 이후에 훗날의 유불도, 삼교 중의 도교를 '도가'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도가'라는 말은 전 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서 사기의 다음과 같은 설명 "음양의 큰 순리에 따르며 유. 묵의 선을 채용하고 명. 법(名.法)의 요체를 섭취하고 때에 따라 움직이며 사물에 응하여 변화한다." 말에서 볼 때 그것은 다양한 학파를 종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도가사상에 황제(黃帝)가 결합된 것은 전국말 부터이고 전한 초에 이르면 황제를 도가의 시조로 보아 '황제지술', '황로도덕지술','황로'등과 같은 표현이『사기』곳곳에서 보인다. 따라서 진, 한 초에는 '황로'가 도가와 같은 내용으로 생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도교'는 최초에는 '성인의 도'를 설한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고 그러한 의미에서 유불의 가르침까지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5세기에 도가만을 도교라고 부르게 된 것 같다. 도가가 유교, 불교에 대항에서 도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과정은 사실상 도교가 하나의 큰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이니 사실들도 위와 같은 성립사를 방증한다. 일반적으로 도가는 철학이고 도교는 종교라고 구분하지만이는 편의적이고 상식적인 것이다. 도가의 철학적 측면과 도가의 종교적인 측면이 합쳐져서 도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
- 일종의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노자와 장자의 글을 인용하지만 그 목적은 노장사상과 정반대라고 해도과언이 아니다. 앞에서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가 사상이 죽음과 삶의 문제에서 마저도 초월하는 참자유를 추구하는 것에 반해 민간 종교로서의 도교는 육체적 생 명을 최대한 연장하고 죽음을 맛보지 않는 육체적 불멸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종교 전통이다. 도교의 기원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
① 장도릉 : 어릴 때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그 뜻을 터득한 다음 이어 오경과 기타 도참 서적을 섭렵했다. 시대가 험악하여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명산대천을 주류하며 도를 닦았다. 드디어 단약(丹藥)을 계발하고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기 시작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지금의 사천성으로 옮겨가 '도교'를 창립했다. 그는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등 의 글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노자의 사상 뿐 아니라 오행, 신선, 양생(養生), 무술, 치병 등에 관련 된 사상이 포함되었다. 장도릉은 이런 사상을 종합하여 종교적 목표가 '불로장생'하는 신선이 되는 것이라 하였다. 장도릉은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이라하여 교주로 받들고, 『도덕경』『노자오천문』이라 하여 경전으로 삼고, 자기는 태상노군에 의해 봉함을 받은 '天師'라 칭했다. 이렇게 생겨 난 것이 '천사도'이고, 신도들에게 쌀 다섯 말을 받았으므로'오두미도(五斗米道)'또는 미적(米賊)이라고도 불렸다. 장도릉 등이 도교를 일으킨 초기에는 그 신도들이 대부분 어리석었던 탓으로 종교라기보다도 일종의 교비(敎匪)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도교가 일반 민중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 사이에도 널리 전파되자 체계적인 교리와 합리적인 학설 ·교양의 뒷받침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요에 따라 도교가 하나의 종교로서 이론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4세기 무렵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학술적인 기초를 제공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구겸지(寇謙之)가 전래 종교인 불교의 자극을 받아 그 의례(儀禮)의 측면을 대폭 채택하고 도교를 천사도(天師道)로 개칭함으로써 종교적인 교리와 조직이 비로소 정비되었다.
① 방사:
도교의 창시자하면 모두들 장도릉을 생각하지만 장도릉 이전에 이미 방사란 부류가 있었다. 송나라 장군방이 집필한 운급칠참에 도교의 기원은 천시보다 훨씬 이전이란 기록이 있다. 이는 내용이 황당무계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장자와 열자의 서적중에 언급된 막고야지산, 화서지구과 회상신선등의 우언들은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어 결국 신선설이 생기게 되었는데 이런 신선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바로 방사인 것이다. 방사의 기원이 언제부터인가에 대해서는 알길이 없다. 그러나 진한 이전부터 이런 인물들이 존재했음은 틀림이 없는 사실이다. 진시황은 방사 서복의 바다 한가운데 삼신산이 있어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말을 믿고 동남동녀 오백명을 보내 신선과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했었다. 이전 국책에는 형왕에게 불사의 약을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 이후로는 한무제가 이소군 난대의 말을 믿고 높은 누각을 건립하여 신선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사기 봉선서에는 한무제가 신선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매우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봉래, 방장, 영주 세섬 중에 신선이 살고 있어 불사약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황제가 되니 이제 신선이 되려고 한다는 일종의 그칠 줄 모르는 인간의 욕심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무제는 후에 느낀바 있어 천하에 어찌 신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요망스런 일이로다. 절식하고 약을 먹으면 병을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따라서 소위 신선이라는 것은 일종의 망상으로 옛사람들의 우언을 사실로 잘못 믿고 있었던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3) 도교 각파의 성립
*태평도: 태평도는 후한 중기의 간길(干吉)이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부터 《태평청령서(大平淸領書)》, 즉 태평경을 전수받은 일에서 시작된다. 이 경전을 종교운동의 지주로 삼아 하북(河北)의 장각(張角)이 태평도를 조직했다. 그러나 장각이 후에 반란을 일으켜서, 태평도는 멸망하고, 민간에 남은 잔당이 오두미도와 합류했다.
* 오두미도:
오두미도는 장릉(張陵)이 사천(四川)의 청도(成都)지역에서 시작한 종교집단이다. 도가의 사상을 중심으로 주술적인 치병(治病)을 하고, 그 사례로 쌀 5두(한국의 약 5升)를 헌납케 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 오두미도가 종교 교단으로서의 조직을 확립한 것은 장릉의 아들인 장형(張衡)과 손자인 장로(張魯)의 시절에 이르러서부터였다. 특히 장로 때에는 처음에 익주(益州)의 장관의 보호를 받아 흥왕했으나, 후에 압박을 받게 되자 사천 동부에서 산서(陝西)의 한중(漢中)에 걸친 땅으로 옮기고, 조조(曹操)에게 투항하여 그 제후가 되고 나서 관동(關柬)의 호족·귀족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 관동의 오두미도는 원시적인 주술을 중심으로 하는 교단에서 호족·귀족과 관계를 맺고 신선방술과 다른 도술을 위주로 하는 교단으로 변해 갔다.
* 갈씨도:
한말의 전란을 피하여 강남으로 갔던 도사 좌자(左慈)에 의하여 정리되어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갈현(葛玄) 일족에게 계승되었던 이 계통의 도술적인 종교는 <갈씨도>라고도 불리었다. 갈현의 종손인 갈홍(葛洪)은 《포박자(抱朴子)》를 저술하고, 이 계통에서 전해지는 연금술에 의한 신선방술을 집성했다. 또 갈씨 일족에 의하여 뒷날의 《영보경(靈寶經)》의 기본부분이 만들어졌다. 이경전은 그 뒤 이 계통의 도교 경전류가 되어서 계승되었다. 오(吳)나라 재상의 자손으로 알려진
* 상청파:
도홍경(陶弘景)은 모산(茅山)을 거점으로 《상청경》을 대성하여 이른바 <상청파>를 확립했다. 그의 사상은 과학적인 의경(醫經)·경방(經方)·신선의 학(學)을 기초로 한 것으로, 거기에 다시 불교와의 교류도 있었는데, 그는 처음으로 이론적인 도교 교학을 수립했다고 할 수 있다. 육조말에서 수대(隋代)까지 화북(華北)에 신천사도, 강남지역에는 천사도와 상청파가 각각 전개되어 갔다. 당(唐)대로 들어오자, 상청파의 본거지인 모산을 중심으로 해서 남북 도교의 통합과 교류를 목표로 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도홍경의 교학을 받은 당(唐) 초의 상청파 도사 왕원지(王遠知)는 처음에 신천사도에서 수행했으며, 제자인 반사정(潘師正)은 모산에서 신천사도의 거점인 숭산(嵩山)으로 옮겨 살았다. 이같은 상청파의 활약으로, 모산은 당대 도교의 중심적인 고장으로 되었고, 상청파는 천사도와 함께 도교의 2대 유파로 육성되었다.
4) 중국의 시대별 도교
● 위진남북조:
도교는 갈홍(葛洪)이 제일 먼저 황백의 술(黃白之術)을 제창하고 『포박자(抱朴子)』를 지어 도술을 선양한 이래 남제의 고환, 양나라의 도흥경 등이 모두 신선도술의 제창에 주력하였다. 도무제는 이 도술을 깊이 믿어 선약을 먹었고, 구겸지는 숭산으로 들어가 도록에 관한 책을 지어 태무에게 헌상하였다. 태무는 그 도술을 신봉하여 천사도장을 건립해 주었음은 물론 자신의 원호까지 내평진군으로 고쳤다. 그 후
● 당대:
도교는 당나라 때가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자의 성이 이씨(李氏)로서 황실과 동성(同姓)이므로 노자를 국조 (國祖)로 추앙하고 사원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노자를 태상현원황제(太上玄元皇帝)라고 불렀다. 당태종이 사당을 세운 이래 역대 제 왕중 노자를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했고 고종은 몸소 호주(毫州)로 가서 노자 사당에 참배했으며 왕후(王侯)이하 모두 『도덕경』을 배웠고 도사들은 납세를 면제받았으며 백성들은 거의가 도교를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중종(中宗)은 모든 주에 하나씩의 도관(道觀)을 짓도록 명하고 도사 정진사(鄭晋思)를 비서감으로 임명하였으며, 이 밖에도 도사 엽정능을 국자제주(國子祭酒)에 임명하는 등 도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용을 베풀었다. 도교는 그 당시에도 매우 발전하여 민간에서 채소를 먹으며 염불을 외우고 선(仙)을 수양하며 도를 닦는 풍토는 매우 보편화된 것이었다.
● 송대:
송대에도 도교를 계속 숭상하였다. 진종(眞宗)과 휘종(徽宗)은 도교제창에 온 힘을 쏟을 정도였다. 휘종은 도교를 매우 돈독하게 믿었으며, 스스로 '도군황제(道君黃帝)'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도교를 믿도록 명령을 내리는 한편, 태학(太學)에 『도덕경』박사를 두었다. 이와 같이 송대의 도교는 정치적인 대폭적인 지지로 큰 발전을 하였고 그 영향은 막강하였다.
● 원대:
원대초기의 군주는 도교를 여전히 숭상하였다. 도사 구처기(丘處機)는 원태조의 부름을 받아 신선으로 떠받들어졌다. 이시기의 북방에는 대단히 많은 도교도들이 있어서 조욕활동이 활발하였다. 도교의 경적(經籍)인 『도장(道藏)』은 당나라 현종 때 『개원도장(開元道藏)』을 수찬하여 총 3744권을 수록하였다. 하지만, 안사(安史)의 난 때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그 뒤에도 몇 차례 수집, 정리하였으나 당말의 전란으로 인해 또 대부분이 멸실되고 말았다.
● 명청:
도교는 한 때 명 세종(
5 ) 도교가 신속하게 발전하게 된 이유
첫째: 도교는 중국철학사상에 의거하여 형성된 종교라는 데에 있다. 도교신앙의 신지(神紙-하늘과 땅의 귀신)는 신화, 민간전설 및 천문지리의 학설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으로, 일반대중이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둘째: 전교의 방법이 대단히 현실적이라는 데에 있다. 몸의 병을 치료하고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셋째: 나도 늙지 않고 신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희망을 가지게 하였다. 즉,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탈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히 도교를 믿게 되었다.
- 삼국시기에는 사회가 더욱 혼란함으로써 천사도의 발전이 대단히 빨랐을 뿐만 아니라 세력이 막강하였고, 조직 또한 엄밀하였다. 또, 장노가 조조에 의해 멸망당한 뒤에도 천사도는 금지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유행하여 지방을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도교발전에 공이 가장 컸던 인물들은 갈홍(葛洪), 구겸지(寇慊之),
*갈홍(283~343)은
진(晉)나라 사람으로 호를 포박자(抱朴子)라고 하였는데, 그는 어려서부터 신선술을 좋아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갈현(葛玄)은 삼국시대의 유명한 방사였으며, 갈홍은 갈현의 제자에게서 도를 배웠다. 나중에 그는 『포박자』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내외편으로 나뉘어 70여편이었다. 그는 자서에서 내편은 신선방약(神仙方藥), 귀괴변화(鬼怪變化), 섭생을 하여 수명을 연장, 사악함을 물리치고 화를 물러가게하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는 도가에 속한다. 외편은 인간득실, 세상일의 좋은것과 나쁜것을 말하였는데 이는 유가에 속한다. 그가 이렇게 선문에서 밝힌것처럼 신선도교사상과 유가사상을 결합하여 서술한것으로, 도교 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구겸지(365~448)는
북위 때의 도사로 18세 때 숭산(嵩山)에 입산하여 수도하였다. 그가 입산수도한지 7년뒤 스스로 태상노군(太上老君)이 그에게 '천사(天師)'의 위를 수여하였고, 도교의 개혁을 명령받았으며, 그로부터 8년뒤 노자의 현손이『녹도진경(錄圖眞經)』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의 태평진군을 보좌하도록 하였다고 하였다. 또 북위 태무제(太無帝)의 깊은 신임을 받았는데, 태무제는 불교를 억압하고 도교를 제창하여 도량을 설립하는가 하면 구겸지로 하여금 도교(天師道)를 개혁하도록 했다.
*
절강 오흥 사람으로 일찍이 출가하여 수도하였다. 그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유송문제, 명제 등의 아낌없는 지지를 받으며 도교경전을 계통적으로 정리하였다. 또, 교의와 규범 등에 관하여 100여권을 저술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도교의 법도와 예식을 보강하고 확충하였다. 예를 들면, 도복의 이름을 월피(月陂), 성건(星巾), 하수(霞袖)등으로 부르는가 하면 의식도 장엄하게 거행하였다. 이처럼 도교의 이론과 조직을 정비하여 남천사도(南天師道)라고 하였다.
6) 현대의 도교
20세기 도교의 중심지는 타이완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17~18세기 푸젠 성[福建省]에서 옮겨간 대규모 이주민 때문에 비롯된 것이지만, 새로운 발전은 제63대 선사(仙師)인 장은부(張恩溥)가 1949년 피난온 것 때문이다. 타이완의 도교는 여전히 전통적 형태로 남아 있다. 오늘날 선가(仙歌)의 음송은 장도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1960년대에 타이완의 도교는 부흥기를 맞았다. 도교에 대한 학문적 연구 또한 서양학자까지도 참가하여 진행 중이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도교가 앞으로 크게 발전하여 서양에까지 전파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현재는 장원선(張源先)이 64대 천사로 있다.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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