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Cafe/My Love China

중국의 복식(服飾)

지식창고지기 2010. 8. 3. 05:11

중국의 복식(服飾)

 

 

중국은 예로부터 예악의 나라요, 의관의 나라로서, () 이래로 역대의 복식제도가 모두 역대사서나 문헌 가운데서 발견되고 있다. 복식은 입는 사람의 신분과 지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일종의 전례나 의식의 상징이기도 하다. 역대 복식의 제도와 색체 등의 제반 변화는 당시 사회의 생활상태, 정치, 경제, 학술 및 사상 등의 요소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

 

※시대별 중국 복식의 변천

 

1. 석기시대~ ()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인 상, 주 때에 마련되었다. 의복의 기본형은 신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 이때의 복식은 중국후세복식의 자연적인 영향을 주었다.

 

은대의 복장문화는 견직물과 모직물 중심의 꽤 높은 수준이었으며, 마직물, 갈 등의 수피(樹皮, 나무껍질)로 섬유직물을 만들어 평직이나 사문직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벌써 견직물, 모직물, 마직물이 생산되었고 의복 재료를 다양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으며 의상도 신분에 따라 갖추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은대에 복식의 형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인 복식의 형태는 상의하상 이외 바지 등의 기본 형태에서 다양하게 디자인 되었다. 소매형태나 문양 등이 신분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의복 색에 있어서는 흰색을 숭상했으나, 녹색, 홍색 등도 사용하였다

 

2. (), 춘추전국(春秋戰國)

 

중국 복식의 기본형이 확립된 시기. 은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주대에는 의례에 필요한 관복제도가 완비되었고, 이 시기에 완비된 관복제도는 이후 중국 관복제도의 기본적인 토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통일제국의 성립으로 인하여 황제의 복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동주 이후, 자유로운 창조적 예술정신이 싹터, 북방민족의 가볍고도 몸에 맞는 기마복식이 중원에 전래되었으며, 이는 한족과 호족의 복식 사이에 일어난 최초의 융합으로 기록된다. 위 진 시대에 현학이 유행되면서 자연의 본성을 추구하는 심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는 나라에 따라 각각의 습속이 달랐으나 공통적으로 성행했던 복식으로는 심의와 호복, 포가 있다.

 

"주례"에 근거하여 주나라의 관복제도를 보면 주대의 제왕과 백관은 모두 예복을 입었는데 예복은 면류관과 곤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또한 의식의 내용에 따라 복식도 구별되었다. 허리띠 아래에는 폐슬 이외에 면복을 입을 때는 적석(붉은 신)을 착용하였다.

 

3. (), ()

 

진나라는 주대의 제도를 답습했으며 서안 근방의 시황제묘에서 출토된 토용은 대부분 군복이다. 전한 창업의 초에는 일부 진대(秦代)의 제도를 그대로 습용했으며 사치가 심했다.

 

한의 수도 장안은 36년간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의 중심도시로 전한, 후한 400년을 통하여 전성기를 이루었던 시기이다. 여러 민족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사회 풍속의 변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복식에 대한 욕구가 점차적으로 높아졌으며 옷차림이 갈수록 화려해 졌다.

 

후한의 영평 2 (A.D. 59)- 최초로 복식제도를 공식으로 법제화. 주대의 관복제도를 바탕으로 황제 이하 문무백관 및 황태후, 황후 이하의 궁정부인의 관복이 확립되었다.

서민들의 복장은 일반적으로 간단했다.

 

남자 복식

의복- , 곤의

두식- , ,

신발양식-

  

여자복식

부의대소(헐렁한 상하의), 부의박대(헐렁한 상의에 넓은 대)

저고리의 길이는 허리 아래 혹은 무릎 아래까지였다.

 

4.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이시기는 정치적으로 분란의 시기였으나 사회, 사상,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여러 민족이 섞이게 되고 문화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따라서 복식도 다양하게 변화하였고 점차적으로 교류되는 시기였다. 즉 광대한 한족 착수단의(窄袖短衣)에 잔 걸음걸이, 요대 및 목이 긴 가죽 신발 등의 호복을 입기 시작하였다. 이는 춘추전국시대에 이어 한족과 호족의 복식에 있었던 두 번째의 대융합이라 할 수 있다.

 

남자복식의 대표적인 옷은 삼()이다. 삼은 홑, 겹 두 종류이다. 상류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넓은 형의 삼()과 대수(大袖)를 좋아했다. 이 시기는 큰 소매와 나막신이 유행하였다. 여자복식은 대부분 한나라 시대의 것을 이어받았는데 심의가 유행하였고 신발과 머리장식은 더욱 화려해졌다. 불교의 성행으로 불교문양 복식이 가미되었고 주변국의 장식풍이 받아들여졌다. 머리에 매는 복건은 한대에 시작한 것으로 위 진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다.

 

일반 여자는 머리에 가발을 사용하여 머리를 높이 세워 장식했다. 불교의 영향으로 많은 부녀자가 머리를 정수리 중앙에 높이 올려 만드는 형식을 하여 이를 비천(飛天)이라 하였다.

 

5. () ()

 

, 당시대는 문학, 예술, 의학, 과학기술의 여러 분야에서 전성기를 이루어 복식은 더욱 개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주대에는 방직기술과 염색기술이 발달하였다. 수대의 복식은 대부분 한의 제도를 따랐고 당나라 복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호복제도는 잘못된 것이라 하여 개정되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견직물과 모직물이 전파되었고 연화문, 당초문 등의 문양이 전래되어 서역풍이면서 정교하고 화려한 당의 복식을 만들었다. 외국과의 내왕이 빈번해지자, 당의 복식은 마침내 중외의 한복과 호복을 함께 받아들여 더욱 참신하고 아름다워졌을 뿐만 아니라 대담해지고 국제화되었다.

 

남자- 복식, 원령포삼(단령포삼)/ 두식- 복두, 건자/- 오피와. 복두와 단령의 착용시에는 오피육합화.

여자복식- 유군복, 반비, 피백, 남장, 호복, .

 

6. 오대(五代), ()

 

송인은 복식에서 하늘이나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 의식 때 입는 예복은 화려한 기품을 추구하는 한편, 일상복은 간단하고 소박하였다. 일반적으로 송의 복식제도는 검소함을 숭상했기 때문에 보수적이며 색채도 수수하고 자연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왕은 대례복으로 원령난삼을 착용했다. 난삼은 당나라 때부터 입혀지다가 송나라 때에 가장 유행한 것으로 상급관리부터 하급관리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착용하였다. 사대부가 일상복으로 모삼을 입었고 복두는 송나라 사람이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백관의 공복은 색에 따라 계급이 달랐고1) 허리에는 어부2)를 한다. 복건은 서민은 많이 쓰지 않았으나 일반 문인, 유생들이 썼다. 송대의 황후는 적의, , , 환패, 구룡화채관을 착용하였다. 송대의 부녀복식은 일반적으로 유, , , 배자, 반비, 배심, 피백, 군을 입었다. 개두건은 검정 비단으로 만든 것으로 여자의 나들이용 얼굴가리개로 사용하였고 화관과 패식은 남녀 모두 각자의 신분에 맞게 사용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제도와 같았다.

 

7. (), (), ()

 

한족(漢族)과 경제 문화 방면에서 서로 교류한 것이 의관 복식에도 반영되어 있다. 요의 태조 초기에는 의관제도가 없었으며 조복으로 갑주를 입었다. 중원으로 입성한 이후 한족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곧바로 의관을 중국풍으로 고쳐 북반(거란인)은 국제, 남반(한인)은 한제(漢製)로 하도록 하였다.

 

거란족의 복식의 특징은 곤발()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빛나게 모두 깎아 머리 양쪽 혹은 이마 부분에만 머리를 약간 남겨둔다. 어떤 것은 이마 위에 머리를 모아 짧게 자르고 어떤 것은 귀 옆에 머리카락을 흘러내리게 한다. 또 좌우 40가닥의 두발을 가위로 정리하여 특수한 형태로 만들어 어깨 위에 드리운다.

 

금대 복식은 기본이 여진의 복식이다. 복식제도는 거란 복식과 비슷하나 흰색을 좋아했다. 송의 북부의 땅을 얻은 후에 송 제를 참작하여 관복제도를 제정했다. 금대 남녀복식으로 남자는 깃은 원령이며 착수로 된 포를 입었다. 여자는 장군(長裙:긴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좌임 착수포를 입었다.

 

원나라는 몽고족의 나라로 몽고족의 복식은 자기부족 고유의 복식 위에 고구려, , 금의 복식제도를 답습하였다. 의복재료로는 피혁이나 털가죽을 사용했다. 원대의 두발형태는 남자는 모두 머리 양쪽 가장자리를 깎아 내렸다. 머리의 뒤쪽도 똑같이 두상까지 깎아 내렸다. 전면에는 한 다발의 털만 남겼으며 남은 한 다발의 털은 눈썹 있는 곳까지 드리우고 좌우양쪽에 있는 머리털을 땋아서 귀 있는 곳에서 변발했다.

 

8. ()

 

주원장이 1368년에 명을 건립하여 한족이 실권을 잡자 원대에 행해졌던 언어풍습복식 등을 모두 금하고 순수한 한족의 문화를 정착시켜 한(), (), ()을 능가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따라서 명대에는 중화사상이 절정에 달해있었고 전통적인 한족 문화와 복식이 소생하였다.

 

명대복식은 당(), ()대에 이미 수립되었던 복식제도가 원()대에 문란해졌기에 건국후 한족의 의례를 회복해 관복제도를 재정비했다.

 

제도개혁의 범위가 상당히 넓어져 복식도 구체적으로 제한되었는데 이때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복식이나 복식도안, 색 등에서 엄격한 제한과 구별이 있었다. 명대에는 황제가 현의된 면복을 별로 착용하지 않았으며, 상복에 12장문을 베풀어 곤복으로 입었다. 관리의 조복 규정을 대단히 엄격하였다. 명대의 관리상복으로는 반령포(半嶺袍)를 입었으며 반령포에는 가슴 앞과 등 뒤에 보자를 달았는데 보자문양으로서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였고 동물을 표지로 삼았다. 보자와 관복의 문양도 등급간에 차이를 두었는데 이 규정은 정하는 때에 따라 바뀌어지기도 하였으나 아주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편복(便服)은 각 신분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 종류는 포(), 단의(短衣), () 등을 입었다. 사인 등 선비는 사령대금관수삼을 입었는데 이것은 우임으로 된 큰 깃이 사선으로 여며지고 소매가 넓은 포의 형태이다.

 

여자복식 관복

황후, 왕비, 명부 - 홍색의 대수삼, 심청색의 배자, 채색의 수를 놓은 피자, 주옥금봉관, 금수화문리.

평민 여자의 의복 - 편복, 배자, 비갑, 수전의

 

9. ()

 

만주족의 청이 중원에 들어온 초기에는 민심을 모으기 위하여 명의 복식제도인 한인의 의관을 계승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한족과 만족의 신하들이 두열로 열립하였다. 순치 2년에 만청의 제업이 날로 공고해지자 두발을 깎게 하고 복식을 바꾸려는 정책을 강행하였으나, 한인의 완강한 저항으로 점차 물러서게 되었다. 이어 명대 말엽의 유신이던 김지준이 건의한 "십부종"이 받아들여지면서 한인들은 부분적이나마 전통 복식과 의례, 풍속들을 계속 보존할 수 있었다.

 

청대는 만주족이 설립한 왕조로 건립초기에는 한족 진압정책을 강경하게 실시하였다. 따라서 의복이나 두식 또한 한족의 양식을 금지하였으며 만주족의 양식대로 머리를 깎게 하고 복식을 바꾸도록 하였다. 이 시기는 한복과 만주족이 혼거함으로써 자연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아 새로운 형태와 양식이 생겨났으며 서양문물의 도입으로 인하여 의생활 또는 서양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다.

 

남자복식- 황제의 조복 : 용포 / 일반 관원들 : 화의

일반 남자복식- , 마괘, , 마갑, , .

 

여자복식- 황후 조복 : 조관, 조포, 조군, 조괘 .

일반 여자복식- 하피, 봉관하피, 고자, 운견, 치파오.��

 

10. 20세기(복식의 혁명)

 

수천 년에 걸친 봉건왕조의 복식제도가 격심한 변화를 겪는시기.

남성

의복- 장포(長袍)마괘()중산복(中山服)양복(洋服)

- 포혜(布鞋), 면화(棉靴), 가죽구두.

기타- 예모(禮帽)

젊은 학생들은 주로 목깃이 세워져 있고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일본 제복과 비슷한 복장을 했다. 중산복은 이 학생복을 기초로 개혁한 것으로 손(孫中山)선생이 솔선하여 착용했으므로 그 이름을 얻게 된 것.

 

저고리- 5권 분립을 상징하는 5개의 단추, 4()를 상징하는 4개 주머니

소맷부리- 삼민주의를 상징하는 3개의 단추

차양이 있는 운형의 모자를 썼다.

이처럼 이 시기의 복식은 정치사회적인 환경만큼이나 변화가 심했으나 노인, 농민이나 외진 지역에서는 여전히 변발을 하고 전통 복식을 한 사람들도 있었다.

 

군경복

영국식, 미국식 등 여러 형식이 복합된 형태. 가슴에 다는 패장이나 모자, 군복의 색깔 등은 계급에 따라, 전투시나 평상시의 상황에 따라 달랐다.

 

여성들

저고리와 치마.

굽이 높은 구두, 스타킹, 짧은 파마머리, 팔찌나 시계 등, 중국과 서양이 결합한 신선한 멋을 창조.

또한 비녀, 팔찌 등 이전의 번거로운 장신구와 번잡한 도안을 탈피, 간편함을 추구해 1920년대 이후의 복식은 그 이전과 구별되었고 이를 문명신장이라 하였다.

 

1949년 이후

변형된 중산복과 인민해방군의 복장이 유행.

문화대혁명(1966 - 1976) 기간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화려한 옷을 배격, 평등과 투쟁의 이념 하에 해방군복을 입는 풍조가 지배적.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종식과 더불어 점차 쇠퇴.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개방 시작, 양복과 양장이 크게 유행하게 되자 중산복과 인민해방군 복장은 구세대를 상징하는 전유물로 남게 되었다.

 

현재

남성- 와이셔츠에 넥타이, 양복정장

여성- 스커트나 바이 정장, 나풀거리는 원피스, 짧은 미니스커트,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 등 다양.

한동안은 스타킹을 반쯤 걸쳐서 신는 등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이제 중국의 복식문화는 완전히 현대화•서양화되었다.

'Blog·Cafe > My Love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민족연구  (0) 2010.08.03
중국 소수민족의 형성원인  (0) 2010.08.03
경극과 문예  (0) 2010.08.03
진시황릉(秦始皇陵)  (0) 2010.08.03
중국의 정원(中國庭園)   (0) 2010.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