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秦始皇陵)
Ⅰ. 진시황릉(秦始皇陵)
◎ 진시황(秦始皇)
성 영(嬴). 이름 정(政). 조(趙)나라의 대상인 여불위(呂不韋)의 공작으로 즉위한 장양왕의 아들로서 13세에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태후의 신임을 받은 여불위와 노애가 권력을 농단하였으나 BC 238년 친정을 시작, 노애의 반란을 평정하고 여불위를 제거한 후, 울요(尉繚)와 이사(李斯) 등을 등용하여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여 BC 230~BC 221년에 한(韓) ·위(魏) ·초(楚) ·연(燕) ·조(趙) ·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통일 후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여 법령의 정비, 전국적인 군현제 실시, 문자 ·도량형 ·화폐의 통일, 전국적인 도로망의 건설, 구 6국의 성곽 요새의 파괴 등을 강행하였다. 또 천상을 본떠 대대적으로 확대 건설한 수도 셴양[咸陽]으로 전국의 부호 12만 호를 강제 이주시키는 한편, 민간의 무기소지를 금하여 반란의 소지를 제거하였으며, 사상의 통일을 위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다.
대외정책에도 적극성을 보여 북으로는 흉노족(匈奴族)을 격파, 황하 이남의 땅을 수복하고 전국시대 각국의 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요동에서 간쑤성[甘肅省] 남부 민현[岷縣]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건설하였으며,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와 해남도까지 정복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그는 성격이 사납고 신하를 엄격히 다스렸으며, 남을 신용하지 않았으나 대단히 정력적이고 유능한 군주의 자질을 갖추어 만기(萬機)를 직접 처리하였다. 또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 5차에 걸쳐 전국을 순행(巡行)하며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여러 곳에 세웠다. 그러나 아방궁(阿房宮)과 리산산[驪山] 기슭의 수릉(壽陵)을 비롯한 대규모 토목공사에 국력을 낭비하였고, 특히 만년에는 불로장생의 선약을 구하는 등 어리석음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가혹한 법치를 수단으로 지나치게 급격히 추진된 통일정책은 인민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마지막 순행 도중 사망하자 수행한 이사와 조고(趙高)는 유언을 위조하여 황자 호해(胡亥)를 2세 황제로 옹립하였으나, BC 209년 이후 시작된 반란으로 진제국은 급속히 와해되었다.
◎ 진시황릉(秦始皇陵)
서안에서 여산 화청지1)를 지나 동쪽으로 1km 더 가면 거대한 봉분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진시황의 능묘이다. 동서 485m, 남북 515m, 높이 약 76m이다. 「사기」<진시황본기(本紀)>에 의하면 시황제 즉위 초부터 착공되어 통일 이후에는 70여만 명이 동원되어 완성되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드는 등 천상과 지상을 모방한 지하 궁전을 만들고 도굴자가 접근하면 화살이 자동 발사하는 시설도 갖추었다고 하나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
능은 장방형의 두 겹의 담장으로 싸인 능원의 남쪽에 있으며, 안쪽 담과 바깥담의 사변 길이는 각각 2,525.4m, 6,294m로, 현재는 지상의 흔적이 없는 부분이 많다. 담벽 아래에서는 도수도(陶水道), 능원 내외에서 3곳의 건축유지와 수많은 배장묘2)와 순장묘3)가 발굴되어 전체적인 규모와 구조가 확인되었다. 특히 능원 동문 밖의 거대한 병마용갱은 세계적인 관심거리가 되었고, 능원 밖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형묘가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능묘는 진시황이 죽은지 3년만에 그의 통일 제국과 함께 항우의 군대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 황릉의 발견
1974년 황릉의 동쪽에서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던 농민이 우물을 찾기 위해 땅을 파던 중에 양지발(楊志發)이라는 청년이 3월 29일 곡괭이로 내리친 순간 병마용의 첫 번째 파편이 출토되었다.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팠더니 머리 부분과 팔 다리 조각들이 나오자 사람들은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뒤 함부로 출토품을 가져가다가 지면에 5미터 밑에서 녹슨 청동화살과 3개의 쇠뇌가 발견되었다. 아무리 파도 우물이 발견되지 않고 유물들이 발견되자 수리시설 담당자이던
◎ 황릉의 구조
▶ 1호 용갱
발굴이 진행되면서 많은 도용이 출토되었지만 유물과 주인과의 관계를 알 길이 없었다. 그때 구리극4)(戟)이 발견되었다. 전체길이 2.88미터로 머리부분에 ‘삼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여불위가 승상이 되고 나서 3년째에 만들었다.’ 라는 진귀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시황제 즉위 초, 여불위가 권력의 절정에 있던 때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가. 이것의 출현으로 병마용갱이 진시황의 부장품이라는 중요한 근거가 마련되었다. 거기에 또한 진의 청동 병기 제조기술이 최고조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발굴작업을 하고 있을 당시 한 백발 노인의 나타나 용갱의 가장자리를 알려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발굴팀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노인의 알려준 위치에서 탐사를 시작하였다. 1년뒤 용갱 전체가 파헤쳐졌다. 노인의 말이 매우 정확했던 것이다.
그 후 1년여간의 발굴 작업을 통해 동서 230m, 남북 62m, 총 면적 1만 4,260m2의 병마용갱이 파헤쳐졌다. 병마용은 모두 3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도용은 8천여 점, 도마는 몇백 필, 나무전차는 백여 승, 그리고 대량의 청동병기가 발견되었다. 비록 2천여 년 동안 황토속에 매장되어 완전하진 않지만 그 방대한 군영의 자태는 여전히 당당한 장수의 풍모를 잃지 않고 있다. 보병들이 대부분인 갱 속의 무사용(武士俑)은 하나하나의 표정과 머리모양 등이 모두 다르며 화살통속에 청동화살까지 들어있었다.
고대 사회의 사람들은 자신의 초상을 조각하는데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가 발전하면서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에 이르면 인간의 형상에 대한 그림이나 조각이 전대에 비해 대단히 활발히 이루어진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조형은 토템이 퇴색하고 사상이 중시되면서 인간이 존중을 받는 세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이런 전통예술이 진나라 말기 극심한 전쟁 속에서 거의 사라지고 더 이상 전해지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그 문명이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 2호 용갱
이 용갱이 발견될 당시 병마용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1호 용갱 전시관의 기초공사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북동쪽으로 20미터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병마용갱이 발견되었다. 2호 용갱은 L자형의 지하건축물로 길이는 96m, 너비는 84m, 깊이는 5m, 총면적은 6천m2 1호 용갱의 절반 정도였다.
갱 안에는 89대의 나무전차와 2천좌이상의 도용과 도마, 몇 만점의 청동병기가 매장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궁노병 ․ 경차병 ․ 차병 ․ 기병등 서로 다른 병과(兵科)로 이루어진 대형 군진으로 대부분이 보병인 1호 용갱과 구별되었다.
최전방에는 궁노병이 배치되어있었는데 가볍고 어깨로 활을 잡아당기는 사수인 인강(引强)과 무겁고 발로 활을 당기는 사수인 척장(跖張)으로 나뉜다. 최전방에 궁노병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전쟁에서 궁노가 특별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백여개의 쇠뇌(활과 비슷하지만 활과는 달리 먼 거리를 쏠 수 있음)가 발견되어 고대병기의 모습을 알 수 있다.
궁노병의 오른쪽은 방대한 전차군진이 자리 잡고 있다. 가로세로 8열의 64대의 전차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전차의 갑옷 입은 도용이 3개씩 있다. 좌우는 전투병이고 중앙은 운전병인셈이다. 3명 모두 일치형 갑옷인 전포(戰袍)를 입고 어깨와 팔뚝을 덮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보호대와 목에는 네모모양의 동정을 무릎아래는 보호대를, 착용하고 방에는 네모나고 입구의 코가 가지런한 신발을 신었다. 머리는 오른쪽으로 상투를 틀고 그 위에 둥근모양의 흰모자를 쓴 다음 그 위에 긴관을 올렸다.
백좌 가량의 기병도 발견되었는데 그들의 복장은 보병이나 전차병과 달랐다. 붉은색의 매화가 그려진 작은 모자를 쓰고 딱 붙는 상의와 끝자락이 오므라드는 긴바지를 입고 단화를 신었다. 이것은 민첩하고 과감하게 기습공격을 하는 기병의 전술적 특징 때문이다.
또, 진나라 시대의 악부종(樂府鐘)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높이가 13.3m, 양쪽의 선(銑 : 앞의 뾰족한 부분)사이의 길이가 7.2cm, 고(鼔 : 위의 납작한 부분)사이가 5.8cm, 무(舞 : 매다는 곳의 위쪽 부분)의 넓이가 6X4.8cm였다. 정(鉦 : 무에서 고까지의 거리)과 고에는 금박에 뿔 없는 용의 무늬를 넣었고, 전(篆 : 한가운데 무늬 띠)사이와 종대(鐘帶 : 종 중앙에 돌기가 있는 부분) 또한 금박에 구름무늬가 있었다. 무늬가 매우 세밀하고 호화스러웠으며 땅속에 2천여년동안 있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후에 섬서성 박물관에 1급 유물로 소장되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출토된 지 10여년 뒤인 1986년 10월 분실해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 3호 용갱
발굴하면서 이곳이 고대 군진 지휘부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세계 고고학사의 유일한 발견이었다. 3호 용갱의 건축양식, 전차와 말의 특징, 도용과 병기의 배열 등은 고대 전쟁과 출정전의 의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3호 용갱을 보면 진나라군대는 지휘 기관이 독립되어 전체 군진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독립시킨 것은 지휘관이 면밀한 작전 방안을 작성하거나, 적진을 한눈에 파악해 전쟁 시 유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전차와 말이 있는 방에서 채색화가 그려진 전차 한대가 출토 되었는데 1호 용갱과는 달리 화려하고 선명했을 뿐더러 왼쪽에 채색화가 그려진 덮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도용의 숫자도 1호 용갱의 3명과 달리 4명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지휘자 전용차로 추측된다. 그리고 도용의 배열이나 병기분포, 그리고 사용방식 또한 각기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1 ․ 2호 용갱의 도용은 작전대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3호 용갱이은 무사용은 좁은 길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배열되어있다. 그리고 호위 병사들이 지녔을 칼날이 없는 병기인 수(殳)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경비나 호위를 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용갱에서 발견되지 않은 동물의 뼈나 사슴뿔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전쟁 전에 점을 치는 의식이 행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4호용갱
발견 당시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갱도였다.
▶ 마구갱과 희귀동물갱
무릎을 꿇고 앉은 형상 옆에 도자기로 만든 항아리, 쟁반 등 다른 형상의 도자기들이 있었고 도기 쟁반 안에는 검게 부식된 뼈와 벼와 볏짚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말의 뼈가 있었다. 뼈에 남아있는 새끼줄의 흔적으로 보아 분명 말을 생매장했음을 알 수 있었다. 마구갱은 남북으로 세줄로 배열되어 있었으며 도기쟁반, 구리 고리, 쇠도끼 등이 추가로 발굴되었다.
또 마구갱과 비슷한 부장품 31좌를 발견하였는데 그것 또한 남북으로 3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말의 뼈는 아닌 작은 뼈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은 사슴과 새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구갱이 진시황의 말사육장이었다면 희귀동물갱도 분명 궁정의 화원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순장묘
1976년 10월, 탐사 팀은 17좌의 순장묘를 발견하였다. 그 중 8좌에 대해 시굴작업을 단행했다. 묘의 매장구조는 모두 경사진 갱도가 나있는 갑(甲)자 형태였다. 묘의 특수한 구조는 묘의 주인이 황실종친이나 귀족이나 대신인 것은 나타낸다. 그리고 금 ․ 은 ․ 구리 ․ 옥 ․ 칠기 ․ 비단 등도 발견되었다. 이런 순장묘들 안에는 유골들이 흐트려져 있고 이마에 화살을 맞은 두개골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강제로 살해당한 뒤 매장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 동거마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유물 중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동거마(銅車馬 : 구리로 만든 수fp와 말)는 1980년 거의 모든 발굴이 끝나갈 때 쯤 발견되었다. 총 2호의 동거마가 발견되었으며, 흙더미에 형태가 일그러져 있었지만, 완전한 형태의 한 거마가 완전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은장식품은 윤기가 나고 금으로 된 물건들은 빛이 나고 있었다.
동거마가 출토된 곳이 개인의 보리 경작지였는데 그 주인이 입장권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보면서 훼손의 위험이 생기자 1개 소대 병력의 군인을 진입 시키려다 실패하고 여러 협상 끝에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동거마는 실제 크기의 2분의 1 정도이고 매우 호화스러운 장식을 하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란 2천년의 시간차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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