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 白起
? ~ 257.
중국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명장.
소양왕(昭襄王) 때 위염(魏?)의 추천으로 장군이 되었으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좌서장(左庶長)·국위(國尉)·대량조(大良造) 등으로 승진했다.
일찍이 한(韓)·월(越) 연합군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BC 278년 초(楚)나라의 수도 영(후베이 성[湖北省] 장링[江陵] 북서쪽)을 공격하여
진의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 공으로 무안군(武安君)에 봉해졌다.
BC 260년 장평(長平)에서 월군을 크게 격파한 뒤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했다.
그후 상국(相國) 범저(范雎)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소양왕의 분노를 사 자살했다.
몽염 蒙恬
?~BC 209 중국.
만리장성을 수축한 중국 진(秦)나라의 장군.
진나라를 세운 시황제(始皇帝)의 명으로 중국 북방을 넘나들면서 소란을 피우던
중앙 아시아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을 토벌하고,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진나라 이전에도 북방에 소규모의 방어용 성벽이 축성되어 있었는데, 몽염이 이것을 보수·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황제가 죽은 후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환관 조고(趙高)가 정권을 찬탈하고, 몽염과
정통 황위 계승자인 2세 황제를 죽였다.
한편 몽염이 쟁(箏)과 붓을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붓은 그가 독창적으로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기존에 있던 것을 현재의 형태로 개량하거나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곽상 郭象
?~312 중국.
중국 진대(晋代)의 현학자(玄學者).
신 도가(新道家)의 사상가로 도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 가운데 하나인 〈장자〉의 유명한
주석서 〈장자주 莊子注〉를 썼다고 알려져 있다.
곽상은 정부의 고위관리였다.
〈장자주〉는 향수(向秀)가 시작한 것을 그가 죽은 뒤 곽상이 계속하여 통합시킨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이유로 〈장자주〉를 '곽향주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곽상은 '도'(道)를 '무'(無)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노자(老子)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도'는 비존재이기 때문에 존재[有]를 낳지 않으며, 따라서 제1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물의 원인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사물들의 궁극적인 원인까지 철저히 탐구해나가면 우리는 어떠한 원인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에서 비롯된 존재에 도달하게 된다.
스스로 있는 존재에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 물을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펑유란[憑友蘭]의 〈중국철학사〉
그래서 곽상은 모든 사물은 '스스로 생겨난다'[自得]고 주장했다. 사물은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자기변형'도 다른 사물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며 그 사물은 다시 다른 사물들의
조건이 된다.
그는 이러한 일반원리를 인간세계에 적용하면서 사회제도와 도덕관념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도가의 '무위'(無爲) 개념을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위로 해석하여 그것에 보다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이 점에서 곽상은 본래의 사상에서 벗어났지만, 그가 무위개념으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은
장자 사상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물은 저마다의 뚜렷한 본성을 갖고 있고 만약 그것들이 자신의
본성에 따른다면 만족과 기쁨을 얻게 되지만,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본성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되려고 한다면 그곳에는 불만족과 좌절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간은 옮음과 그름, 삶과 죽음 등의 구별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의 행복에는
끝이 없게 된다는 것이 곽상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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