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진秦 ( BC221~206 ) 진秦의 장양왕, 여불위, 한비자

지식창고지기 2009. 6. 1. 09:09

장양왕 莊襄王


?~BC 247.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군주(BC 250~247 재위).

성은 영, 이름은 이인(異人), 자는 자초(子楚). 효문왕(孝文王) 안국군(安國君)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조(趙)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으나 후에 젊은 부호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으로

진에 돌아왔다.

당시 진의 소양왕(昭襄王)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태자 안국군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華陽婦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자로 들여보내 진의 후계자로 삼았다.

안국군이 재위 1년 만에 죽자 자초가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후 여불위는 공로를 인정받아 상국(相國:수상)으로 임명되었다.

장양왕이 재위 3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아들 정(政)이 즉위했는데 그가 바로

시황제(始皇帝)이다.

 

 

여불위 呂不韋



?~BC 235


중국 전국시대 말기 진(秦)나라의 정치가.

허난[河南] 사람이다.

중국 북서부의 많은 인접 국가들 사이에 끼어 있던 진은 그의 유능한 외교 능력 때문에

그의 임기가 끝날 무렵에는 중국 통일이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래 상인 출신이었던 그는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 진의 왕자들 중 왕위계승권을

절대적으로 가지고 있던 자초(子楚)를 매수했다.

그의 첩 중 1명과 자초가 사랑에 빠지게 되자, 그는 이미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돌던 그 첩을 자초에게 주었다.

그는 자초의 아버지 안국군(安國君 : 孝文王)과 화양부인(華陽夫人)의 환심을 사 자초가

태자(太子)로 책봉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한비자 韓非子


?~BC 233.

중국의 법가 철학자.


진왕(秦王) 정(政 : 후의 始皇帝)은 그의 전제정부에 관한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 이를 통일국가의 정치원리로 삼았다.

그의 이름을 따라 한비자로 명명된 그의 저서는 당시 법가 이론의 총괄이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의 약소국이었던 한(韓)나라의 귀족 출신이었다.

한비자는 유가인 순자(筍子)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순자를 저버리고 그당시

봉건체계가 붕괴되는 상황과 보다 밀접한 이론을 가진 다른 학파를 따랐다.

자신의 충고가 한 왕에게 무시당하자 한비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말솜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론에 대해 있을지도 모를 반론에 대한 논박도

글로 썼다.

BC 221년 통일 후 시황제가 된 당시의 진왕 정은 한비자의 글을 읽고 이를 높이 평가했다.

BC 234년 진은 한을 공격했고, 한왕은 한비자를 진에 협상자로서 파견했다.

진왕은 한비자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그에게 높은 직위를 주려고 했다.

진의 승상이자 이전에 한비자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한 이사(李斯)는 한비자가 자신보다

더 뛰어났기 때문에 왕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한비자가 이심(二心)을 가졌다고 모함하여

그를 투옥시켰다.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그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게 했다.

BC 250년 장양왕(莊襄王)으로 즉위한 자초는 그를 상국(相國)으로 임명하고 문신후(文信侯)

에 봉했다.

여불위는 장양왕이 죽고 자기 첩의 아들 영 정이 BC 246년 왕위에 오르고 난 뒤에도

직책을 사임하지 않았다.


BC 238년 어린 황제에 대한 반역 음모에 말려든 그는 파면당하여 자신의 봉지인

허난으로 돌아갔다.

그후 반란을 두려워한 황제가 그를 촉(蜀 : 지금의 쓰촨 성[四川省]) 지방으로 쫓아버리려

하자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고 칭한 영 정은 그가 시작해놓은 중국 통일을 완성하여

통일제국 진(BC 221~206)을 이룩했다.

여불위는 승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수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 학문을 집대성한 책을

만들게 했다.

그결과 최초로 정리되어 나온 방대한 내용의 〈여씨춘추 呂氏春秋〉는 제자 백가의

학설뿐만 아니라 민간전설·민간요법·도교 등에 관한 개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