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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처럼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 성(姓)은 '박', 세상을 밝게 한다 해 이름은 '혁거세'라 했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박혁거세의 탄생신화다. ◇신라의 모태 '사로국' 지금으로부터 1800여년 전 경주 일대에는 '사로국'이란 조그만 나라가 있었다. 진한·변한·마한 중 진한에 속한 12개 소국 가운데 하나였던 사로국은 훗날 '신라'의 모태가 된다. 사로국은 3세기 중반부터 주변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며 진한에서 맹주가 됐고, 503년 지증왕 때 나라 이름을 신라로 바꿨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사로국 건국 관련기사는 기원전 1세기경에 사로지역에서 각기 촌장 중심으로 지배돼 오던 6개 정치집단이 혁거세계의 새로운 지배세력의 등장으로 하나의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통합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로국의 중심지인 경주는 일찍부터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취락이 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주의 지리적 환경에서도 알 수 있다. 경주는 북쪽에 태백산맥에서 뻗어내린 마북·비학·성현·북형·사라·금강산 등이 이어져 있다. 서쪽에는 주산사·단석산·운문령 등이 낙동강 유역과 형산강·태화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동남쪽으로는 화산·추령·토함산·치술령·금오산 등이 둘러싸고 있다. 또 울산시 백운산에서 발원해 주변의 모량천, 대천, 교문천, 알천, 현곡천 등의 지류들을 흡수한 형산강은 비옥하고 관개에 유리한 경주평야를 동서쪽으로 길게 만들었다. 특히 대륙과 해안을 통한 외부와의 교통이 용이해 선진문물을 일찍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에 우수한 문화를 가진 집단의 이주와 함께 정치적 성장이 빨라지게 됐다. 사로국은 6촌 세력의 통합과 동해안을 통해 탈해집단의 이주와 형산강 상류인 경주의 남쪽지역을 쉽게 확보했다. 삼국사기의 파사왕조 기사 등에 따르면 102년 진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압독국과 함께 경주 안강지역에 위치한 음즙벌국이 가장 먼저 사로국에 편입됐다. 사로국은 왜 음즙벌국을 가장 먼저 편입했을까. 사로국 성장과 대외진출 과정에서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음즙벌국이 위치한 안강은 형산강이 안계천·옥산천·왕산천 등과 합류하는 곳이다. 경주분지와 더불어 형산강 최대의 충적평야를 이루고 있어, 식량자원 확보 뿐만 아니라 외부와의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사로국은 음즙벌국을 편입함으로써 진한의 다른 고대국가보다 일찍 강력한 정치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주변 소국을 정복하고, 그 지배층을 경주로 이주시켜 사로국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택해 진한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다. 사로국 당시의 주거환경에 관한 내용도 고문서를 통해 알수 있다. 위략의 배송지 주석에는 '그 나라의 집짓기는 통나무를 옆으로 포개 올려서 흡사 뇌옥과 같은 데가 있다(其國作屋橫累木爲之有似牢獄也)'고 설명한다. 이는 하층민의 주거지인 귀틀집의 형상을 표현한 것이지만, 이 밖에도 초옥이나 움집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상층민은 고급주택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분이사금기 4년조에 '4월 태풍이 불어 지붕의 기왓장을 날렸다(四月 大風飛屋瓦)'는 문구가 나오는 것으로 볼 때 나무로 기둥과 처마를 하고, 기와로 지붕을 덮은 고급주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철검의 나라 사로국 사로국은 지금의 포항, 울산, 울주군 언양, 영천 등 4곳의 교차점에 위치해 동해안과 경북 내륙지역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였다. 내륙 및 인근 중국, 일본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로국은 당초 진한의 중심 소국에 들지 못했다. 그러나 왕실이 점차 통합돼 권력이 강화되면서 3세기 후반부터 강자로 부상했다. 이 같은 힘의 원동력은 충적평야를 바탕으로 한 식량자원 확보와 함께,
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사로국이 강성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울산 달천광산에서 채취한 철광석을 다루는 제련기술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 '주몽'에서 야철대장이 강철검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연구를 했던 것처럼, 당시 제련기술은 지금의 반도체 생산기술과 맞먹을 정도로 중요한 국가 핵심기술이라고 덧붙였다. 삼한시대 철광석과 토탄을 캔 곳이 바로 울산시 북구 달천동 달천광산이다. 중국의 고서인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한·예·왜가 이곳에서 철을 가져갔다는 기록이 있다. 사로국은 철 제련기술을 통해 군사력을 강화했고, 철로 된 농기계를 생산해 농경사회를 발전시켰다. 이 때문에 주변 국가뿐만 아니라 먼 나라와도 교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달천 토철광산에서 가장 가까운 쇠부리터(쇠를 녹이고 다뤄 가공하는 제철작업 장소)는 경남과 경북의 경계지점인 경주시 월성군 외동읍 녹동리에 있다. 또 경주 황성동에서 발견된 쇠부리터 유적의 철 원산지가 달천이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이를 반영하듯 1995년 발굴된 경주 사라리 130호 고분군에서는 판상철부와 세형철기 등 다양한 철 제품이 출토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사라리 130호 고분군의 축조시기를 기원후 1세기 중후반에서 2세기 초로 보고 있다. # 사라리 130호묘 2세기 전후 지역 수장의 무덤 추정 劍·鏡·玉 등 200여점 유물 쏟아져 "사로국 연구에 가장 중요한 유적" 19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경주시 서면 사라리에서 132기의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됐다. 이곳에서 수습된 유물만 2천여점. 이 중에서 130호 묘는 학계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2세기 전후의 것으로 보이는 무덤에서는 당시 권세의 상징인 검(劍)·경(鏡)·옥(玉) 등 부장품을 비롯해 청동기 51점, 철기 116점 등 모두 200여점의 유물이 수습됐다. 또 당시 부의 척도인 길이 27~28㎝ 크기의 판상철부(판모양 철도끼) 70여매가 부장된 것으로 드러나, 무덤의 주인이 지역 수장(首長)인 것으로 추정됐다. 부장품 중 손잡이가 달린 세형동검은 학계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사라리 130호 묘에는 2개의 세형동검이 발견됐다. 하나는 관 모서리에 꽂아놓고, 또 다른 하나는 피장자의 시신 옆에 놓아두었다. 뿐만 아니라 무덤에서는 청동손잡이 머리 장식이 달린 철검, 청동팔찌, 호랑이 모양 허리띠 걸쇠인 호형대구, 수정을 잘라 만든 옥 목걸이, 거울 등이 출토됐다. 학계가 사라리 130호 고분에 고고학적 의미를 두는 것은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1~2세기 사로국의 정치·경제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당시 경주를 중심으로 고대국가를 형성했던 사로국의 문화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30호 고분 피장자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로국 전체를 대표하는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사로 6촌 중 하나인 경주손씨 집안의 시조란 주장도 있다. 하지만 사라리 유적은 경주의 중심부가 아닌 영천과의 경계지점인 외곽에 위치해 있다. 학계에서는 3세기라면 사라리가 사로국의 영향권에 있었지만, 1~2세기에는 사로국의 영토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 이에 따라 130호 묘는 사로국이 통일된 국가로 자리잡기 이전에 지역을 담당한 수장의 무덤이란 주장도 있다. 이와 함께 사라리와 영천지역을 묶는 별도의 고대국가가 존재했고, 그 국가의 왕 무덤이란 견해도 있다. 무덤의 주인이 강력한 부와 명예를 가진 집권세력임에는 확실하지만, 그가 사로국의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문화인류학과)는 "사라리 130호는 2세기 전후를 대표하는 무덤이고, 고대국가 사로국을 연구하는데 고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적"이라며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을 통해서도 당시의 집권세력이 예상보다 더 강력한 권력과 부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 ||||||||||||||||
2010-05-26 08:13:51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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