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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역사, 압독국 경북 남부에 위치한 경산시는 현재 대구시의 위성도시이자 교육도시이지만, 2천여년 전 경산과 대구시 시지지역까지 차지했던 진한의 맹주국 중 하나인 압독국(押督國) 혹은 압량국(押梁國)으로 불리던 고대국가의 터전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추정해보면 압독국은 기원전부터 AD. 2세기 사이에 존재했던 나라로 짐작된다. "파사왕이 음집벌국을 멸한 후(서기 102년) 실직과 압독 두 나라 왕도 와서 항복하였다. 그해 겨울 10월(음력)에 복숭아 나무에 꽃이 피었다."(신라본기 파사왕 23년) "봄 정월에 왕이 압독에 행차해 빈궁한 이들을 구휼하고, 3월에 왕이 사로국으로 돌아왔다."(삼국사기 파사왕 27년) 이 부분에서 의문이 생긴다. 왜 아무런 이유없이 압독국이 사로국에 항복했을까. 다양한 추론이 가능하다. 음집벌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압독·실직국이 사로국에 의해 음집벌국이 무참히 파괴되는 것을 보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항복한 것은 아닐까. 어디까지나 기자의 상상일 뿐 압독국이 사라진 이유는 학계의 몫으로 남겨둔다. 사로국에 흡수된 뒤에도 압독국의 지배층은 한동안 세력을 유지했던 것 같다. "겨울 10월(음력)에 압독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병사를 보내 토벌하고, 그 무리를 남쪽 지역으로 옮겼다"(삼국사기 일성이사금 13년) 사로국의 완전한 점령이 아니라, 기존 지배층을 통한 간접관리가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압독국의 반란이 실패한 뒤 사로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물론, 예전보다 더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게 됐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후 압독국은 느슨한 복속 형태로 유지돼오다 신라가 명실상부한 고대왕국의 틀을 갖춘 내물왕(서기 261~284년 재임)때 신라의 영토가 됐다. 압독국을 복속시킨 사로국은 경북 내륙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데 확실한 힘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산의 서쪽으로는 대구, 남쪽으로는 청도, 북쪽으로는 영천까지 어렵지 않게 영토 확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압독국은 동해안과 경북 내륙의 중간에 위치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무역과 교통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사로국은 압독국을 복속시킴으로써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큰 이득을 얻게 된다. 하지만 첨해 이사금(신라 12대 왕·재위 247~261년)이 대구 달벌성을 쌓고 성주(城主)를 임명하는 등 압독국보다는 대구에 더 많은 공을 들이게 된다. 이때부터 압독국의 독자적 행보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압독국은 신라의 압량주로 남았으며, 신라가 삼국통일을 위해 백제 및 고구려와 전쟁을 치를 때 경주 방어와 전투병 훈련기지 역할을 했다. ◆독특한 문화를 가진 압독국 압독국은 다른 진한의 고대국가와 비교해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경산시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제 용무늬 화살통꾸미개'는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다. 이 화려한 용무늬 화살통 장식은 아직 동아시아 어느 곳에서도 확인된 바 없어 학술적으로 매우 큰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또 무덤에서 호화로운 말꾸미개가 다량으로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압독국의
토기 제작기술 또한 가장 앞서면서도 독창적이었다. 압독국에서는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와질토기란 회색도기를 사용했다. 기원후 350년경 압독국 토기는 당시 신라 및 가야토기에서 볼 수 없는 모양과 문양을 갖고 있다. 고대의 토기 제작기술의 핵심은 큰 토기가 얼마나 균형 잡히고, 미적 감각을 갖추고 있는가다. 압독국의 무덤에서 나온 토기 중에는 높이가 1m 넘는 것도 있는데, 오늘날의 기술로도 복원해 내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독특한 것은 토기 제작기술 뿐만 아니다. 압독국만의 순장(殉葬·임금이나 남편의 장사에 신하나 아내를 산 채로 함께 장사지내는 것)도 눈여겨 볼 만하다. 당시 권력자가 얼마나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압독국 권력자의 무덤에서는 주로 시녀나 노예를 순장시킨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출토됐다. 특히 지배자의 지위를 일찍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 아이의 무덤에서는 성인 여성을 순장시킨 것도 나왔다. 일부 무덤에서는 많게는 5명까지 순장한 흔적도 있었다. 이밖에도 임당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철검 등 무기류와 왕관도 있다. 압독국이 세련된 주조기술도 가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세련미와 정교함이 뛰어난 압독국 토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중요한 상품적 가치를 지녔던 것으로 추정되며, 멀리 성주군 선남면 명포리 고분군에서도 출토되었을 정도로 유통망이 넓었다"고 말했다. # 임당동·조영동 고분 '압독국의 전설' 도굴범에 의해 실체로 드러나다 전설과 고문서로만 전해지던 압독국의 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도굴범에 의해서 빛을 보게 된다. 1982년 2월 도굴된 금동관, 순금제 귀고리, 장신구, 은제 허리띠, 금으로 도금된 큰 칼 등 국보급 유물이 해외로 반출되려다 당국에 적발된 것이 계기가 됐다. 경산지역에서 도굴됐다는 근거를 바탕으로 영남대 박물관은 같은해 6월23일부터 영남대 맞은편의 임당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발굴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예상외의 결과가 나왔다. 임당동과 조영동, 압량면 부적리 일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환호와 삼한시대의 마을 터, 못터, 토성 등이 확인됐고 수많은 목관묘와 옹관묘 등 유물이 출토됐다. 학계는 이들 유물을 근거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기록된 내용과 비교한 결과 압독국의 유물임을 확인한 것. 뿐만 아니라 임당동 고분군은 무덤의 크기나 출토유물 등이 다른 고분군을 압도하는 것으로, 신라 마립간기의 사회조직을 연구하는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경주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인 적석목곽묘가 임당동 고분군에서도 발견됨에 따라 경주 사로국 세력이 혼인 또는 상·하관계로 압독국의 후손들을 특별 관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미뤄 볼 때 압독국은 압량벌에서 농사를 짓고 인접부족과 물물교환을 하는 등 나름대로 문명을 일구면서 부족장에 의해 다스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당동 고분군과 함께 발굴된 조영동 고분군(사적 제331호)은 삼한과 삼국시대의 고분군으로, 청동기 후기에서 초기 철기시대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산 임당동 고분군(慶山 林堂洞 古墳群)에서는 81구에 달하는 인골이 나와 삼국시대 이전 고분 발굴사상 최다 기록을 세웠다. 다음해 2월 문공부(지금의 문화재청)는 임당동 고분군이 압독국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사적 제300호로 지정했다. 배운락 임당동 고분군 전시실 관리담당(65)은 "임당·조영동 고분군은 오래전부터 사과나 포도, 복숭아밭이었는데 이런 곳에 고대 유물이 있을지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며 "지금도 일본 관광객들이 자주 찾고 있고, 지난해에만 300여명의 일본 관광객이 임당동 고분군을 찾았다"고 말했다. | |||||||||||||||||||||||||||||||
2010-06-09 08:19:36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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