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사로국의 전략적 전쟁 삼국사기에는 사로국 파사왕이 음집벌국을 멸한 비슷한 시기에 이서국(伊西國)도 항복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이때부터 사로국은 성곽을 축조하고, 군사훈련을 통해 본격적인 정복국가의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보다 앞서 사로국의 탈해왕(57~80년)이 우시산국(울산)과 거칠산국(부산 동래)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의 내용도 있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는 반응이다. 이제 막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가던 사로국의 입장에서는 두 고대국가가 거리상 너무 멀고, 오히려 가야연맹체인 변한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로 인해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초기내용을 학계가 불신하는 대표적 사례로 꼽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경주 안강지역에 위치했던 음집벌국이 사로국과의 외교적 마찰로 멸망했을까. 학계는 파사왕이 정작 문제의 장본인격인 금관국은 그대로 두고, 음집벌국과만 전쟁을 벌인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음집벌국은 남쪽으로 울산·동래로, 또 경주시 서면 천촌리에서 발원한 대천(大川)을 따라서 청도·밀양·창녕을 잇는 낙동강 중류와도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영일만과, 서쪽으로는 영천·대구 등과 통하는 등 사로국의 영토 확장에 있어 반드시 쟁취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 이와 함께 변한의 맹주국인 가야와 정치적 이해관계를 함께한 음집벌국을 복속시킴으로써 가야세력에 대한 실질적 압력을 행사하는 효과를 염두에 둔 전략적 전쟁으로 보고 있다. 사로국이 2~3세기 통합한 고대국가를 살펴보면 고도의 전략이 숨어 있다. 음집벌국과 비슷한 시기에 병합한 이서국은 낙동강 중류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했다. 경산지역에 위치한 압독국은 낙동강을 통해 창녕·고령·성주·구미·대구까지 진출하는 대외 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또 108년에는 가야세력의 영향권에 있던 비지국(창원)과 다벌국(포항시 흥해읍으로 추정), 초팔국(경남 합천으로 추정)을 복속시켰다. 이때부터 사로국은 진한지역의 다른 고대국가보다 경제·정치·군사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 나머지 여러 나라는 5대 파사왕대부터 12대 첨해왕대까지 모두 사로국에 병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로국은 4세기 중반 이후 영역 팽창과 더불어 사라(斯羅)·신로(新盧)·신라(新羅)란 명칭을 쓰다가, 503년(지증왕 4년)에 신라라는 국호를 정식으로 채택했다. 엄밀하게 말해 사로국이란 국호가 쓰인 시기는 신라가 경상도를 석권한 4세기 중반 이전에 경주를 중심으로 한 고대국가이었을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사로국의 정복전략은 유화정책? 사로국이 주변국을 병합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해석해야 할까. 학계는 지금과 같은 완전한 점령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토착세력에 의한 종전의 지배체제를 인정한 일종의 서약에 불과한 불완전한 복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로국도 병합지역에 직접 관리를 파견하지 않고, 기존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체제를 인정해 주었다. 이를 반영하듯 실직국은 파사왕 25년(104년), 압독국은 일성왕 13년(146년)에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서국 또한 3세기 말 유례왕 14년(297년)에 군사를 일으켜 사로국의 금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것은 사로국이 고대국가를 병합하기는 했으나, 완전한 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로국의 위세에 몰리게 된 고대국가의 지배집단이 더 이상 사로국과 대립한 채 경쟁할 수 없게 되자, 군사활동 중지나 조공의 약속 등 일종의 서약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예속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병합지역에 대해 보다 확고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법으로 왕이 병합지역을 직접 찾아 백성을 진정시키는 순무(巡撫)를 행했다. 실제 파사왕은 압독지역을 찾아 3개월이나 머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 상고기의 순행(循行) 기사가 2~3세기에 집중된 것을 볼 때 병합지역 세력의 이탈을 방지하고, 그들의 복속을 더욱 확고히 하자는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추가적인 반란이 예상되는 지역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을 통해 토착세력을 약화시켰다. 해당 지역의 지배세력을 경주로 이주시켜 볼모로 삼는 것과 함께, 복속민을 다른 지역으로 분산시켜 세력 결집을 막는 것이었다. 사로국은
# 신라 오릉 박혁거세 무덤 추정…"사로국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입구에 오릉(五陵)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초기의 왕릉으로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와 알연왕비, 거서간(居西干) 2대 남해차차웅(南海次次雄), 3대 유리이사금(儒理泥師今), 5대 파사이사금(婆娑泥師今) 등 5인의 분묘로 전해지고 있다. 모두 박씨 성을 가진 왕들이다. 사릉(蛇陵)이라고도 한다. 이는 박혁거세가 승하한 지 7일 만에 그 유체(遺體)가 다섯 개로 나눠져 땅에 떨어졌는데, 이를 합장하려 하자 큰 뱀이 나와 방해하므로 그대로 다섯 군데에다 매장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연유됐다. 오릉을 박혁거세의 능으로 생각하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박혁거세왕이 61년 3월에 별세해 사릉에 장사를 지냈으며, 사릉은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던 어느 날 왕은 하늘로 올라갔는데, 7일 뒤에 그 죽은 몸뚱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그러더니 왕후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이들을 함께 장사지내려 했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면서 방해해 오체(五體)를 각각 장사지내 오릉(五陵)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박혁거세의 능이 담암사 또는 담엄사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는데, 두 절은 같은 곳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그러면 담엄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지금 담엄사 위치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오릉의 재실인 숭덕전 앞에 자리한 홍살문의 기둥이 원래는 당간지주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릉의 남쪽에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 절이 바로 담엄사라는 것. 오릉은 봉토분이다. 그 가운데 4기는 원형분이나, 특이하게도 1기는 표형쌍분으로 되어 있다. 가장 높고 큰 제1릉은 서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10m이다. 제2릉은 제1릉의 동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9m. 제2릉의 남쪽에 있는 제3릉의 높이는 약 7.2m로, 원형분 2기가 합쳐진 표형쌍분의 형태를 하고 있다. 제4릉은 제2릉의 북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3.6m. 제5릉은 제4릉의 동남쪽에 있으며, 높이는 약 1.8m이다. 이처럼 5기 가운데 1기는 표형쌍분으로 2인용 무덤이기 때문에 오릉의 실제 피장자는 6인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같은 대형의 원형봉토분이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오릉이 실제로 박혁거세와 다른 세 명의 박씨 왕 무덤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전덕재 경주대 교수(문화재학과)는 "오릉은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이 신궁을 세우기 전까지 즉위식과 매년 계절별로 열리던 제천행사를 지내던 곳"이라며 "학계에서는 혁거세의 무덤이 아니라는 논란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오릉이야말로 사로국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라고 말했다. 임호기자 ◇ 사로국 파사왕 23년(AD 102년). 음집벌국과 실직곡국이 영토분쟁을 두고 파사왕에게 판결을 청했다. 왕은 "금관국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며 그를 불러 물었더니 음집벌국에 속한다 하였다. 왕이 육부에 명해 수로왕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오부가 이찬(사로국의 17등급 중 둘째 위계)을 보내 접대케 했으나, 한 부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냈다. 이에 수로왕이 분노해 노비에게 그 부의 보제를 죽이게 하고 돌아갔다. 파사왕은 그 노비가 음집벌국의 왕인 타추간의 집에 있는 것을 알고, 노비를 내놓으라 했으나 타추간이 거부했다. 파사왕이 음집벌국을 멸했고, 이에 두려움을 느낀 실직·압독국도 파사왕에게 항복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왕 23년조의 내용 중 일부) | ||||||||||||||||
2010-06-02 08:24:53 입력 |
'역사의 숨결 > 역사(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비의 고대왕국 .5] 변한의 맹주국 대가야 (0) | 2010.11.10 |
---|---|
[신비의 고대왕국 .4] 4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압독국 (0) | 2010.11.10 |
[신비의 고대왕국 .2] 사로국의 출현 (0) | 2010.11.10 |
고대국가 건국설화…신라 시조'박혁거세' (0) | 2010.11.10 |
[신비의 고대왕국 .1] 프롤로그 (0) | 2010.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