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7] 사벌국의 흔적을 찾아서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49

[신비의 고대왕국 .7] 사벌국의 흔적을 찾아서
 병풍산 능선따라 늘어선 800여기 고분…옛 영광 간직한 채 말이 없네
 상주 사벌면 일대 위치 → 낙동강 인접 → 비옥한 토지 쌀생산 → 진한 12국 중 가장 부강 → 국가체제 성립
 기록·유적 그리 많지 않아…도굴·농경지 확장 등으로 고분군 파손…사벌국 '국인' 추정 인장마저 분실
1914년 촬영한 병풍산 고분군 전경. 유리 원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14년 촬영한 병풍산 고분군 전경. 유리 원판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북쪽으로 소백산맥이, 동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상주. 어디를 가던 간에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자리해 있어, 상주는 예로부터 경상도의 대표적 곡창지대였다. 이 같은 지리적 배경으로 상주에는 선사시대부터 농경사회가 발달했다. 비옥한 토지로 사람들이 모였고, 다른 지역보다 일찍 부족국가가 형성될 수 있었다.


#농업으로 부흥한 사벌

삼한시대에 상주를 호령했던 고대국가 사벌국(沙伐國).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사로국의 이야기가 최초로 등장한다. "첨해왕(沾解王) 3년(249년) 장군 석우로(昔于老)가 사벌국을 멸해 신라에 복속시켰다. 같은해 사벌국이 갑자기 백제에 귀속되자, 다시 석우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멸했다"고 한다. 한편 지리지(地理志)에서는 이때 사벌국을 정복한 신라가 행정관청인 주(州)를 설치했다고 전한다. 사벌국을 두 번이나 정벌한 석우로는 신라 10대 내해왕의 아들로 249년 왜구를 막다 전사했다. 이뿐이다. 더 이상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그렇다면 사벌국은 어떤 나라였고, 영향권은 어디까지였을까. 당시의 주변환경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농업이 번성한 나라였다는 정도뿐이다. 그리고 유적 등을 통해 사벌국의 중심지가 상주시 낙상동, 사벌면 금흔리 성안산, 화달리의 둔진산, 소산 등 남북 1.7㎞, 동서 2.2㎞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학계에서는 최대 영역권을 상주 외서·은척면, 문경 산양·영순·산북면, 예천군까지로 보고 있지만 논란이 적지 않다.

사벌국은 낙동강과 인접해 비옥한 평야에서 생산한 쌀과 다양한 농산물을 주변국가와 교역해 경제적 부를 쌓아, 진한 12국(기원 전후부터 4세기경에 지금의 대구·경주 지역에 분포한 12개의 소국) 중 가장 부강한 나라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고학계는 사벌국이 부족국가형태에서 멸망까지의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에서 4세기대로 보고 있다. 또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과 낙랑군의 성립 등 불안정한 국제정세가 농경사회를 '사벌국'이라는 국가체제로 발전시키는 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벌국은 신라에 패망한 뒤에도 삼국통일이 이뤄지기까지 전략적 요충지였다. 뿐만 아니라 경상도의 중요 곡창지 중 하나였던 사벌주는 경제·정치적으로도 수도인 경주와 버금가는 대세력집단이 존재했음을 짐작게 한다.

신라는 1세기 후반에 부산·울산으로 진출하고, 가야와 항쟁하고 2세기 초반에는 실직국 등 동해안 일대를 공략하며 본국(本國)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여기에다 백제와 맞닿아 있는 사벌국을 복속시킴으로써, 백두대간 이북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신라 제14대 유례왕(재위 284∼298) 10년 사벌주의 부유한 민가 80여호를 사도성으로 옮겼다는 내용을 보면 신라에 편입된 후에도 상당기간 토착세력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라져가는 흔적들

고문헌뿐만 아니라 유적에서도 사벌국을 증명할 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나마 사벌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병풍산이다. 병풍산 정상에는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머물렀다는 토석 혼축의 병풍산성(또는 아자개성)이 있고, 산 능선을 따라 800기가 넘는 대형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고분 대부분은 수풀에 뒤덮이고, 도굴되면서 전문가가 아니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다.
새꼭지 뚜껑 항아리2
새꼭지 뚜껑 항아리
긴목항아리·말모양 허리띠고리3
긴목항아리·말모양 허리띠고리
4
신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긴칼 (상주박물관 제공)5
신흥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긴칼 (상주박물관 제공)
병풍산성의 특징은 두 개의 봉우리를 연결, 가운데 골짜기를 막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성벽내부는 흙을 채우고, 외곽은 어른 머리만한 돌로 쌓았다. 전체 길이가 1천700m인 산성 외곽은 1천900년 전의 웅장했던 사벌국의 모습을 가늠키에 충분했다. 산성내부에는 당시 건물들을 짓기 위해 만든 주춧돌 10여개가 남아 있다.

병풍산과 사벌국의 연관성을 알 수 있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병풍산 밑에 사벌국 고성이 있고, 신라 말 후백제 왕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가 이 성에 웅거했다. 사벌국(지금의 병풍산 일대)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곳에는 직경이 10~20m에 이르는 대형 고분이 13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고"고 전한다.

병풍산에서 직선거리로 2㎞가량 떨어진 사벌면 금흔리 성안산에는 상주에서 가장 오래된 이부곡토성이 자리하고 있다. 사벌국과 그 이전의 강대한 세력들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정상(해발 170m)에 위치한 이부곡토성은 구릉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경사면계곡을 U자 형으로 감싸안은 모습이다. 특히 정상에서는 상주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성 아래에 동천과 병성천이 감싸고 돌아 자연적인 방어선이 구축돼 있어, 사벌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추정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재는 2∼3m높이의 토성 흔적만 몇 곳 남아있을 뿐이다. 문제는 사벌국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고분 등 수많은 유적이 일제시대 도굴과 농경지 확대 등으로 대부분 파손되고 있다는 것이다. 1957년 상주시 은척면 하흘리에서 사벌국의 국인으로 추정되는 인장이 발견됐지만 서울로 감정을 보내는 과정에서 분실됐고, 예천군의 사벌왕비릉주변에서 발견된 지석도 사라졌다.

김상호 상주시청 담당은 "병풍산성 일대에서 출토된 금관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며 "이 금관은 경주 이외의 지역에서 출토된 어떤 왕관보다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고 말했다. 또 "그 형식이 경주에서 출토된 왕관과 같은 것으로 미뤄보건대 아마도 사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국력의 창출지였고, 삼국통일 이후에도 왕경에 버금가는 신라 최대의 도시였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 전사벌 왕릉의 전설
신라 경명왕의 둘째? 아니면 사벌국 왕릉?

상주 사벌면과 상주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병풍산. 이곳에서 시골길을 따라 2㎞가량 가면 둔진산 남쪽 기슭인 사벌면 화달리에 높이 4.5m, 폭 16m규모의 거대한 고분이 나타난다.

고분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삼층석탑과 상산박씨 문중의 재실 등이 있는 것 만으로도 고대왕릉이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바로 전 사벌왕릉(傳 沙伐王陵)이다. 이 왕릉의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전(傳) 사벌왕릉은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다만 두가지 전설을 통해 사벌왕릉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하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옛 사벌국의 성이 병성산(병풍산)에 있고, 이 성의 곁에 있는 언덕에 우뚝하게 솟은 고분이 사벌왕릉"이라고 전해진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54대 경명왕의 다섯 번째 왕자 박언창이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됐으나 백제의 공격으로 고립되자 사벌국을 세워 11년간 다스리다 견훤의 침공으로 패망해 묻혔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사벌면 화달리 달천부락에 사벌왕릉이라 칭하는 능이 있으며, 사벌왕은 신라 경명왕의 둘째로서 상산박씨의 비조"라고 기록돼 있다.

2010-06-30 08:14:36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