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8] 황금의 도시 조문국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0

[신비의 고대왕국 .8] 황금의 도시 조문국
 조문국의 전신 '왜(倭)'의 후예…현해탄 건너 일본의 시조가 되다
 풍부한 金·지리적 요충지…2C 신라에 복속…김씨 세력 강화…황금문화 기틀 마련
 기원전 7C 부터 존재…모권제 영향 '왜(倭)'국호 사용…일본왕가 '시조설' 탄생
1960년 의성군 단촌면 탑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신라의 관과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든 새 깃털 모양의 세움장식이 특징이다.
1960년 의성군 단촌면 탑리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은 신라의 관과 전혀 다른 형태로 만든 새 깃털 모양의 세움장식이 특징이다.
조문국(召文國)은 신라가 고대국가로서 틀을 형성하는 영토 확장시기에 병합된 진한 소국(小國·학계에서는 성읍 또는 읍성국가로 표기)중 하나다. 삼한시대 이전부터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근거로 세력을 형성했던 조문국은 지금의 의성 일대를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 했던가. 조문국이 언제 생겨났는지, 그들의 생활상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신라의 아홉번째 왕인 벌휴왕 때(서기 185년)에 복속됐다는 기록만 남아 있다.


#모계 중심의 여왕국

학계에서는 삼한시대 형성된 고대국가가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의 기원을 기원전 7세기로 보고 있다.

향토사학가 박찬 변호사는 "기원전 7세기 김학여왕(金鶴女王)이 개국한 조문국은 당시 모권제(모계 중심)의 영향으로 여왕인(女王人)을 합성한 '왜(倭)'를 국호로 썼다. 그것은 지금의 일본을 가리키는 '왜'와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 일본열도에 '왜'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222년 연나라가 진에 패망한 뒤, 당시 대륙에서 한반도의 왜로 이주한 연의 후예들이 금성면 일대에 근거를 잡았고, 연의 명문(名門)인 소공(召公)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해 기원전 83년 '조문국'으로 개명했다는 것이 박 변호사의 주장이다. 이 같은 주장은 조문국 기록이 남아 있는 역사서가 뒷받침하고 있다. 중국 최고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을 비롯해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역사가 반고(班固)가 저술한 전한서(前漢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산해경에 기술된 왜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조문국의 전신이며, 일본열도의 왜국은 삼한시대 마한왕이 삼한을 통치하던 당시 신천지인 일본 열도로 건너간 한반도 왜의 후예들이 세운 일본왕가의 시조라는 것.

이 같은 관계는 김부식이 집필한 삼국사기 제2권 '신라본기이(新羅本紀二)'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기록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이(亞馬台國·일본 규슈 일대에 자리했던 고대국가)를 세운 조문국 왕손 스사노오노미코도는 173년 모국인 조문국과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 231년 조문국 왕자 김효가 세운 감문국을 신라가 정복하자, 히메고 여왕이 232년과 233년 두차례에 걸쳐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들을 정리하면 조문국은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82년까지 국호를 왜로 쓰다가 조문국으로 개명했으며, 그 후 일본열도로 건너간 조문국 왕손이 일본의 국호를 왜로 활용하는 등 깊은 관계였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조문국은 왜에서 국명을 바꾼 뒤 757년 신라에 의해 문소군(聞韶郡)으로 격하돼 상주(尙州)에 편입되기까지 1천400여년간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한 셈이다.


#신라 황금문화의 발원지

조문국이 국가의 틀을 형성할 시기에는 김천의 감문국, 경산의 압독국, 경주의 사로국, 상주의 사벌국, 청도의 이서국, 울릉의 우산국 등 다양한 소국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향토사학계는 조문국에 대해 '신라의 통치권에 흡수된 여타의 소국과 명백히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라 최장의 왕조를 형성했던 김(金)씨 세력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점을 근거로 한다. 지대한 영향력이란 것은 바로 금(金)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금은 어느 시대, 어느 왕조를 막론하고 국가를 유지하는 핵심요소였다.

당시 의성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상주 일대는 금 생산지가 많았고, 이 일대를 장악할 경우 군사·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신라는 고대국가의 틀을 갖추자마자, 조문국 정벌에
1960년 탑리고분에서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금동신발.2
1960년 탑리고분에서 금동관과 함께 출토된 금동신발.
의성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다른 지역의 토기와 구분될 정도로 뚜렷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목짧은항아리 등이다. 사진은 목긴항아리(왼쪽)와 그릇 받침.3
의성지역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다른 지역의 토기와 구분될 정도로 뚜렷한 특징을 많이 가지고 있다.이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굽다리접시, 목긴항아리, 목짧은항아리 등이다. 사진은 목긴항아리(왼쪽)와 그릇 받침.
400여년 전 조문국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봉분이 조성된 경덕왕릉.4
400여년 전 조문국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봉분이 조성된 경덕왕릉.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실시된 지질조사에서도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를 뒷받침하는 금광이 경주 인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반면, 금성면을 중심으로 안동·예천·상주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신라 최장의 왕조를 형성했던 김씨 세력에 조문국이 가지는 의미는 신라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하는 데 튼실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왕가의 발원지인 셈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조문국은 고대 신라가 만들어낸 찬란한 황금문화의 기틀이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지리적으로도 금성면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 의성은 경북 북부 내륙지역이었으나,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4~6세기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 금성산 고분군 정상에서 바라본 주위 풍경은 누가 봐도 한 눈에 교통 요충지임을 짐작케 한다.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듯 당시 신라는 의성지역에 소경(小京)을 설치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는 기록이 있다. 소경은 국왕이 사는 왕경에 대응되는 '작은 서울'이란 의미로, 그만큼 신라가 조문국 즉 금성지역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1960년대부터 네차례에 거친 문화재 발굴과정에서 그 의미는 충분히 검증되고 있다. 김씨의 표지묘제인 적석목곽분이 상당히 많이 조성된 것이 그 사례다. 더불어 올해 초부터 발굴이 진행 중인 조문국 사적지 내 고분(대리리 2호분)에서도 적석목곽분 3기가 발견됐다. 그만큼 김씨 세력이 의성지역에 대한 중요성과 장악 의지를 여실히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문국의 복속은 김씨 왕조는 물론, 신라사에서도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학계와 향토사학계의 논쟁…소문국? 고대부터 전해오는 명칭은 조문국!

'조문국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에 의해 정벌됐다.' 현재 국내 역사서에서 확인된 조문국에 대한 기록은 이같이 삼국사기에 기록된 단 한 줄이 전부다.

그러나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은 결코 정벌되지도 멸망 당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며 "그것은 발굴된 토기가 신라와 전혀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어, 학계가 '의성양식 토기'로 명명한 데서 잘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당시 교통여건 등을 감안할 때 '정벌'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일 뿐, 관리가 상주하면서 지역을 완벽히 통치하는 개념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정벌이 이뤄졌을 경우 그 지역의 호족 또는 새로운 인물을 내세워 간접적인 통치가 이뤄졌으며, 그 시대의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환두대도나 금동관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주장이다.

이밖에도 향토사학자들과 학계의 주장은 곳곳에서 극명하게 엇갈린다.

태봉산이 경덕왕릉이냐, 경덕왕 태실이냐는 논쟁과 같이 표기에 있어서도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 학계는 '소문국'으로 말한다. 학계에서는 연개소문 장군이 연개금이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려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소문'은 금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신라의 수도 경주 인근에서는 당시 찬란한 황금문화 유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금광의 흔적이 없고, 의성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에서 금광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신라 최후의 승자인 김씨 세력은 조문국 복속으로 확보한 금·은을 발판으로 급성장이 가능했기에 나라 이름이 금을 의미하는 소문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향토사학자들은 "학계의 표기는 단순히 한자음에서 출발하는 음가를 확대 유추해석한 것으로, 고대부터 전승되어 온 명칭은 조문국"이라고 잘라 말한다. 따라서 지역을 대변하는 향토지 영남일보는 향토사학자들의 주장과 같이 조문국으로 표기하고 있다.
2010-07-14 08:27:16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