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6] 동아시아를 호령한 대가야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48

[신비의 고대왕국 .6] 동아시아를 호령한 대가야
 찬란했던 대가야 흥망성쇠의 역사
금 귀걸이
귀걸이
달이 차면 기울듯 멸망이라는 역사적 종결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대가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반로국에서 출발해 고대 철기시대를 주도했고 찬란한 토기문화를 꽃피웠지만, 패자인 대가야의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의 유물과 유적으로 그 화려함을 추측할 뿐이다. 천재 악성 우륵은 왜 대가야를 저버리고 신라를 택했으며, 고구려·백제·신라와 대적할 정도로 막강했던 대가야는 왜 신라에 힘없이 쓰러졌을까.


#대가야의 전성기

고구려 남정→금관가야 쇠퇴→대가야 세력 확장→철 유통 중심지로 부흥→倭 넘어 남조와도 교류

농업과 철 생산을 통해 완만한 성장을 하던 가라국은 4세기 후반 백제의 가야 진출과 내부적 발전으로 가야사의 전면에 조금씩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가야사회에 큰 변화를 주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광개토왕의 고구려 남정(南征)이다. 당시 금관가야·백제·왜(倭)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했다. 이에 신라왕은 직접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이끌고 금관가야·백제·왜(倭) 연합군을 물리쳤다. 또 종벌성(금관가야 내에 있는 성으로 추정)에서 금관가야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사건은 한반도의 정세를 급변시켰다. 고구려의 강력한 라이벌이던 백제는 전쟁에 국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함으로써 경쟁구도에서 뒤처지게 됐다. 또 직접적인 피해를 본 금관가야도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이로 인해 금관가야(金官伽倻·지금의 김해), 아라가야(阿羅伽倻·함안), 대가야(大伽倻·고령), 소가야(小伽倻·고성), 고령가야(古寧伽倻·함창), 성산가야(星山伽倻·성주)로 구성된 가야사회에서 맹주국 역할을 하던 금관가야는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됐다. 반면 고구려의 직접적인 피해를 보지 않은 대가야는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키면서 후기 가야연맹체를 주도했다.

철의 생산과 유통, 야철기술은 곧 경제적 부나 정치적 위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척도였다. 특히 철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탓에 육로보다는 수로가 이용될 수밖에 없는 성격을 지녔다. 대가야는 바다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낙동강 어귀에 위치해 있었다. 낙동강은 동해안남해안을 이어주고, 또 바다 건너 왜와도 교류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를 통해 대가야의 낙동강변은 내륙지역에서 생산된 철의 집산지로 기능하는 동시에, 낙랑이나 대방·한·예·왜를 대상으로 한 철 유통 중심지로도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지금의 홍콩과 같이 중계 무역기지로서 엄청난 경제적 부를 축적하지 않았을까.

이같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가라국왕 하지는 479년 중국 남제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추진했다. 당시 가라국의 사신 파견은 국제사회에 큰 의미를 남겼다. 4세기 국가 형태를 갖춘 신라조차 중국 남조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6세기 초가 되어서의 일이고, 단독이 아니라 백제 사신을 따라 파견한 것이었다.

당시 대가야의 권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는 고령군 주산을 뒤덮은 지산동 고분군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고령군이 '지산동 고분군 종합정비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정밀 지표조사를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재)대동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육안으로 확인된 고분만 704기로 나타났다.


#대가야의 멸망

5C고구려 남하→親신라·백제 정책→532년 금관가야 멸망→554년 관산성 전투敗→562년 신라에 멸망

5세기 가라국에서 이름을 바꾼 대가야는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주변국의 정세 때문에 적지않은 고통을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마저 전사하는 등 백제는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이와 함께 신라는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5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고구려의 위협을 받게 됐다. 5세기에 지속적으로 진행된 고구려의 남하정책은 신라와 백제 사이에 '나·제동맹'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처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대가야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됐다. 결국 생존을 위해 한반도 이외의 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대가야는 중국과는 물론, 일본과의 교역도 활발히 추진했다. 일본 열도 각지에서 5세기 이후 대가야 계통의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됐다. 특히 6세기 전반 대가야 계통의 유물이 서일본 전역에서 출토됐다.
대가야는 520여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사로국과 더불어 삼한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진·변한의 대표적 맹주국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고령군 주산에 수백개의 고분이 당시의 강력했던 대가야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영남일보 DB>2
대가야는 520여년간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사로국과 더불어 삼한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진·변한의 대표적 맹주국이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고령군 주산에 수백개의 고분이 당시의 강력했던 대가야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영남일보 DB>
30년만에 발굴조사가 재개된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의 항공 사진. 발굴조사 때 원형보존을 위해 방패연살 모양의 통로를 설치했다. (영남일보 DB)3
30년만에 발굴조사가 재개된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의 항공 사진. 발굴조사 때 원형보존을 위해 방패연살 모양의 통로를 설치했다. (영남일보 DB)
대왕명 뚜껑있는 긴목 항아리4
대왕명 뚜껑있는 긴목 항아리
바리모양 그릇받침5
바리모양 그릇받침
이는 야마토정권을 매개로 하지 않는 지역 호족과 대가야간의 독자적인 교역 루트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될 정도로, 활발했던 일본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대가야는 6세기에 접어들어 이같은 외교적 자신감과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친(親)백제 및 친신라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백제 및 신라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 백제와 섬진강 유역의 주도권을 놓고 격전을 벌인 뒤 대가야의 이뇌왕은 신라 비조부의 여동생과 결혼해 월광태자를 낳는 결혼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신라는 529년 복식 문제를 빌미로 결혼동맹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 신라로서는 낙동강 유역에 진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대가야와의 결별은 예견된 일이었다. 결혼동맹 파탄 이후 대가야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황이 지속됐다. 여기에다 532년 김해에 위치한 금관가야를 비롯한 가야계의 일부 국가가 신라에 복속되자, 대가야는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신라와 마주하게 됐다. 대가야는 다시금 백제, 신라 두 나라의 틈바구니 속에서 화친을 시도하는 등 자구책을 모색하게 됐다.

대가야 멸망의 전주곡은 관산성 전투였다. 554년 백제 성왕은 대가야의 대군과 연합으로 신라에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관산성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관산성 전투 결과, 백제 성왕과 병사 2만9천600명이 목숨을 잃는 대패를 당하게 됐다. 당시 백제왕이 직접 전투에 출전하고 3만명에 육박하는 병사들이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볼 때 백제와 대가야는 국가적 운명을 걸고 전투를 벌였다.

여기에 참여한 대가야 병사의 숫자를 알 수 없지만, 백제 병력 못지않은 수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이 전쟁에서 백제와 대가야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타를, 신라는 대가야를 완전히 복속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됐다. 이후 신라는 지금의 창녕·상주·김천에 행정관청을 두고, 대가야를 압박하다 562년 9월 가야가 반란을 도모한다는 빌미로 멸망시켰다.


#대가야 지산동 고분군

무덤 704기 확인…1만기 넘는 고분 존재

대가야의 옛 터인 고령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왕과 집권세력의 무덤이 밀집된 지산동 고분군이다.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대가천과 서쪽에서 흘러 오는 안림천이 합류하는 고령 서쪽에 위치한 주산(해발 311m). 정상에는 바닥 지름이 20m 넘는 무덤 5기를 비롯해 봉토가 확인된 무덤만 704기. 학계는 지산동 고분군은 하나의 봉분에 여러 명을 매장하는 방식을 쓴 데다, 이미 봉분이 완전히 없어진 고분이 더 많기 때문에 이 일대를 발굴하면 1만기가 넘는 고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신종환 대가야박물관장은 "특이한 것은 주산 정상으로 갈수록 고분의 규모는 커지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작아진다"며 "고분은 아래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위쪽으로 갈수록 말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562년 신라 장군 이사부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대가야의 세력이 말기로 갈수록 커졌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 가운데 직경 20m의 47호 고분은 금림왕릉(錦林王陵)으로 구전되고 있다. 국보 138호인 가야금관을 비롯한 6천500여점의 유물이 이 곳에서 출토됐다.

또 44호 고분에는 32개의 순장곽에 36명이 순장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순장 무덤이다. 순장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처럼 삶이 지속된다는 계세(繼世)사상에서 행해졌다. 이는 대가야의 왕권이 얼마나 강했으며,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왕과 함께 순장됐던 순장자의 신분과 나이도 다양하다. 8세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할아버지까지, 시녀에서 호위무사까지. 그러나 순장된 이들은 자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강제로 죽임을 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시신에는 두개골에 구멍이 나 있어지만, 이것이 타살에 의한 흔적인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산동 44호 고분은 구릉 꼭대기에서부터 열을 지어 늘어선 5개 대형 고분 가운데 남쪽으로 100m 정도 떨어진 경사면에 솟아 있다. 봉분 지름 27m, 높이 6m로 가실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산동 고분군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44호 고분을 본떠 만든 '대가야 왕릉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총 904㎡(274평)의 전시관은 발굴 당시 무덤 내부를 그대로 재연해 놨다.

2010-06-23 08:06:36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