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9] 조문국과 일본, 그리고 백제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1

[신비의 고대왕국 .9] 조문국과 일본, 그리고 백제
 백제계보다 200∼300년 앞서 일본 정착…日 왕가의 시조는 조문국
나라시대 수도로서 74년간 8명의 천황이 살았던 궁터인 편성경지(아래 쪽)와 복원을 마친 궁. 철도공사를 하던 중 나라현 서남쪽에서 발견된 이 궁터는 현재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며, 방문 당시 천도 13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나라시대 수도로서 74년간 8명의 천황이 살았던 궁터인 편성경지(아래 쪽)와 복원을 마친 궁. 철도공사를 하던 중 나라현 서남쪽에서 발견된 이 궁터는 현재도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며, 방문 당시 천도 1300년을 기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학계가 보는 시각

"조문국(召文國)은 왜의 뿌리이고, 일본천황가(日本天皇家)의 시조국입니다."

지난해 6월 의성청소년센터 대강당에서 조문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한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신태하 조문국박물관건립추진 범군민연대 공동대표는 주제발표를 통해 조문국과 일본천황가의 깊은 연계성을 주장했다. 지역 향토사학자인 박찬 변호사가 발간한 책을 근거로 한 이같은 주장은 그동안 학계의 정설로 인정받던 '일본 천황가의 뿌리는 백제'란 주장을 뒤엎는 것이었다. 그것도 백제의 일본 진출보다 200~300년이나 앞섰다는 것.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도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고대 읍성국가 조문국이 정말 일본의 모태였을까?

5C이후 백제와 밀접한 관계…황제 교체할 정도 영향력 행사…백제계 근거지 아스카에 왕궁 → "백제가 시조"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일본천황가의 시조는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도래인이며, 이들은 백제 또는 가야계'란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듯 학계 역시 '일본이 가야 전성기에는 가야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5세기 이후부터 백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 보편적 시각이다.

각종 문헌에 드러난 사례에서도 백제와 일본 열도의 관계가 밀접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백제계 도래인은 일본 황제를 교체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왕자를 일본으로 보냈다는 내용이 여러 차례 언급돼 있다. 서기 285년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왕인박사를 비롯,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7세기 전반의 아스카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 열도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센카천황(재위 535~539년) 당시 백제계의 근거지이자 세력의 중심지였던 아스카에 왕궁을 지은 것과 일본으로 이주한 백제인 역시 '왜'란 성씨를 종종 사용한 점 등은 백제와 일본천황가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편적인 사례로 꼽힌다.

또 학계에서는 "백제본기에서 왜와 관련된 기록을 모두 삭제해도 백제본기는 역사서가 되는 반면, 일본서기에서 백제와 연관성이 있는 구절을 모두 삭제할 경우 신(神)들의 이야기만 남는다"는 재미있는 예시를 통해 "백제가 없으면 일본서기도 없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것은 백제와 왜의 관계를 드러내는 중심적 사례로 활용되고 있다.

◇향토사학계의 주장

삼한시대 일본 이주…2∼3C 야마다이국 건국…가야·백제와 교류…왜씨 사용 천황만 24명 → "조문국이 시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학계의 정설을 외면한 채 지역 향토사학계를 중심으로 '일본천황가의 뿌리는 조문국'이란 주장이 굽혀지지 않는 데는 어떠한 근거가 있을까.

우선 조문국의 전신인 한반도의
왜가 가야 또는 백제계 도래인보다 훨씬 앞서 일본 열도에 정착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문국 왕손들은 백제계보다 200~300년 앞선 삼한시대에 일본 열도로 건너가 국가를 세웠다는 것.

실례로 삼국사기에 '조문국 왕손 스사노오노미코도는 그의 아들과 일본으로 건너가 야요이시대(彌生時代) 후기인 2~3세기 무렵 20여개 읍락(邑樂)국가의 연합으로 구성된 야마다이국(亞馬台國)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서기 173년 모국인 조문국과 신라에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서기 231년 조문국 왕자 김효가 세운 감문국을 신라가 정복하자, 히메고 여왕이 서기 232년과 233년 두 차례에 걸쳐 군사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야마다이국은 중국 서진(西晉)시대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왜인조(倭人條)에 그 위치풍속, 위(魏)에 사신을 보내 교류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토대로 하면 서기 2~3세기 무렵, 조문국과 일본 열도로 건너간 조문국 왕손들이 끈끈한 형제애를 나누는 관계를 지속시켰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조문국 왕손이 일본 열도에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진 뒤, 2세기 이후부터 가야와 백제계 도래인들과 문물 및 인적교류를 이뤘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이를 통해 조문국의 집권세력과 일본천황가의 뿌리에 대한 개연성을 확보할 수 있다. 특히 백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쳤던 아스카시대가 훨씬 뒤인 7세기 무렵이란 점에서 일본천황가의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왜'란 성씨의 사용에 대한 해석 역시 다르다. 향토사학자 박찬 변호사는 "일본의 천황가는 주로 '왜'란 성씨를 사용한다. 특히 일본서기와 고지기(高事記·일본천황가의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에서 언급하는 신화시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 야마토정권이 들어서면서 귀족들도 사용했으며, 텐무천황(天武天皇·603~682)까지 왜씨인 천황이 24명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이는 당시 일본천황가가 귀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인 인척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란 것이 박 변호사의 주장이다. 왜란 성씨를 사용한 백제계 도래인들의 경우 일본천황가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해석하기보다, 천황가를 위협할 수 있는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됐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박 변호사는 "서기 668년 제38대 천지천왕(天智天王)이 근강령(近江令·오우미리요우)을 제정하면서 국호를 왜에서 일본, 왕호를 천왕으로 개명했다"면서 "백제보다 훨씬 앞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조문국 후손들에 의해 '왜'란 국명이 사용된 것 등을 감안하면, 일본천왕가의 뿌리는 백제가 아닌 조문국"이라고 주장했다.
2010-07-21 08:11:37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