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5] 변한의 맹주국 대가야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47

[신비의 고대왕국 .5] 변한의 맹주국 대가야
 비옥한 땅·풍부한 철…500여년간 번성
 16명 역대왕의 존재 풍화속에 사라졌나
 3C 鐵 풍부한 야로현 정복, 대가야 '부흥의 역사' 시작
 4C 왕권 강화·신분제 등장, 진·변한 대표 맹주국 부상
 출토 유물 등 존재는 확인, 왕에 대한 기록 전혀 없어
기원후 42년부터 562년까지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가야(大伽倻). 사로국과 더불어 삼한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진·변한의 대표적 맹주국이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王)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의 왕이 대가야 520년을 통치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가야를 통치한 왕의 이름이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대가야에는 두 가지 건국설화가 전한다. 하나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수로왕이 등장하는 난생설화(卵生說話), 나머지 하나는 단군신화와 같은 신의 아들이라는 신화(神話·Mythology)다. 고령에서는 이 중 신화를 대가야의 건국설화로 보고 있다. 조선시대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대가야의 건국신화를 다룬 내용이 남아 있다.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가와 하늘신인 이바가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가 있었다. 그 중 형은 대가야 시조인 뇌질주일(이진아시왕)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뇌질청예(수로왕)가 되었다." 다시 말해 수백년 후 가야연맹체의 핵심이었던 금관가야는 대가야의 동생 격이다.


1∼3C 반로국 → 4C 가라국 → 5C 대가야국 → 562년 대가야 멸망 → 757년 통일신라 고령군

# 대가야의 변천사

◆대가야의 역사 출발점, 반로국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한반도 남부에는 진·변한의 24개 고대국가들이 생겨났다. 삼국지나 삼국사기에는 고령지역의 최초 국가를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또는 반로국(半路國)이라 밝히고 있다. 반로국이란 작은 나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국읍(國邑)과 그 주변에 있는 몇 개의 큰 마을로 이뤄진 읍락(邑落)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천군(天君)이라 불리는 제사장이 사는 특별한 마을도 하나씩 있어 나라의 제사를 담당했다. 당시 사람들은 쇠로 만든 농기구로 주변의 들판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는 쇠로 무기를 만들어 군대의 힘을 키운 뒤 주변의 마을을 하나씩 차지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학계는 반로국의 영역을 지석묘 분포를 근거로 기원후 1~3세기까지 지금의 우곡면 일대를 제외한 고령군 전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석묘 유적은 일정 규모 이상의 정치성을 띤 집단의 존재를, 당시의 유물들은 정치집단의 지배자에 대한 존재와 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반로국의 영역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령군 개진면 반운동 일대의 토광묘군에서는 와질·경질토기와 철기류, 석기류 등이 채집됨으로써 반로국의 등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곳에서는 철부(鐵斧·쇠로 만든 도끼), 철모(鐵帽)·철겸(鐵鎌·낫의 종류) 등이 확인되어 반로국의 철기문화 존재도 확인되고 있다.

기원후 300년이 지나면서 반로국은 더 기름진 농토를 차지하고, 더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또 낙동강 등을 이용한 뱃길로 다른 지역과 활발히 교류하고 국력을 키워 나가면서 가라국(加羅國)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국호를 바꾼 것은 그만큼 집권세력의 권력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로국 시절의 무덤은 나지막한 야산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만든 관에 죽은 사람과 유물을 함께 묻었다. 반면 가라국의 무덤은 길이 5m, 너비 3m, 깊이 1m 정도 되는 깊고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이중의 나무덧널을 설치해 죽은 사람과 많은 유물을 함께 넣었다.

이 작은 나라가 점차 성장해 가라국(加羅國)이라 불리다가 40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해 가야사회를 대표하는 대가야국(大加耶國)이 된다. 그 후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인 757년부터 지금의 이름인 고령군(高靈郡)이 됐다.

대가야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주변지역 세력과의 지역연맹체이다. 이는 변한연맹체라는 큰 틀에서 지리적 근접성이나 경제적 교류 또는 공동의 방어 등을 목적으로 인접한 고대국가들이 형성하는 연맹체를 말한다. 고령군에 위치한 대가야를 중심으로 지금은 이름만 남은 적화국(합천군 야로면 일대로 추정), 가시혜국(고령군 우곡면 일대로 추정), 그리고 성주지역의 세력까지 지역연맹체를 형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업·철로 기초 다진 반로국

경남지역과 인접한 반로국은 어떻게 가라국에서
지산리에서 발굴된 원형 모양 그릇받침.2
지산리에서 발굴된 원형 모양 그릇받침.
굽다리 쇠뿔손잡이 항아리.3
굽다리 쇠뿔손잡이 항아리.
두귀 달린 항아리.4
두귀 달린 항아리.
개진면 반운리 출토 화로모양 토기.5
개진면 반운리 출토 화로모양 토기.
고령군 지산리 32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갑옷과 투구.6
고령군 지산리 32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갑옷과 투구.
대가야로 500년 넘는 오랜 세월동안 독특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학계는 '철'과 '농업'이 강성대국 대가야의 토대를 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령지역의 경지는 남북으로 길게 펼쳐진 고령평야를 중심으로 운수평야, 안림천 유역의 백산평야와 안림평야가 위치해 있다. 이들 평야는 풍부한 수량과 비옥한 토질로 고대 농경사회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자연제방적 하천은 여간해서 범람하지 않았다.

고령지역의 농경지가 얼마나 비옥한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1690~1756년)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에는 "골 바깥 가야천 주변은 논이 아주 기름져서 종자 한 말을 뿌리면 소출이 120~130말이나 된다. 물이 넉넉해 가뭄을 모르고, 또 밭에는 목화가 잘 되어 이 곳을 의식(衣食)의 고장이라 일컫는다"는 말로 고령지역의 농경사회가 얼마나 풍유로웠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농경사회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진 농기구로는 어렵다. 철제 농기구가 있어야 된다는 말이다.

대가야의 부흥을 가져온 것은 바로 3세기 들어 야로현(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의 복속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 반로국은 왜 첩첩산중에 위치한 야로면 일대의 적화국을 습수했을까. 바로 철 때문이었다. 야로(冶爐)라는 지명 자체가 '대장장이'와 '화로'를 뜻하는 것에서도 알수 있듯이 이 곳은 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었다. 한참 후대의 것이지만 야로에서 생산된 철의 양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곳(야로)에는 많은 철이 생산되어 일년에 세공으로 정철 9천500근(5.7t)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야로면 야로2리와 가야면 성기리 야동마을 뒤편에서는 야철지가 확인됐고, 쌍림면 용리 일대에서도 야철유적이 확인됐다.

대가야는 야로지역 등의 철산을 확보, 철제무기를 만들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전의 돌로 만든 농기구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정교한 농구류를 만들어 경제력의 성장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군사·경제적으로 성장한 반로국은 4세기 들어 최고 지배자의 칭호를 '한기'로 개칭한다. 이후 가라국은 합천, 거창, 함양, 산청 등으로 세력을 확대한다. 이 같은 권력 집중화는 왕권 강화로 이어져, 병합한 주변 고대국가의 권력층이 중앙귀족화되는 등 자연스럽게 신분제가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반로국은 가라국에서 대가야로 한 단계 발전하게 된다.


고령엔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나

12만년 전 구석기∼청동기 유물까지 다양하게 발견돼

반로국은 기원후 1~3세기의 고대국가로 추정되지만, 유물이나 문헌자료는 많지 않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령지역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알 수 있다면 고대국가의 성립도 유추할 수 있다고 한다.

고령군 다산면 곽촌·상곡리 일대 낙동강변에서 12만~4만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면석기(多角面石器), 망칫돌, 떼낸석기 등 구석기 유물 10여점이 발견됐다.

특히 고령읍 저전리, 개진면 양전·신안·반운리, 운수면 봉평리, 성산면 박곡리, 우곡면 사촌리 등지에는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또 운수면 신간리에 남아 있는 선돌(청동기시대에 길쭉한 자연석가공해 만든 돌기둥) 등을 통해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령군 지산동 30호분의 개석(蓋石·무덤의 뚜껑돌)에 그려져 있는 바위그림과 쌍림면 산당리의 윷판형 바위그림 및 별자리형 바위구멍 등은 반로국 성립 이전에 그곳에 살았던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신앙생활 흔적도 확인할 수 있다.

학계에서는 낙동강변의 충적대지나 대가천과 안림천 주변을 중심으로 세밀한 발굴작업이 이뤄진다면 철기시대 이전의 다양한 유적을 추가로 발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신종환 대가야박물관 관장은 "반로국의 유적은 극히 적은 편이지만, 그 이전인 구석기 및 청동기 등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은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며 "반로국이 형성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고령에서 살았고, 이들이 점차 정치집단을 형성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고 말했다. 임호기자

협찬 : eride GyeongBuk

2010-06-16 09:04:18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