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0] 조문국이 일본 황실의 시조라는 역사적 근거들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3

[신비의 고대왕국 .10] 조문국이 일본 황실의 시조라는 역사적 근거들
 향토사학계 주장 일본 황실 발원지
 일제강점기 당시 토지조사는 日황실 뿌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왜(倭)란 국호 사용…신라와 전혀 다른 독자적 문화
 한반도 '왜'건국시기 - 日고대사 '신화시대'와 일치
 조선총독부 '조선 고적 보고서' 의성지역 집중 조사
일본천황가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의성군 금성면 소재지와 그 뒤에 자리잡은 금성산이 보인다.
일본천황가의 발원지로 추정되는 의성군 금성면 소재지와 그 뒤에 자리잡은 금성산이 보인다.
고대왕국 조문국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산해경(山海經) △전한서(前漢書)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는 자투리 기록들이 남아있어 조문국의 실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이 역사적 실체 규명조차 불확실한 상황에서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가 "조문국은 일본천황가의 뿌리"라는 주장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그것은 자투리 기록들이 남긴 예사롭지 않은 정황과 함께, 일본천황가의 고대사를 기록한 각종 사서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통감과 한반도에서 남긴 족적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서에 나타난 조문국의 흔적

춘추전국시대 칠웅이었던 연(燕)이 기원전 222년 진에 패망한 것을 서술한 산해경을 살펴보면 한반도에는 개국재(蓋國在), 거연남(鉅燕南), 왜북(倭北), 왜속연(倭屬燕)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에 일본 열도에는 '왜'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향토사학자 박찬 변호사는 "연이 패망한 뒤 남쪽으로 이주한 연의 후예들이 당시 의성지역에 정착해 세력을 키워 연의 명문(名門)인 소공(召公)의 후손임을 내세우기 위해 '조문국'으로 개명했다"고 주장했다. 그 뒤 '왜'란 국명이 일본 열도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같은 추정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의성에서 발견된 왕관(금동관)이다. 특이한 것은 경주에서 발굴된 출(出)자형 금관이나 산(山)자 구도가 아닌, 조우(鳥羽)관이라는 점이다. 바로, 새의 깃털 모양. 조우형은 고구려의 고분에서부터 멀리 중국의 둔황석굴,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 궁전벽화 등에서 주로 발견됐다. 대개는 벽화로 그려졌다. 특히 의성군 금성면 고분군에서 벽화가 아닌 금동관 혹은 금관 형태로 출토돼 당시 역사학계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고분군에서 잇따라 발견된 금동신발, 금제 귀고리, 금동제 과대, 관 장식 등은 조문국이 신라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조문국 그리고 일본의 고대사

특히 일본천황가의 고대사를 기록한 '고지기(高事記) 상권(上卷)'과 '니혼쇼기(日本書紀·이하 일본서기) 일·이권'의 신대(神代)를 살펴보면, 조문국과 일본천황가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 기록들을 통해 조문국이 일본과 혈맹 또는 그 이상의 관계를 형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예가 조문국의 전신인 한반도의 왜가 일본 고대사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 역사서는 천지개혁에서부터 기원전 7세기까지를 천상의 신화시대로 설정하고 있으며, 조문국의 전신인 한반도의 왜가 세워진 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같은 기록들은 1940년(소화 15년) 당시 일본이 본토에서 기원 2600년을 축하하는 대축전을 열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즉, 일본의 개국은 조문국 전신인 한반도의 왜가 세워진 기원전 7세기에 맞춰지고 있다는 대목에 주목할 만 하다. 이를 근거로 박 변호사는 "당시 대축전은 일본 황실이 조문국의 왕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일본서기 신대의 기록 중 신라와 조문국의 국명이 언급되는 신대상권 보검조(神代上卷 寶劍條) 사·오·육의 일서(一書)에는 스사노오노미고도와 그의 아들 이소다게루노가미가 신라의 영토에 있는 소시무리노도고로(曾尸茂梨之處·일본천황가의 발원지), 즉 조문국의 다가마가하라(高天原·일본 신화에서 여러 신이 산다는 하늘)에서 추방당한 신화가 서술돼 있다.

박 변호사는 이 신화의 내용을 '일서에서 말하기를 조문국의 여왕이자 태양신(太陽神)인 아마대라스오우미가미(天照大神·이하 천조대신)의 남동생인 스사노오노미고도는 그 소행이 폭악무도했다. 고천원인 조문국의 왕궁과 사천(四泉), 그리고 분지의 넓은 평원에 있는 천조대신의 왕궁을 부수고, 궁녀를 죽이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 때문에 천조대신은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스사노오노미고도에게 지가라노오기도(千座置戶)의 벌을 내리고, 고천원에서 추방했다. 그래서 스사노오노미고도는 그의 아들 이소다게루노가미와 함께 고천원을 벗어나 한동안 금성산 아래 있는 이즈모현(出雲縣·의성군 금성면 운곡리)에서 살았으며, 그 뒤 영일만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로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을 찾은 김재도 조문국유물되찾기 및 박물관건립추진범군민연대회의 공동대표가 빙혈 입구의 흑석에 새겨진 '조문국과 일본'이란 제목의 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2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을 찾은 김재도 조문국유물되찾기 및 박물관건립추진범군민연대회의 공동대표가 빙혈 입구의 흑석에 새겨진 '조문국과 일본'이란 제목의 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풀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행적

조문국의 흔적은 일본 고대사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 진출한 조선총독부의 행적에서도 확인된다. 박 변호사는 "1908년 일제는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해 고적조사를 겸한 토지조사를 시작했고, 이어 1909년에 공포시행한 민적법은 일본 황실의 조상과 출신지역을 알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례로 1910년 한반도를 강점하기 전부터 일본은 일본서기에 기술된 일본 황실의 발상지인 '소시무리노도고로'와 조상의 출신지를 찾기 위해 한반도 곳곳을 뒤졌다. 그 뒤 조선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데 성공한 일제는 자국의 사학자를 한반도에 투입해 본격적인 고적조사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사학자들이 조사한 내용은 1914년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고적 조사보고서'와 1916~17년 사이 작성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서'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조사에 착수하기 전 '소시무리'를 '소머리산' 또는 '소문(召文)'의 일본식 표기로 해석한 일본 사학자들은 우두현으로 불려진 춘천군(春川郡)과 조문국이 있었던 의성군을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보고, 두 지역을 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례로 그들이 제출한 1차 보고서를 살펴보면 춘천군 우두산과 의성군 조문면(현재 금성면) 고분군을 함께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후 제출된 2차 보고서 자료에는 의성지역의 △산운면 탑리와 학미동 160기 △조문면 대리동 43기 △조문면 초전동 4기 등 모두 207기의 조문국 고분군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다.

당시 1·2차 조사보고서에 드러난 기록만을 두고 본다면, 일본 사학자들은 의성군 조문면 일대를 일본 황실의 발원지로 보고,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했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 조문국의 실체 기술한 微光

의성 춘산면 빙계계곡에 가면

조문국의 음악악기가 있다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의 빙혈 입구 벽면 흑석에는 '조문국과 일본'이란 제목과 조문국의 기원을 기록한 글이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문은 소문에서 나온 이름으로 여권 중심의 나라였다. 귀도(鬼道)와 주술(呪術)을 잘하는 불미구가 왕이 돼 1천년 동안 30대가 이어졌으며, 이때 조문국 왕자가 변한과 왜국으로 넘어가 왕이 되기도….'

이 글은 일제강점기 의성군 산운면(현 금성면) 산운초등 교장이었던 하기시마 교유(荻屠敎雄)란 일본인과 의성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함께 저술한 '미광(微光)'이란 책에서 발췌·정리한 내용 중 일부이다.

1926년 일본어로 발행된 미광은 일제의 수탈이 자행되던 시기에 조문국의 역사적 실체에 놀랐고, 또 안타까워 한 일본인과 지역의 향토사학자들이 뜻을 모아 저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고대 역사서나 고분 등을 통해 조문국의 존재를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전무한 상황에서 주류 사학계가 바라본 조문국은 지역에서 전해지는 전설 또는 설화 정도로 치부될 수 있다.

이같이 현실 속에서 미광은 향토사학자들에게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주목할 대목은 조문국의 '음악'과 '악기'에 대한 기록이다.

김종우 조문국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공동대표는 "'조문국 시대 민요 중 으뜸비봉곡이고, 일본까지 전파됐다. 그 곡조를 타기 위해 독특한 악기를 발명하니 12현의 조문금'이란 내용이 있다"면서 "번역을 하면서 조문국의 문화적 저력이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또 미광에는 조문국 민요 중 영신·송신·비봉곡 등에 대해 '영신곡에서 조문금의 줄이 끊어졌다. 날으는 봉황도 멀리 떠나 갔도다. 또한 송신곡에는 음악소리가 흘러가는 구름과 같이 빨리가는 빛이로다. 옛 조문국을 생각하니 슬프며 잊을 수가 없도다. 날으는 봉황은 훨훨 날아가 그 해는 저물어가니 하늘은 붉었도다. 아름다운 대밭 곁에 손님 없으니 오동나무 꽃도 시들었네. 허전한 구봉산만 남아 있고, 천년 전 생각하니 다시 비봉곡 소리 듣기 어려우리'란 내용이 있다.

현재 조문금은 물론, 조문국의 실체를 명확히 할 수 있는 확고부동한 사료와 유물들이 남겨지지 않은 것이 유감이다.

2010-07-28 08:37:00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