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1]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4

[신비의 고대왕국 .11]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운 조문국
 역사는 조문국의 멸망을 기록했지만…그들만의 역사는 계속되었다
 신라 김씨 왕가의 든든한 금고
현재 대부분 무너져 흔적만 남아 있는 금성산성. 금성산 4~8부 능선을 따라 축성됐으며, 조문국이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의 침공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다.
현재 대부분 무너져 흔적만 남아 있는 금성산성. 금성산 4~8부 능선을 따라 축성됐으며, 조문국이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의 침공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이다.
#조문국은 기원전 7세기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근거지로 고대왕국을 건설한 뒤 진한을 통일한 신라와는 전혀 다른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조문국을 대표하는 '의성양식토기'는 지금의 의성군 금성면을 기점으로 해 남쪽으로는 군위, 서쪽으로는 상주·예천, 북쪽으로는 안동·영주·봉화·청송, 멀게는 충북 제천에서도 발견됐다. 학계는 의성양식토기가 거리상 먼 지역에서도 발견된 것은 낙동강 물길을 따라 전파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독창적 문화뿐만 아니라, 조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도 막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의성을 중심으로 인근의 안동·예천·상주 일대가 금 생산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이렇게 막강한 조문국이 어떻게 한 순간에 신라에 복속됐을까.


금성산 7부 능선에 위치한 금성산성 내 병마훈련장. 조문국이 신라의 침공에 맞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병사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취사 흔적도 발견됐다.


#미광이 기록한 조문국의 최후

184년 사로국 벌휴왕 항복 강요 → 사로국 사신 참살 → 185년 전면전·금성산서 농성 → 조문국 왕 전사·멸망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 조문국의 마지막은 이렇다. '185년 벌휴왕 2년 신라가 이곳을 점령, 소문군(召文郡)을 설치했다.'

하지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향토사료인 '미광(微光)'에는 조문국의 마지막을 좀 더 상세히 다루고 있다. 신라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이 대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로국(신라) 왕에 즉위한 벌휴왕은 조문국이 근래 비상한 세력을 얻게 되자, 사신을 파견해 항복을 강요했다.

이에 조문국 왕은 군신을 회합해 대책을 모의한 뒤 교전하기로 결정하고, 항복을 요구하는 사신 두 명을 참살했다.

크게 화가 난 벌휴왕은 다음해인 185년 2천여명의 장병을 동원해 조문국을 공격했다. 조문국 왕은 금성산 주위에 석성을 구축하고 응전하니 신라의 강한 군사력으로도 쉽게 격파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성내 양식이 점점 줄어들자, 조문국 왕은 묘책을 세웠다. 성내의 작은 산에 볏짚을 쌓아 적으로 하여금 곡물을 많이 저장한 듯 보이게 하고, 또 백토를 물에 타서 넘쳐흐르게 해 쌀뜨물 같이 보여주며 며칠을 버텼다.

그러나 아무리 용사가 많아도 굶주리면서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미광은 '칠일 동안 불꽃 튀는 격전 끝에 패배를 면치 못할 지경에 이르러 결국 왕은 전사하고, 조문국은 드디어 멸망했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미광은 조문국의 적라(현재의 군위) 정벌도 다루고 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나라가 강대하고 평온하자 조문국 경덕왕은 이웃 나라를 정벌할 큰 계획을 세우고, 신하들과 회합을 가졌다. 회합 끝에 김 장군을 선봉으로 삼아 일족 중 29명의 호걸을 데리고 의성 인근의 적라국 토벌에 나설 것을 명했다. 김 장군 등 맹장들은 왕에게 전승치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맹세를 하고, 돌안(현재 의성군 봉양면 도리원)을 지나 적라에 진입해 대파했다. 그 땅을 영지로 확장한 조문국은 더욱 더 강성하게 됐다.'

당시로선 대군인 '2천여명의 신라 군사와 치열한 격전을 치렀다'는 대목과 '적라를 대파했다'는 등의 기록을 통해 조문국이 결코 만만치 않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문국 멸망의 새로운 해석

신라 원거리 간접 통치…토착세력 관리 권한 부여…독자적 문화 유지·발전…"멸망 아닌 새로운 관계 형성"

그렇다면 오랜 세월 강성대국을 이룩한 조문국은 왜 멸망했을까란 의문이 든다.

주류 사학계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조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신라에 멸망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향토사학자와 일부 학자들의 견해는 다르다. 이들은 "특정 집단이 외부의 강력한 세력에 무릎을 꿇어 흡수·통합되는
금성산성 내 봉수대는 정상 부근에 3~4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금성산성 봉수대 발굴현장 모습.2
금성산성 내 봉수대는 정상 부근에 3~4개 정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금성산성 봉수대 발굴현장 모습.
금성산 7부 능선에 위치한 금성산성 내 병마훈련장. 조문국이 신라의 침공에 맞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병사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취사 흔적도 발견됐다.3
금성산 7부 능선에 위치한 금성산성 내 병마훈련장. 조문국이 신라의 침공에 맞서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병사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취사 흔적도 발견됐다.
1995년 당시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1~3호분에서 출토된 은장삼엽모자환두대도. 당시 힘과 권위, 그리고 지배력을 상징하는 이 칼의 품격을 통해 신라 최장의 왕조로 자리잡았던 김씨 세력이 조문국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다.4
1995년 당시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 1~3호분에서 출토된 은장삼엽모자환두대도. 당시 힘과 권위, 그리고 지배력을 상징하는 이 칼의 품격을 통해 신라 최장의 왕조로 자리잡았던 김씨 세력이 조문국에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었는지 알 수 있다.
과정을 통해 완전히 멸망됐다는 전제를 한다면, 조문국의 멸망 역시 이를 뒷받침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5~6세기에 조성된 금성면 일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은 조문국이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신라와 대등한 위치에서 독자적인 토착세력을 바탕으로 지역 특성에 맞는 문화를 계속 유지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 제시되고 있다.

실례로 이 시기에 조성된 고분에서 상당 부분 신라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 발굴되고 있지만, 신라의 금동관과는 다른 형태의 금동관이 출토됐다. 또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토기 역시, 신라와 전혀 다른 형태의 토기(의성양식토기)가 부장품으로 출토됐다.

더구나 교통망과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신라 군사가 금성면 일대에 상주해 해당지역을 직접 통치했을 것'이란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신라가 완전한 통치력을 갖춘 기원후 4~5세기 이전까지는 경주와 먼 거리에 있는 지역의 경우 간접통치를 했다. 실제 상주 사벌국, 경산 압독국 등은 기존 토착세력에 해당지역을 관리토록 하고 권한을 주었다. 또는 토착세력을 경주로 데려와 귀족 대접을 하며, 해당지역의 호족 또는 토호세력에 지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힘과 권위를 인정하는 '칼(환두대도)'을 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했다.

여기에서 조문국은 벌휴왕에 의한 '완벽한 멸망'이 아니라, 신라와 새로운 관계를 형성했다는 가설이 가능해진다.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 나타난 '정벌'이 곧 '멸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조문국과 신라가 대등한 위치에서 정치·경제·문화 등의 교류가 이뤄진 전환점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일신라 주체 김씨세력의 비상…그 이면엔 조문국의 경제력이…

조문국의 복속은 통일신라의 주체인 김씨 세력에 큰 의미를 가진다. 한 발 더 나아가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신라가 조문국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1천년의 신라도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당시 조문국의 지리·환경적 여건을 살펴본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특정 지역에 이주한 집단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토착세력을 제압하고, 왕권까지 장악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때문에 알지로 대표되는 김씨 세력은 신라에 이주·정착한 즉시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 후손인 미추왕에 이르러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신라의 천년 왕조 중에서 가장 오랜 기간 왕실 세력으로 자리잡았던 김씨 세력.

그들에게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문국이 가진 경제력과 입지조건이었다.

금성면을 중심으로 당시 조문국의 영향력이 미쳤던 안동, 예천, 상주 일대가 삼한시대 진한지역의 최대 금 생산지였다. 이곳에서 생산된 금은 신라의 왕권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든든한 금고 역할을 했다.

또 금성면은 경북 북부 내륙이지만,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서 경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현재 조성된 유적지 고분군 정상에서 바라본 주위 풍경은 지리에 어두운 사람이 봐도 한눈에 교통 요충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주보돈 경북대 교수(사학과)는 논문을 통해 "신라가 영남 일원에서 북쪽 방면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교통로는 죽령과 계립령"이라고 했다.

실제로 고분군이 있는 금성면은 안동·영주를 경유하는 죽령과 안계·예천을 경유하는 계립령으로 가는 두 길이 갑령을 넘어 영천 방면으로 향하는 길이 만나는 통로다. 신라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잡지 못하던 김씨 세력이 조문국을 장악함으로써 군사·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비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은 김씨 세력이 신라 최후의 승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기틀을 제공한 왕가의 발원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2010-08-04 08:26:18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