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2] 강력한 군사력 갖춘 고대국가 이서국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5

[신비의 고대왕국 .12] 강력한 군사력 갖춘 고대국가 이서국
 신라의 심장 금성을 공격한 이서국을 아시나요
 이서국의 창 '신라 심장'을 겨누다
대부편이완·영배(방울잔)
대부편이완·영배(방울잔)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나지막한 산이 하나 있다. 농촌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산의 모습이다. 다른 게 있다면 진입로 한쪽에 '이서국 성지'란 글이 적힌 비석이다. 비석의 옆면에는 "신라 유례왕 14년(서기 297년) 금성을 공략하다가 반격을 받아 폐성 함락으로 멸망하였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2천여년 전 청도군 일원에 자리했던 고대국가 이서국(伊西國). 하지만 이서국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멸망과 관련된 내용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막강했던 군사력

신라 금성 공격 → 이서산성 농성 → 보양스님의 묘수로 함락 → 신라와 대등한 강대국 추측


이서국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나라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변·진한 24국 중에서 유일하게 신라를 상대로 전쟁을 수행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있는 고대국가였다는 점이다. 이서국이 신라 14대 유례왕 14년에 금성을 공격했다. 금성이 어떤 곳인가. 당시 신라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진·변한 고대국가들이 선진문물을 접할 수 있는 정신적 수도였다. 이서국과 전투를 벌인 신라는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죽엽군(竹葉軍)'이 아니었다면 함락됐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서국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므로 신라(당시 사로국)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방어했으나, 능히 이를 격파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귀에 댓잎(대나무의 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신라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 뒤 홀연히 사라졌다.'

가정이지만 1713년 전인 297년 죽엽군이 없었고, 이서국의 군사력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역사의 승자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신라를 공격했다 퇴각한 이서국. 반격에 나선 신라. 하지만 이서국을 군사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서국의 멸망과 관련해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전설 하나가 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이서국과 신라는 이서산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신라의 집중적 공격에도 이서산성은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지금의 청도군 화양읍 소라리와 청도읍 송읍리에 걸쳐 축조된 이서산성은 앞으로 청도천이 흐르고, 주변이 절벽으로 이뤄진 천혜의 요새였다. 강력한 군대를 이끄는 신라 유례왕도 장기전으로 돌입하자, 적잖은 부담을 느꼈다. 유례왕은 이서산성에서 멀지않은 운문사로 군사를 철수시킨 뒤, 보양 스님에게 이서산성을 무너뜨릴 묘수를 물어봤다. 이에 보양 스님은 "개란 짐승은 밤에는 잘 지키지만 낮은 지키지 못하고, 앞은 지켜도 뒤는 꺼려 한다. 낮에 북쪽을 공격하라"고 조언했다. 이서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보양 스님의 말대로 했더니 이서산성은 함락됐다.

전설과 고문헌을 통해 알수 있듯 이서국은 신라와 힘겨루기가 가능했던 몇 안되는 강대국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낙동강 중류 요충지

신라 남하 진출로 확충 → 가야 병합계기 마련 … 토착세력 힘 막강 → 중앙서 파견 직접 통치

신라에 있어 이서국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리고 이서국을 멸망시킨 신라가 얻은 이득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해 고고학계에서는 신라가 영토 확장을 하기 위해서는 이서국을 병합하는 것이 핵심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신라가 가장 먼저 대외 진출을 시도한 것은 남부지역. 이는 탈해 집단이 이주해 들어오면서 정착한 근거지가 울산과 동래지역이었는데, 탈해가 왕이 되면서 이들 지역이 자연스럽게 신라의 영토가 됐다. 하지만 남쪽으로는 금관가야가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진출은 불가능하게 된다.

특히 이서국과 파사왕대에 병합된 압독국은 신라가 낙동강 중류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절대적 요충지로 활용됐을 것이다. 사로국이 낙동강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경산대구를 지나는 길과 건천에서 고개를 넘어 청도를 지나는 길이 있는데, 압독국과 이서국을 병합함으로써 이들 통로를 모두 확보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이서국 병합은 신라가 밀양을 거쳐 낙동강 하류 방면과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지석묘군. 청도군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청도천과 동창천을 중심으로 고르게 분포, 삼한시대 이전부터 이곳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2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지석묘군. 청도군에는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가 청도천과 동창천을 중심으로 고르게 분포, 삼한시대 이전부터 이곳에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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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을 거쳐 고령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이를 통해 경남에 집중된 가야세력을 병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백제를 견제할 수 있는 이점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서국을 병합한 뒤 어떤 형태로 지배했을까. 이서국은 신라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지배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지역은 화양읍 진라리 유적에서 청동기시대 후기의 대규모 취락 유적과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치세력이 형성되는 등 토착세력의 힘이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멸망한 뒤에도 기존 토착세력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가졌을 것이고, 신라는 이들의 힘을 빼앗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신라는 이서국을 통치함에 있어 압독국처럼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지배 방식이 아닌,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를 상주시켜 직접 지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재까지 이서국의 왕릉으로 볼 수 있는 고분이나, 금동관과 같은 위세품이 출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추측이 가능하다.



#삼국유사vs삼국사기

42년? 297년? 이서국 최후의 날은 언제였을까

이서국의 멸망을 다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하지만 양대 역사서가 전하는 이서국의 멸망시기는 무려 255년이나 차이가 난다. 이로 인해 고고학계와 향토사학계에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일고 있다.

먼저 고려 인종 23년(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유례왕 14년(297년)에 이서국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므로 신라(당시 사로국)는 크게 군사를 동원해 적을 방어했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 귀에 댓잎(대나무의 잎)을 꽂은 이상한 군사들이 몰려와 신라 병사와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 뒤 홀연히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신라를 도운 군사들은 대나무잎을 귀에 꽂았다고 해 '죽엽군(竹葉軍)'이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대로라면 이서국의 멸망은 분명 297년이다.

하지만 100여년 뒤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의 기록은 좀 다르다. '신라(당시 사로국) 3대 유리왕 14년(37년)에 이서국의 병사들이 금성을 공격했다. 이에 신라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유리왕 18년(42년)에 이서국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어느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느냐를 두고 고고학계와 향토사학계 내부에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청도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신라의 3대 왕인 유리왕(儒理王)과 14대 유례왕(儒禮王)의 왕명이 흡사해 착오를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연스님의 이같은 착오는 삼국유사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고학계에서는 이서국이 유리왕 때 멸망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삼국사기의 유례왕 14년 기사와 삼국유사의 미추왕 죽엽군조의 기사에 금성을 공격한 군대를 옛 '이서고국(伊西古國)'의 군사라고 한 것을 보면 이서국은 이보다 휠씬 전에 사로국에 병합됐다는 주장이다.

이서국과 더불어 비교적 사로국과 가까운 지역에 위치했던 압독국(경산), 음집벌국(안강) 등이 2세기 초 무렵 사로국에 병합됐지만, 약 40년 뒤 다시 모반을 일으켰다가 곧바로 진압된 사례도 있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서국도 사로국이 대외 팽창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던 2세기 초에 압독국과 더불어 병합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점령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체제가 완벽하지 못해 잔존세력이 비교적 강성했던 이서국이 먼훗날 반란을 일으켜 금성까지 공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신라본기 유례왕조의 기사에 '이서고국(옛 이서국)'이란 명칭으로 침공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

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의 출생지가 청도와 가까운 지금의 경산이고, 한때 운문사와 용천사 그리고 말년에는 화산 인각사에서 많은 저술활동을 했으므로 이서국에 관한 내용을 보다 자세히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서국이 멸망한지 2천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스터리로 남은 이서국의 멸망. 그것은 우리 후손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됐다.

2010-08-11 08:20:06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