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4] 전설로 듣는 우산국의 멸망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7

[신비의 고대왕국 .14] 전설로 듣는 우산국의 멸망
 사자바위와 비파산에 얽힌 우산국의 전설
 사랑에 눈 먼 우해왕, 나라를 잃고서야 백성을 걱정했네…
 왕후의 사치로 신라서 노략질 → 신라왕 우산국 토벌 명령 → 이사부 1차 정벌 대패
#3 울릉도//하늘에서 내려다본 울릉도의 전경.
#3 울릉도//하늘에서 내려다본 울릉도의 전경.
울릉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위나라의 위지(魏志)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삼국지 위지동이전 옥저조에 간단한 기록이 전해온다. 이때는 조조, 유비, 관우, 장비, 제갈공명 등 천하영웅들이 위, 촉, 오 삼국을 형성하고 서로 다투던 시기다. '삼국지에 옥저 기로가 말하기를 국인이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일동안 표류해 동쪽의 섬에 도착했다. 그 섬에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그들은 해마다 칠월이 되면 소녀를 선택해 바다에 빠뜨렸다.'(고구려 동천왕 19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512년에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 그러나 우산국은 신라의 완벽한 통제를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등 역사서에서는 고려 초기까지 우산국이 한반도 본토와 조공 관계를 지속하다 930년에야 합병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700여년간 독자적 왕국을 이어갔고, 그로부터 400여년간 한반도 본토의 직접 지배를 받지 않았던 우산국. 그래서일까, 울릉도에는 다른 고대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전설이 남아 있다.

진·변한 고대국가 중 신라와 5가야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더욱이 멸망과정은 삼국사기 등에 아주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우산국은 멸망과정이 전설로 남아 있다. 특히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내용이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우산국왕 '우해'는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리고 와서 왕후의 자리에 앉히고부터는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 사기에만 골몰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별님'이라고 지었다. 우해는 풍미녀 모녀에게만 모든 사랑을 퍼부었다.

그는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을 돌보지 않은 채 멀리 신라까지 가서 노략질을 했다. 신라의 백성들은 이 때문에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줄 것을 여러번 호소했고, 결국 신라왕은 강릉군주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우해왕은 신라가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싸울 준비를 한다. 타고난 요새인 골계(현재 울릉군 서면 남양리)를 승부처로 정한 뒤 바닷가에 방책(防柵)을 세웠다. 이후 수평선에 신라군의 함대가 나타났고, 우산국의 함대는 나가서 맞서 싸웠다.

우산국에 다다른 신라 군사와 우산국 군사들 사이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다. 신라군은 바다를 무대로 살아온 우산국 군선에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신라군은 대부분 육군이었기 때문이다.

패전의 고배를 마시고 하슬라(강릉의 옛 지명)로 돌아간 이사부는 임금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사정했고, 이듬해 그는 군사를 다시 훈련시켜 우산국을 공격했다. 이사부는 싸우기에 앞서 우해왕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지난해 신라군에 이겼던 우해왕은 사신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벤 뒤 싸움을 걸었다.

신라군은 신라를 떠날 때 모든 군선의 뱃머리에 나무로 만든 사자를 세웠는데, 그 사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불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군사들은 배 위에서 한꺼번에 화살을 쏘면서 우산국으로 쳐들어갔다. 우산국의 백성과 군사는 혼비백산했다. 난생 처음 보는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우렁찬 소리를 내질렀던 것. 사나운 짐승은커녕 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던 우산국 군사들은 그 짐승에게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나둘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면서 방책 뒤로 피했다.

이사부는 군사들을 시켜 뱃머리에서 큰 소리로 "당장 창과 칼을 거두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들을 풀어서 너희를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이미 이상한 짐승에 겁을 먹은 우산국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데다, 빗발치는 신라군의 화살 때문에 더욱 궁지에 몰렸다.

우해왕도 최후의 순간이 다가옴을 깨달았다. 사기가 떨어진 군졸을 이끌고 싸운다는 것은 패전이나 다름아니란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전사들은 거의 다 달아나고, 몇몇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항복하기로 마음먹고, 투구를 벗어 이사부의 군문에 항복하고
#1 사자바위//울릉군 서면 남양면에 위치한 사자바위.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라 이사부가 가져온 나무사자를 바다에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치며 지금의 사자바위가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사자바위 인근에 위치한 투구봉은 우해왕이 항복의 표시로 벗어던진 투구가 변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2
#1 사자바위//울릉군 서면 남양면에 위치한 사자바위. 우산국의 마지막 왕 우해왕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신라 이사부가 가져온 나무사자를 바다에 띄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치며 지금의 사자바위가 생겼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 사자바위 인근에 위치한 투구봉은 우해왕이 항복의 표시로 벗어던진 투구가 변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2 비파산//대마도주 세째딸인 풍미녀는 학 한마리와 열두 시녀를 거느리고 우해왕의 왕비로 우산국에 시집왔으나, 오래되지 않아 죽었다. 우해왕은 풍미녀가 죽은 뒤 슬퍼하며, 뒷산에 병풍을 치고 대마도에서 온 열두 시녀로 하여금 비파를 뜯게했다고 해서 비파산이란 이름이 붙었다.3
#2 비파산//대마도주 세째딸인 풍미녀는 학 한마리와 열두 시녀를 거느리고 우해왕의 왕비로 우산국에 시집왔으나, 오래되지 않아 죽었다. 우해왕은 풍미녀가 죽은 뒤 슬퍼하며, 뒷산에 병풍을 치고 대마도에서 온 열두 시녀로 하여금 비파를 뜯게했다고 해서 비파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이 울릉도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4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이 울릉도 사진을 가리키고 있다.
말았다. 항복의 조건으로 신라는 우해에게 왕의 칭호를 쓰지 말 것이며, 우산국이란 이름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또 울릉도는 강릉군수의 지배를 받고, 오징어해산물을 해마다 조공으로 바칠 것을 약속하게 됐다.

우해는 항복하면서 이사부에게 "부디 데려오신 짐승을 남겨두어 내가 죽더라도 그것이 이 섬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고, 이사부는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 나무사자를 배에서 끌어내 물에 띄웠다. 이어 우해는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면서 나무사자가 지금의 사자바위가 됐고, 우해왕이 벗어던진 투구는 지금의 투구봉이 됐다. 국수산은 비파산이라고도 하는데, 우해왕이 연주하던 비파였다고 한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이 말하는 우산국

"신라는 우산국 정벌 위해 8년을 준비했다"

"독도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울릉도란 열쇠부터 풀어야 합니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은 "독도는 한반도의 정치·경제·군사·해양·학술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섬"이라며 "일본과 끊임없는 영유권 분쟁이 일어나는 곳으로, 이를 지키고 바로 알기 위해 울릉도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근대 울릉도 주민과 독도의 관계를 생각하고, 특히 고대 울릉도에서 살았던 사람들과 그들이 영유했던 문화 및 역사에 대한 이해를 해야지만 독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우산국에 대해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포함한 동해를 주축으로 해상왕국을 건설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와 관련, 이 관장은 "그들의 삶과 역사를 살펴봐야 독도를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산국이 독자적인 문화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우산국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이사부의 정벌이 있기 전에도 울릉도 나름의 독자적 문화권을 발전시키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한다는 것. 그는 "다양한 문헌에서 최소한 245년(고구려 동천왕 19)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며 "245년 옥저의 기로(耆老)가 말하기를 고려인이 고기를 잡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일 동안 표류해 동쪽 섬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문화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장은 이어 "우산국이란 이름은 삼국사기부터 나타난다. 바로 거기에 신라 지증왕 13년(512) 하슬라(강릉의 옛 지명) 주둔군 사령관 이사부가 뱃머리에 나무사자를 세워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며 "하지만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 이후, 해상왕국 우산국의 존재는 역사 속에 잊어져 왔다"고 언급했다. "역사 기록은 신라가 우산국을 정복할 때 8년의 준비와 나무사자란 신무기까지 동원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우산국 정복 이후 울릉도에서 출토된 6세기 이후의 유물들(금동관, 방울장신구 등)이 보여주는 울릉도의 정치·경제·문화적 수준 등에 대해 앞으로 자세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라 이외에 다른 문화는 접하지 못했냐는 질문에 이 관장은 "고려왕조의 지속적인 관심과 개척의지가 있었다"고 답했다. '인종 19년(1141) 7월 명주도(강릉의 옛 지명) 감창사 이양실이 울릉도에 사람을 보내 이상한 과실 종자와 나뭇잎을 가져다 왕에게 바쳤다'란 기록이 있는 고려사(高麗史) 17권을 근거로 들었다.

"인종은 울릉도의 특산물에 대해 평소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이 관장은 "16년 뒤인 의종 11년(1157) 5월 명주도 감창사 김유립을 울릉도에 파견, 그 실상을 보고하도록 하면서 사민정책이 추진됐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서인 고려사 18권은 '울릉도는 지역이 넓고 땅이 비옥하며 백성들이 살만하다고 보고 김유립을 파견했다. 김유립은 섬 가운데 큰 산이 있는데 산정에서 동쪽 해안까지 1만여 보, 서쪽해안까지 1만5천여 보, 북쪽 해안까지 3천여 보에 달한다는 것과 함께 7군데 촌락과 석불·철종·석탑이 있고 암석이 많아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보고해 개발을 중단했다'고 적고 있다.


2010-08-25 08:07:52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