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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의 영천시 금호읍(琴湖邑), 화산면(花山面), 신녕면(新寧面) 일대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골벌국(骨伐國)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천의 어떤 지명에서도 골벌국의 흔적을 짐작할 수 있는 지명이나 유적, 설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골벌국의 존재를 아는 영천시민도 많지 않다. 골벌국은 영천의 향토사학자나 몇몇 지역 단체에 의해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골벌국의 실체 삼한시대 변한의 소국 중 하나였던 골벌국은 어떻게 사라졌을까. 역사는 골벌국의 멸망과정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236년(신라 조분왕 7년) 골벌국 왕 아음부(阿音夫)가 신라에 항복해 왔다. 왕은 그들에게 집과 밭을 주어 편안하게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만들었다.'(삼국사기 중 일부) 하지만 골벌국이 언제 생겨났는지, 당시의 생활상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골벌국은 당시 신라와 아주 인접해 있었다. 영천 고경면 대의·대성리에서는 걸어서 반나절이면 국립경주박물관까지 도착할 수 있다. 그만큼 당시 골벌국과 신라는 지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골벌국 인근에 강성한 신라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골벌국은 3세기 중엽(236년)에 가서야 신라에 복속됐다. 영천지역 향토사학계에서는 골벌국이 오랜 기간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골벌국이 신라와 아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었든지, 신라와 견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향토사학자들은 신라와 견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해석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골벌국이 신라와 견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근거는 2004년 발굴된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의 유물이다. 2003년 12월 고경면 용전리에 사는 주민 이칠용씨는 자신이 경작하던 포도밭을 일구다 발견한 녹슨 낫 등을 자신의 집 담벼락에 쌓아 두었다. 우연히 이를 본 영천지역의 한 역사교사가 "유물같으니 신고하라"고 조언한 것이 계기가 돼 발굴이 이뤄졌다. 국립경주박물관은 2004년 3월10일부터 4월19일까지 고경면 용전리 1297의 2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였다. 나무 널무덤이 있었던 이곳에서는 철기류와 청동꺽창, 청동노기(기계식 활의 발사장치), 동전 등의 유물이 발굴됐다.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기계식 활의 발사장치인 노기가 발견됐다는 것은 매장자의 신분이 상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연히 무덤의 주인이 형성한 세력도 만만찮았을 것이란 해석이 함께 나왔다. 발굴 당시 용전리 유물이 골벌국의 흔적이란 주장도 있었으나, 골벌국과 연관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갈리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신라와의 혈족 또는 그에 준하는 혈맹관계란 주장이다. 신라가 본격적으로 주변 소국을 복속하기 시작한 것은 200년대 초.
강성했던 의성 조문국도 벌휴왕 2년(185년), 김천에 위치해 있던 감문국도 조분왕 2년(231년)에 이찬 석우로 대장군에 의해 정복됐다. 골벌국이 신라에 항복한지 13년 뒤 상주 사벌국(249년), 또 60여년 뒤 청도 이서국(297년)도 멸망하게 됐다. 지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웠던 골벌국이 신라와 단 한 번의 전쟁도 없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혈맹관계 또는 신라 왕족과의 혼인 때문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골벌국의 중심지는 어디 그렇다면 골벌국의 도읍지는 어디였고, 나라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이에 대해 영천지역 향토사학자들은 골벌국의 규모에 대해 도읍지는 지름 1㎞ 정도, 전체적인 권역은 5㎞로 추정하고 있다. 영천시 완산동에 위치한 금강산 일대를 골벌국의 도읍지로 보고 있다. 금강산에는 아직도 대규모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50여년 전 이곳에 군부대가 들어설 당시 도로를 만들면서 엄청난 양의 토기 파편 등이 나왔다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골벌국이 외부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금강산으로 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강산 앞에는 고경천이란 큰 하천이 흐르고 있다. 배를 타고 건너야 할 정도의 하천 폭을 지니고 있어 도읍지인 금강산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고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금강산 정상으로 올라가려면 '영천시 그린환경센터(쓰레기매립장)' 정문 앞으로 나 있는 산책로를 통해 올라가야 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 골벌국 때 토성 흔적이 2천년의 세월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다. 산 정상에는 '금강산성 내력'이란 작은 비석이 있다. 1995년 영천향토사연구회와 보이·걸스카우트 골벌지역대가 함께 세운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금강산성의 내력은 골벌국과의 연관성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고려 건국 무렵 영천지역을 지배했던 황보능장이 왕건을 돕기 위해 견훤을 견제했다는 무용담을 주내용으로 담고 있다. 특히 금강산을 중심으로 신녕에서는 400여기의 고분이 발견돼 현재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미 1만5천여점의 유물이 발굴됐다. 특이한 것은 이곳에서 금동관이 발견됐다는 것. 금강산과 직선거리로 2㎞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왕을 상징하는 금동관이 나왔다는 것은 골벌국의 새로운 도읍지였거나, 우리가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또 다른 고대국가가 영천에 존재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 1918년 발견된 영천시 어은동 널무덤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대량으로 나왔다. 널무덤은 AD 1세기에 만들어진 무덤으로 추측되며, 여기에서는 거울과 호형대구 등 다양한 유물이 나왔다. 골벌국의 역사가 짧지 않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향토사학자 전민욱씨는 "이미 수많은 골벌국 유적들이 도시개발로 인해 파괴된 만큼, 지금이라도 대대적인 발굴이 이뤄졌으면 한다"며 "우리가 확인하지 못했지만, 분명 골벌국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고분이 있을 것이므로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2천년 전 사라진 골벌국의 역사를 바로 잡기 바란다"고 말했다. | |||||||||||
2010-09-29 08:02:51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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