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6] 최북단 가야왕국 고녕가야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10:00

[신비의 고대왕국 .16] 최북단 가야왕국 고녕가야
 사라져버린 200여년의 역사…이름 모를 왕과 왕비 무덤만 '덩그러니'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있는 고녕가야 태조의 왕릉으로 전하는 묘. 선조 25년(1592년)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 등이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했는데, 음각 글씨로 가야왕릉이라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에 있는 고녕가야 태조의 왕릉으로 전하는 묘. 선조 25년(1592년) 당시 경상도관찰사 김수 등이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했는데, 음각 글씨로 가야왕릉이라 새겨져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가락(지금의 김해)의 9락(落) 9간(干)이 무리를 이끌고 구지봉(龜旨峰·김해에 있는 산)으로 올라가 6개의 알이 든 금합자를 하늘에서 내려받았다. 이것을 아도간의 집에 안치해 두었더니 다음날 새벽 알에서 잘 생긴 6명의 아이가 나왔다. 열흘이 지나자 어른이 됐다. 그 중 알에서 가장 먼저 나온 아이의 호를 수로, 성을 김이라 한 뒤 금관가야국(지금의 김해)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다섯 명의 아이들도 각각 아라가야국(함안), 대가야국(고령), 소가야국(고성), 고녕가야국(함창), 성산가야국(성주)의 임금이 되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중 일부)

# 이름뿐인 고녕가야

2000년 전 상주에는 지금의 사벌면을 중심으로 한 사벌국과 함창읍 일대를 호령한 고녕가야국(古寧伽耶國)이 자리해 있었다. 이 두 나라는 삼한시대 한반도에서 가장 큰 저수지 중 하나인 공검지(일명 공갈못)를 사이에 두고, 물적·인적 교류를 활발하게 했을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시기, 동일 생활권에 위치한 두 나라였지만 성장과 멸망, 그리고 남겨진 유적은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사벌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곡창지대, 금·철 등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삼한시대 진한 12국의 맹주국이었던 사로국과 대등한 힘을 겨루었다. 멸망 후에도 토착세력의 영향력은 상당기간 지속됐다. 덕분에 사벌국의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유적·유물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반면, 고녕가야국은 이름 뿐인 고대왕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고녕가야국의 멸망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다.

조선시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함창읍지'에 따르면 고녕가야국 왕은 함창 김씨의 시조(태조왕)로, 신라 유리왕 18년(42년) 3월15일 계욕일에 가락국(현 김해읍) 북쪽 3리쯤의 구지봉에 강생(신이 인간으로 태어남)했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함창지역으로 옮긴 태조왕은 115년간 재위했다. 2대 마종왕은 병신년(157년)에 즉위해 65년간, 3대 이현왕은 경자년(220년)에 즉위해 35년간 재위했다고 전해진다. 254년 7월 신라 첨해왕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또 다른 하나는 신라 벌휴왕 2년(185년) 8월에 벌휴왕이 장수를 보내 고령가야국을 멸망시킬때 까지 144년간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고녕가야국과 사벌국은 신라에 의해 멸망됐고, 고녕가야국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사벌국을 거쳐야 가능하기 때문에 사벌국의 멸망(249년) 이후인 254년으로 보는 견해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당시 고녕가야국의 영역은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공검면·이안면과 문경시 점촌동·가은읍·농암면·마성면으로 남·북으로 20㎞, 동·서로 10㎞에 이르는 720㎢ 정도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는 고녕가야국이 함녕(咸寧)에 있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함녕은 지금의 상주시 함창면 일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지금의 함창읍이 금관가야와 200㎞ 넘게 떨어져 있고, 문화적인 공통점도 많지 않다는 이유로 고녕가야국의 실제 위치가 경남 진주라는 주장도 있다.


# 고녕가야의 유적

이에 대해 대구·경북지역 고고학계와 향토사학계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지만, 고녕가야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을 상주와 문경 일대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상주시내에서 승용차로 30분을 달려 함창읍 신흥리와 공검면 역곡리 사이의 오봉산 정상부(해발 238m)에 오르면 남동쪽 줄기에 남산고성(南山古城)이 자리하고 있다. 남산고성은 고녕가야국의 왕궁터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며, 이후에도 육상교통 요충지를 관할하면서 조선시대까지 이용됐다. 산 정상부에 오르면 아래로 광활한 함창평야와 이안천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산고성의 성곽 대부분은 사라진 상태지만, 남은 흔적만으로도 1천206m의 외성과 940m
고녕가야국의 중심지인 상주시 함창읍 일대. 고녕가야 왕비릉 너머로 당시 주거지로 추정되는 증촌리와 곡창지대인 함창평야, 이안천, 군사적 요충지였던 오봉산 남산고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제공 김상호)2
고녕가야국의 중심지인 상주시 함창읍 일대. 고녕가야 왕비릉 너머로 당시 주거지로 추정되는 증촌리와 곡창지대인 함창평야, 이안천, 군사적 요충지였던 오봉산 남산고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제공 김상호)
'고려사' 지리지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1195년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제공 고갑진)3
'고려사' 지리지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1195년 사록 최정빈이 옛터에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사진제공 고갑진)
규모의 내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오봉산 고분군도 있다. 등산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면 이미 고분은 모두 발굴된 뒤 다시 되메워졌지만, 몇 개의 고분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기원초부터 형성된 오봉산 고분군 중에는 24m가 넘는 중대형 고분도 있었으며, 단경호(둥근 몸통에 짧은 목이 달린 단지) 등 가야시대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 축조된 3대 저수지 중 하나인 공검지는 삼한시대 농업국가로 성장하려고 한 고녕가야국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당시 공검못의 둘레가 8.56㎞로 추정되는 것만 보더라도 얼마나 큰 규모의 농사를 지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함창읍 증촌리의 조용한 시골마을에서도 고녕가야국의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입구 골목길로 들어서면 높이 3m, 폭 15m 전고녕가야왕릉(傳古寧伽倻王陵)이 있다.

또 이곳에서 동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엔 비슷한 규모의 왕비릉이 위치해 있다. 왕릉의 명칭에 나타나듯 고녕가야왕릉은 정사에 기록이 없어 누구의 묘인지 추정이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증촌리 진입로 오른편 밭에는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증촌리 입석'도 위치해 있다.

김상호 상주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은 "상주시 함창읍 일대에는 고녕가야국의 수많은 유적이 산재해 있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이를 발굴 및 조사할 수 있다면 한민족의 역사 정립 뿐만 아니라, 지역 관광산업에도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검지의 전설

중국 전당호 뺨치는 빼어난 풍광

얼음 언 모양보고 흉년·풍년 점쳐


'상주 함창 공갈못에 연밥 따는 저 큰 애기/연밥 줄밥 내 따줄게 요 내 품에 잠들어라/잠들기는 늦잖아도 연밥 따기 한철일세.'

오래 전부터 상주에서 전해 내려오는 채련요(採蓮謠)다.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에 위치한 공검지(공갈못)는 삼한시대 3대 저수지 중 하나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노래와 전설이 많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공검이라는 큰 못이 있었는데, 고려 명종 25년(1195년) 상주 사록 최정빈이 축대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못을 축조할 때 '공갈'이라는 아이를 묻고 둑을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광해군 9년(1617년) 부제학이던 이준이 지은 '상산지(商山誌)'에는 공검지 둑의 길이가 860보(약 645m)이고, 못 주위의 길이가 1만6천647척(8.56㎞)이라고 적혀 있다. 또 못에 물이 차면 수심이 다섯 길이나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볶은 콩 서되를 하나씩 먹으면서 말을 타고 못가를 돌아도 콩이 모자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검지의 규모는 아주 큰 편이다.

'저승에 가도 공검지를 구경하지 못한 사람은 이승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말이 전해 내려올 정도로 공검지의 풍광은 빼어나다. '함창읍지'에는 이 못 안 몇 리에 걸쳐 연꽃이 피어 있으며, 마치 중국의 전당호를 방불케 하는 풍취를 지녔다고 적혀 있다. 공검지가 이처럼 아름다워 이 곳을 찾은 옛 성인들은 하나같이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전설에 따르면 고녕가야국의 사람들은 공검지에 얼음이 어는 것과 인근 농토를 보고 흉년과 풍년을 점쳤다고도 한다. 공검지 인근에서 농토의 얼음갈이(언 땅이 완전히 다 녹기 전에 논밭을 가는 일)를 하는 소가 땀을 흘리면, 그 해는 엄청난 흉년이 온다고 믿었다.

하지만 공검지 대부분이 고려·조선시대, 근대에 들어오면서 논·밭으로 개간되어 지금은 6천600㎡도 채 남지 않은 상태다. 2005년 상주시가 경북문화재연구원에 의뢰해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했지만, 특별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연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임호기자

협찬: eride GyeongBuk

2010-09-15 08:11:0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