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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황금율인가?

지식창고지기 2012. 1. 18. 09:52

왜 황금율인가?(마태복음 7:12)



황금은 최고의 가치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은메달 100개가 금메달 하나를 당하지 못합니다. 만년필,시계,넥타이 핀, 같은 물건들도 가장 값비싸고 최고의 것들은 황금으로 만든 것입니다. 성경적으로도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얻는 최고의 상급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세워진 하늘 나라 천국의 성곽과 그 길도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613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의 이 말씀을 일컬어 황금의 계명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의 많은 계명 가운데 왜 이 말씀을 최고의 계명이라고 할까요?

그 실마리는 같은 마태복음 가운데 22장34-40의 본문에 있다고 생각 됩니다.

"예수께서 사두개 인들로 대답 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4-40)

첫째 실마리는 마7:12과 마22;40의 후반부가 동일하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요,선지자니라",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에 이 두 곳 외에는 이런 표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씀은 내적으로 깊이 연결 되어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 됩니다. 마7:12은 예수님을 따르는 울타리 안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고,마22은 예수님을 배척하는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 합니다.

둘째 실마리는 마22:39절의 말씀 가운데 " 그와 같으니 " 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우리는 본문에서 "그와 같으니" 라는 말씀을 흔히 지나치고 있습니다마는 이 말씀이야말로 용의 눈알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와 같다" 니 무엇과 같다는 것입니까? 앞에 말씀 즉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같다는 것입니다.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은 말로 나타내자면 두 가지인 것 같으나 그 본래는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다면 고대 로마의 동전 한 데나리온을 설명할 경우 그 동전의 실체를 보여주면 간단한 일이지만 그 동전을 말로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 동전의 앞면과 뒷 면을 따로 따로 설명 할 수 밖에 없으나 그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셋째 실마리는 마7장과 마22장 본문의 속에는 주체인 나와 객체인 타자가 분명히 드러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마7:12을 보면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내가 남을 먼저 대접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와 남이 있습니다. 마22:33-40에도 나와 하나님 그리고 나와 이웃이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주체와 하나님과 이웃이라는 객체가 있습니다. 사람은 나와 너라는 관계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란 존재는 나는 나요,너는 남입니다. 나 이외엔 그 어떤 사람도 남인 것입니다. 나 이외엔 하나님도 분명히 남입니다.그래서 하나님을 절대 타자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세가지 실마리를 통하여 우리가 종래 생각해 왔던 것 처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이 말씀이 단순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그와 같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7:12이 의미하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

"저가 나를 사랑 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 한즉 내가 응답 하리라"(시91:14-16)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잠8:17) 위에 있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봅시다. 위에 있는 말씀들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 어떻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너희가 하나님께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하나님을 대접 하라". 롬1:18-23을 참고 하십시오

마7:12이 의미하는 나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

이 부분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문제 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정 받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사실 대접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나만 좋은게 아니라 너도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우 먼저, 형님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여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들은 항상 이렇게 생각 합니다. "나는 교양있고,예의 바르고, 경우 있는 사람이다.네가 먼저 나를 대접 해 봐! 그러면 나는 네가 대접한 것 보다 두 배,아니 세배로 갚아 줄 수 있는 사람이야! 네가 나를 대접하지 않는데 내가 미쳤냐? 내가 뭐 네 종이냐?" 라고. 그래서 우리는 대접 하지도 않고 대접 받지도 못하고 삽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나면 좋은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데 모든 인간적 갈등과 고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은 예외야,그래도 나만은 대접 받아야해! 하는 마음을 우리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바로 그것 때문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7:12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란 둘인 것 같으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계명을 꿰뚫는 마스타 키와 같은 계명이기에 가장 최고의 계명 곧 황금의 계명이라 불리우는 것입니다.



삶 자체를 여호와께 맡기고 살자!(시 37:5-6. 시 55:22, 벧전 5:7)



본문 말씀 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 맡기라 "는 명령 입니다. 집을 건축 할 경우 우리는 건축가에게 그 일을 맡깁니다. 병이 나면 우리의 귀중한 몸을 의사에게 맡깁니다. 해외 여행을 할 경우 여행사에 모든 절차를 맡깁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명령 합니다. 첫째는 "길 "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 짐 "을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 염려 "를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시 37편의 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문맥 속에서 보면 길은 두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악자의 길이요 다른 하나는 행선자의 길입니다. 행악자의 길이 기름 처럼 부드럽고, 푸른 나무의 무성함 같아서 누구나 그 길을 따라가고 싶을 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 사회 의식 조사를 보니 71 %의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는 법을 지키면서 살면 손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오늘 우리의 사회 현실 만이 아니고 시편 37편 기자의 삶의 자리도 마찬가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행악자의 길이 좋아보이더라도 너는 행선자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증거요 역사의 흐름이 그 증거라는 것입니다.

시 55편의 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본문의 문맥 속에서 보면 그 짐은 사랑하고 믿은 사람으로 부터 배신 당한 사람의 절망과 분노의 짐입니다. 나를 모략하고 중상한 사람이 나의 원수였다면 나는 참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3-14절) ". 사람으로서 가장 참기 어려운 고통이 무엇입니까? 가장 믿었던 사람의 배신 아닙니까! 우정의 배신자 ! 의리의 배신자 ! 사랑의 배신자 ! 는 도저히 용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명령하고 계신 것입니다. 배신자에 대한 책망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벧전 5:7의 염려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벧전 전체의 문맥 속에서 보면 이 염려는 핍박에 대한 염려요, 현실 생활에서 신앙대로 살아가기 어려움에 대한 염려요, 불같은 시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 입니다. 그 현실적인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고 명령 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방향성, 인간 관계의 모든 고뇌, 그리고 삶의 두려움, 즉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여호와 우리 아버지께 맡기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의를 빛같이 나타내실 것이라고 약속 하신 것입니다.


지붕을 뚫고서라도(막 2 : 1 - 12)



본문의 내용을 실감나게 이야기 하자.

본문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네 사람이 메고와서 지붕을 뚫고 내려보낸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사건 입니다. 우리는 나아만의 문둥병 고친 이야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삭개오 이야기, 또 오늘 우리의 보문 같은 이야기나 사건들을 회중들이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고 본문의 내용을 대충 요약하여 전하고는 곧바로 설교로 들어가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여야 할 점은 본문의 그 이야기 자체가 우리의 설교 보다 훨신 더 흥미롭고 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춘양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스토리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춘양전을 영화화 하면 언제나 대힛트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중국과 일본의 축구 빅게임이 있을 때 텔레비젼 생중계를 합니다. 그 게임이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승리였을 때는 재방송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생중계 할 때의 시청율보다 그 결과가 이미 알려진 재방송의 시청율이 훨신 더 높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 알려진 본문으로 설교 할 때 본문 이야기는 회중들이 너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니까 반복하지 말고 이번에 내가 새롭게 발견한 메시지로 곧바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좀 문제라고 봅니다. 오히려 더 상세하고, 실감있게, 그 내용을 설명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삼국지에 대하여 대화 할 때, 읽은 사람 : 안 읽은 사람의 모임과 읽은 사람들의 모임, 둘을 놓고 볼 때 어느 쪽 모임이 더 활기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

에스콰이어, 금강제화 같은 큰 구두 회사의 판촉 담당 두 사람이 이제 막 개발 되기 시잣하는 아프리카를 찾아 갔습니다. 날씨가 몹시 더웠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맨발로 살고 있었습니다. 구두 안에서 땀이 났습니다. 한 사람은 휴- 덥다, 이런 기후와 땅에서 사는데는 맨 발이 차라리 더 났겠어, 누가 구두를 사신겠어 ! 하고 돌아 갔습니다. 또 한사람은 아-하 ! 이 땅이야말로 구두 사업의 황금 시장이구나 ! 생각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 보세요 아프리카 사람이라고 맨발로 다니나요? 긍정적 사고와 부정적 사고의 날카로운 대조 입니다.

2절을 보면 많은 사람이 모여서 容身 할 수 없을 지경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 아이-고 사람이 많기도 하구나. 다음날에나 와야지 안돼겠다. 이 많은 사람 다 보고 언제 우리 차례가 오겠나 오늘은 이미 틀렸으니 그만 돌아 가자 ! > 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다섯 사람들은 긍정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인 것이 분명 합니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통사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좀 양보하여 달라고 애걸도 하였을 것입니다. 모두들 易地思之하여 봐 ! 우리 모두 당신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벽을 뚫고 들어 갈 수는 없었습니다.There is Will, There is Way 라고 하였습니다.이 다섯 사람들은 윈스톤 쳐칠 경의 말대로 Never Give up ! ( 결코 포기하지 말라 )하였던 것입니다.



보라 , 지붕이로다 ! - 누가 지붕 뚫을 생각을 했을까?

5절에 예수께서 "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 라고 하신 본문을 보고 흔히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사람의 믿음을 지칭한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는 이번에 이 본문을 다시 읽으면서 저희 할 때 저희는 그 중풍 병자까지 쳐서 다섯을 지칭한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목 마른 사람이 샘 판다는 옛말 처럼 지금 급한 것은 메고 온 네 사람이 아니라 그 병자 자신이기 때문 입니다. 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이 항상 그 병자 곁에 있지는 않습니다. 이제 예수라는 분의 소문을 듣고 모처럼 이 병자는 네 사람에게 간절히 부탁하여 예수 계신 곳 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언제 다시 이 네 사람을 불러 올 수 있을 것입니까? 또한 네 사람의 마음이 모두 한결 같을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쯤은 부정적 사고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한 사람이라도 돌아가자고 한다면 이제 까지의 수고는 물거품이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장 급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그 중풍병자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라, 지붕이로다 ! 지붕에 착안하고 지붕을 뚫을 생각을 한 사람은 그 병자 자신이었으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 행운은 우연한 사건과 같다. 그러나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준비를 한 사람한테 만이 그 우연한 행운은 정말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다 >라고 한 것 처럼 그 병자의 눈 앞에 정말 우연히 그 지붕이 보였던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값 비싼 은혜

이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만나 그 죄 사함을 받고 그 병에서 놓임을 받은 전 과정을 눈을 감고 묵상하여 보십시오. 이 중풍병자가 받은 은혜는 구하고, 찾고, 간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결과였습니다. <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 : 3 > 는 말씀과 같이 그는 부르짖어 응답을 받았고, 크고 비밀한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성경 말씀의 큰 줄거리 가운데 하나는 부르짖으라, 구하라, 너는 여호와를 바라라,라는 말씀 입니다. 은혜는 가만히 있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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