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의 사람(갈라디아서5:16-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요, 성령받은 사람이다. 예수의 사람에게 구원과 더불어 참 자유를 주셨다. 그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공행하며 동거동락하는데 자유를 쓰고, 못된 짓하는데 자유를 쓰지 말라. 은혜가 임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기쁨과 평안함, 소망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넉넉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예수의 사람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게 되어 있다(갈5:22,23).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 자기와의 관계가 원만해지고 풍요로원진다. 필요한 것을 그때 그때 채워주시는 은혜가 임한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곧 육체와 정과 욕심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을 막는 것이 무엇인가?
1. 육체 곧 정욕이다.
육체의 일 곧 정욕이 나타나는 것은 다양하다(갈5:19-21). 온갖 못된 것들이 다 정욕에서 나온다. 정욕을 따라 사는 사람은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원리적으로 성도는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구원받았음에도 정욕의 뿌리가 남아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성령에 충만하고 성령을 좇아 살 때 정욕은 꼼짝을 못한다. 그러나 성령을 좇지 않을 때 정욕이 다시 일어나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하도록 역사한다. 정욕을 다스리는 것은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 수양을 많이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욕을 죽이기 위한 모든 노력과 시도가 다 허사로 돌아갔다. 정욕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성령을 좇아 사는 것이다. 성령이 이끄는데로 성령을 따라 살면 육체가 원하는대로 정욕이 발동하는대로 살지 않게 된다. 성도 안에 성령과 육체가 있는데 이 둘은 상극이기에 상호간에 하려고 하는 것을 못하게 막는다. 그러므로 내가 원하는 것, 곧 범죄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며 사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사람과 육체의 사람이 공존한다. 성령에 충만하지 않을 때 내가 드러나게 된다. 땜의 만수위와 갈수기와의 풍경의 차이. 성령의 나를 주장하시면 성령의 통치를 받기에 정욕이 머리를 들지 못하지만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면 육체의 사람의 다 드러나서 세상 사람인지 예수의 사람인지 분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좇아 행하라,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살게되면 순리적으로 강물이 흐르듯이 그렇게 살게된다. 은혜받는 것은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요, 성령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싶은 것이다. 은혜는 자아 발견을 하는 것이요,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내 주제가 파악되는 것이다. 자아가 발견되는 것이다. 그래야 나를 고칠 수 있다. 병을 고치는 비결도 빨리 자기 병을 아는 것이다. 암도 초기에만 발견하면 고칠 수 있다. 성경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 자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마음속에 있는 정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아가 발견될 때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 그러면 성령께서 고쳐주신다. 내 마음을 바꾸어 주신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 정욕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
2. 사악한 감정이다.
인격에서 감정은 중요한 요소이다. 무엇을 결정할 때 결정적인 영향으 falcl는 것이 감정이다. 좋은 감정은 좋은 것이다. 좋은 감정은 자꾸 일으켜야 한다. 본문의 십자가에 못박은 정은 사악한 감정이다. 미워하고, 시기하며, 질투하는 감정과 같은 사악한 감정을 십자가에 못박았으니 그런 나쁜 감정이 나를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조그마한 감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나쁜 감정은 없애주시고 순화시켜 주시며 좋은 감정은 새록 새록 키워 주신다.
3. 개인적인 욕심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게 된다. 욕심을 버려야 된다. 욕심을 버리면 자유롭고 좋다. 욕심을 쥐고 있으면 인생은 더러운 인생이 된다. 욕심을 갖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다. 욕심을 잡고 있으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다. 욕심을 버리면 오히려 얻게된다. 버리는 것이 얻는 비결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욕과 사악한 감정과 개인적인 욕심을 제어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주셨다. 성령을 좇아살면 신나는 삶을 살고, 소망이 솟게 된다. 기쁘고 평안하고 의욕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된다.
성소에서 나온 물(에스겔47:1-12)
본문은 성소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어떻게 역사를 이룰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성소에서 나온 물(12)은 제단을 통해서 흘러나온다. 성소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성소에서 나오는 물은 사람이 만들거나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소에서 흘러 나온 물은 곧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이다.
1. 성소에서 나온 물은 점진적인 역사를 이룬다(3-8).
은혜와 말씀은 점진적으로 역사한다. 하나님의 사자가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소에서 나온 물이 어떻게 역사하는 가를 단계마다 척량하며 보여주었다. 은혜와 말씀이 사람의 발목, 무릎, 허리, 헤염으로 밖에는 건너지 못할 강을 이룬다. 발목 단계의 은혜가 임할 때 예수를 구주로 믿으나 생활속에서는 철저히 나 중심으로 살게 된다. 무릎단계에서도 신앙 따로 생활 따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살아가는 것이 피곤하다. 그러나 은혜로만 살기에는 신앙이 덜 성숙한 상태다. 허리단계는 믿음으로 살수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살 수도 있는 단계이다.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믿음으로 살면 은혜위에 은혜의 삶을 살지만 자기 힘으로 살면 상당히 피곤한 인생을 살게 된다. 건널 수 없어 헤엄할 만한 강의 단계가 되면 온전히 믿음으로 살게되고 은혜로만 살게 된다. 은혜와 말씀으로 사는 성도들은 자신이 처한 단계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은혜와 믿음으로만 살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2. 성소에서 나온 물은 생명의 역사를 이룬다.
성소에서 나온 물이 바다에 들어갈 때 바닷가 소성함을 얻는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한다.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말씀뿐이다. 성소에서 나온 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케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함나님의 명령(창1:28)과 같이 은혜와 말씀이 역사하는 사람마다 영적인 자녀들이 번성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행1:8). 예수님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요10:10)이 실현된다. 은혜와 말씀의 역할은 살리는 역사이다. 죽은 심령이 살아난다. 지옥갈 사람들이 영생을 얻어 천국 백성이 된다. 은혜와 말씀이 역사할 때 사회가 정화되고 도덕 수준이 높아진다. 은혜와 말씀에 깊이 적셔진 사람마다 모든 면에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누리는 것은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그러나 진펄과 개펄같이 마음을 닫고 사는 사람들은 생명의 역사와 무관하게 된다. 생명의 역사를 누리는 비결은 마음을 열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3. 성소에서 나온 물은 생명을 유지시키고 치료하는 역사를 이룬다.
성소에서 나온 물로 인해 이루어진 강의 좌우에는 각종 실과 나무가 번성한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이요 복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과 복은 쇠잔하지 않고 갈수록 더 생명력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권태감을 느낄 수 없도록 때를 따라 새롭게 역사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이 날마다 신혼생활과 같이 새로움속에 영위된다. 은혜와 말씀이 주는 각종 은총과 복은 누구나 먹고 소화하며 자족함을 주기에 '다고 다고'하는 갈증에서 벗어나게 하고, 전인을 치료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 신약과 구약의 말씀은 양방과 같은 대증요법이 아니라 한방과 같은 원인요법이며 전인 치료를 이룬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은혜와 말씀으로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고 세계 선교를 완성하실 것이다.
인식후 첫날 저녁(요한족음20:19-23)
안식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이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하고 제자들에게 얼려서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가서 확인하게 하였다. 제자들이 돌아간 후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서 만날 것을 전하라고 하셨다. 같은 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어떤 방에서 문을 닫고 있는데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몇 가지 말씀을 주심으로 제자들을 일으켜 세우셨다. 제자들은 그 후에 힘을 일어섰고 기도를 힘쓰면서 오순절을 기다렸다. 우리에게도 안식 후 첫 날 저녁의 은혜가 필요하다. 안식 후 첫 날 저녁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한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것들이다.
1. 평강을 주셨다(19,21)
제자들에게 절실한 것은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두려움은 사람들의 인격과 믿음을 파괴한다. 우리에게도 현실과 미래에 대한 깊은 두려움이 있다. 국민 전체가 심한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평강이 절실히 필요하다. 마음이 평안할 때 평상심을 갖게되고 어떤 일이든지 감당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평강을 빌어주셨다. 첫 번째 평강을 빌어 주신 것만으로는 제자들이 평강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였기에 또 다시 평강을 빌어 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전혀 다르다(요14:27). 성령의 역사는 항상 평강으로 나타난다. 상황이 어더하든 평강이 임하면 주님이 함께하시는 증거이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평강을 누리는 성도가 되자.
2. 기쁨을 주셨다(20).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알게되었지만 직접 확인해 본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긴가민가하는 갈등이 있었다.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의 마음에서 의심의 구름이 사라지고 확신이 샘솟아 났다. 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사라지고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남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이 충만한 기쁨이 괴로운 인생길을 가는 성도들에게 활력소가 되고 힘이 되어 준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도 다 극복할 수 있다. 실직과 예측 불가능한 현실 앞에서 집단 우울증에 걸린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만이 IMF 한파가 일으키는 국민적인 집단 우울증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3. 성령을 주셨다(22).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이 보내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성령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마28;20)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힘과 능력을 주시고, 비젼을 주시고 역사하신다. 성령님만 우리와 함께하시면 언제나 승리할 수 있다.
4. 용서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23).
용서하는 것은 특권이다. 용서할 때 하나님과 맺힌 담이 헐어진다. 용서할 때 나도 용서를 받는다. 고질병도 고침을 받는다.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과 공동체의 고질적인 병리현상까지도 치유된다. 용서는 용서받는 사람에게 은총일뿐 아니라 용서하는 사람에게도 크신 은총이다. 어려울수록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은 귀한 일이다.
일어나 걸으라(왕상19:1-18)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력의 회복이다. 직면한 현실은 좌절과 침체를 갖다 준다. 그러나 현실에 잡혀서 산다면 탈진하여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 누구나 탈진할 수 있고, 좌절에 바질 수 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850대 1의 생명을 건 영적 전투를 하였다. 외롭고 위험한 싸움이었으나 엘리야는 승리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상숭배를 비호하는 세력인 아합왕의 왕비 이세벨이 위협하자 엘리야는 도망하여 로뎀나무 아래에서 탈진상태에 빠져 하나님께 죽기를 하소연하고 있었다. 탈진한 상태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엘리야를 탈진상태에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이모 저모로 역사하셨다. 엘리야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신다.
1.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루만져 주신다(5,7). 엘리야는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두 번씩이나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셨다. 탈진하고 심리적으로 저상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다. 어루만지는 행위는 마음에 안정을 주는 사랑의 표현이다. 어머니가 어루만질 때 아기는 암신하게 되고, 짐승도 새끼를 어루만저 줌으로 안정을 누리게 한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어루만져 주신다. 심리적으로 안정이 필요한 우리들에게 말씀을 보내어 어루만져 주시고, 은혜로 어루만져 주신다. 하나님의 크고 부르러운 손이 이 시간 우리를 어루만져 주신다. 주님은 우리가 힘들고 쓰러지고 어려워할 때 마다 말없이 우리 곁에서 어루만져 주신다. 주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기는 성도는 복이 있다.
2.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일어나 먹으라고 하신다(5,7).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전된 후에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먹고 마실 것을 주셨다. 그리고 일어나 먹도록 깨우셨다. 엘리야가 허기에 지쳤기 때문에 우선 먹고 마셔서 원기를 회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엘리야가 허기를 채우고 한 잠을 자고나자 또 다시 먹고 마시게 하였다. 엘리야가 기운을 차려서 먼 길을 가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신을 갖고사는 연약한 존재임을 잘 알고 계신다. 어려운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강건해야 한다. 강건하기 위해서는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도록 주님이 권면하시지만 일어나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일어나려고 할 때 주님이 힘을 주신다. 피곤함과 무능과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스스로 주저앉지 말고 이제 일어나자. 주님이 도와주시리라.
3. 하나님은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피하게 하신다(8).
정신을 차리고 힘을 얻은 엘리야는 40일간을 달려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착하였다. 하나님이 그 동안 보호하셨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 호렙산에 도착하여 굴속에 자리를 잡은 엘리야는 일단 이세벨의 추격권에서 벗어나 안심이 되었다. 하나님은 항상 성도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신다. 어떤 경우든지 성도는 하나님의 보호권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당하든지 피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고전10:13). 피할 때는 피하는 것이 성도의 지혜이다.
4.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신다(9,13).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자신을 돌아봄으로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엘리야가 왜 여기 있는가를 돌아볼 때 자신감을 회복하고, 이전의 은혜와 첫 사랑을 회상함으로 하나님과의 교통도 회복하게 된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진솔한 하나님과의 대화속에 엘리야는 기력을 회복하고 혼돈된 마음이 정리정돈된다. 성도는 하나님과 기오와 말씀을 통하여 진솔한 대화를 해야 한다.
5. 하나님은 새 사명을 주심으로 엘리야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신다(15-18).
하나님은 엘이야로 하사엘과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게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세우게 한다. 엘리야는 새 힘을 얻어 일어나 새 사명을 수행하려고 힘차게 걷게 되었다. 사명은 성도가 사는 존재 이유이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한 성도는 살 수 있다. 성도가 살아있는 것은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사명이 있다는 증거이다. 사명을 발견하는 순간 성도는 힘을 얻게 된다.
롯이 떠난 후에(창세기13:14-18)
하나님은 성도가 복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택하신 것은 그에게 복을 주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하고,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전에 복된 존재가 되게 하시고, 복을 누릴 수 있는 그릇이 되게 하신다. 그릇이 갖추어질 때 하늘문을 여시고 복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다함이 없는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권력, 부, 명예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복은 나와 내 자손이 영원토록 다함이 없는 복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이 것은 거창하게 시작하나 용두사미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미약하게 시작하나 갈수록 창대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을만큼 복을 주신다.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복을 주신다. 쓰고 다 써도 다함이 없는 복을 주신다.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것이지만 복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부합되는 행위를 할 때 주신다. 복을 받고, 복의 근원이 되고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복은 오게 되어 있다. 아브람은 처음에 하나님께 부분적으로 순종해 간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나라하셨건만 그는 아비 데라, 조카 옷과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에 머문다. 하란에 머무는 동안 아비가 죽게 되고, 그후에 하나님의 두 번째 부름을 듣는다. 이 때에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조카 롯을 데리고 간다. 좁은 땅에서 목축을 하게 되니 숙질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고 결국은 아브람이 롯과 헤어지게 된다. 롯과 헤어짐으로 온전히 순종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시며 복을 받아 누리는 길을 알려주시고, 축복에 대한 약속을 확정해 주셨다. 그 이후로 아브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게 되었다. 아브람이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을 때는 항상 문제가 따랐다.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100% 순종해야 한다. 성경 말씀에 100% 순종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한 하나님의 복은 절대로 누릴 수 없다.
2. 믿음의 시야를 넓힐 것을 요구하신다.
아브람에게 서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브람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땅은 아주 작은 땅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시야폭을 넓히라는 것이다. 아브람의 눈은 자기와 가족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인류를 구원할 복의 근원이 되게하려하는데 그의 시야가 너무나 제한되어 있으니 넓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의 시야폭을 따라 역사하신다. 우리는 너무 시야가 좁다. 우리의 믿음의 눈을 넓게 떠야 한다. 시야폭을 가족과 교회 성도들과 민족과 북한 동포, 해외 동포, 중국과 전 세계 인류로 넓혀갈 때 하나님은 시야폭이 넓혀진 만큼 감당할 수 있는 은혜와 복, 여건을 주신다. 시야를 어떻게 넓힐 수 있는가? 믿음의 눈으로 동서남북으로 시야를 넓혀서 보아야 된다. 사심과 욕심을 내려놓을 때 시야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3. 시야를 넓혀 본 것을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꿈과 비젼은 믿음으로 행할 때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역사는 하나님과 내가 합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50%하시고, 내가 50%하는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행할 때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주시는 것이다. 동서남북으로 시야폭을 넓히게 하신 하나님은 아브람으로 그 땅의 종과 횡을 행하게 하셨다. 아브람이 종과 횡으로 행할 때 그 땅이 아브람에제 주어지는 것이다. 종과 횡을 걸어보는 것은 믿음의 상징적인 행위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체화되는 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 믿음으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믿음으로 행할 때 우리의 것이 된다.
4. 받은 은혜를 누리기 위해 예배드리는 일을 귀중하게 여기고 힘쓰기를 요구하신다.
축복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을 받은 아브람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다. 단을 샇는 것은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예배의 핵심은 설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생명을 걸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예배에 성공할 때 평안과 기쁨, 건강,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여건까지도 조성해 주신다. 사람을 붙여주시고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
오직 한 사람뿐(눅4:25-27)
예수님이 유대인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말씀을 증거하였을 때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하였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예를 들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감당키 어려운 경제적인 어려움이 언제까지 갈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우리 성도들은 주님이 찾으시는 오직 그 한 사람이 되어서 모든 필요를 채움받고 영육간의 질병을 치유받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 당시에 이스라엘에 과부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보냄을 받지 않고 오직 사렙다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았다.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문둥병자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의 군대장관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 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긍휼을 입지 못하고 이방인인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장군만이 긍휼을 입게 되었는가?
1.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은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당시나 예수님 당시나 마음이 닫혀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 듣고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렘다 과부와 나아만은 열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열린 마음은 가난한 마음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소유하게 된다. 마음이 가난하기에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가 말을 걸었을 때 대답할 수 있었다. 절망속에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는데 가난한 마음을 갖고 살았기에 엘리야의 말이 들렸던 것이다. 나아만 장군도 가난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자신이 전쟁에서 사로잡아 온 이스라엘 출신의 계집 종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전해들었을 때 그 말을 받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 열린 마음은 겸손한 마음이다. 사렙다 과부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어서 엘리야가 상식에 맞지 않는 요구를 할 때 자신의 처지를 공손하게 말할수 있었다. 그녀가 겸손하지 않았더라면 엘리야는 봉변을 당했을 것이다. 나아만 장군도 겸손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계집 종이 들려준 소식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자기가 섬기는 왕에게 어렵게 요청하여 머나먼 이스라엘까지 엘리사를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2. 사렙다 과부와 과부와 나아만은 순종하는 태도를 지녔다. 순종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갖어오는 열쇠이다. 말씀을 듣는 자는 많으나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적다. 사렙다 과부가 엘리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었다. 자기의 목숨만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인 아들의 목숨까지 달려있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이성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엘리야의 말에 그녀는 두 말하지 않고 순종하였다. 그 순종이 사렙다 과부는 물론 그 아들과 엘리야가지 3년 6개월 동안 심각한 기근 속에서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게 하였고, 나중에 아들이 죽었을 때도 도로 살아남을 받는 은총을 입게 하였다. 은혜위에 은혜였다. 나아만 장군도 엘리사의 처방에 순종하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하들의 간곡한 충언을 듣고 나아만은 자존심을 꺾고 엘리사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그리고 문등병이 깨끗이 고침받는 긍휼을 입게 되었다.
3.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은 하나님께 보답하였다. 은혜를 받는 사람은 많으나 하나님께 보답하는 사람은 희소하다. 그러나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임과 엘리야가 한 말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인정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렸고, 나아만은 신앙을 고백하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결단함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돌렸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답하는 자에게 긍휼을 입혀주신다.
두려워 말라(사41:8-16)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들을 두렵게 하는 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두려워하면 신앙을 잃게 되고, 의욕을 상실하고, 평안을 잃게 된다. 이스라엘은 두려워 할 일들에 둘러 샇여 있었다. 그들을 해하려 하는 사람들과 큰 산과 작은 산 같이 크고 작은 문제들이 두려움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두려워 말라'고 세 번씩이나 간곡하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살아날 수 있고,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두려움에서 건져내시려 하셨고, 오늘날 우리들을 두려움에서 건져내려 하신다.
1. 정감 어린 호칭으로 불러 주심으로 두려움을 몰아 내 주신다(8,14).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정스러운 호칭으로 불러주셨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나의 탣한 야곱아''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딱딱한 호칭보다는 정감어린 호칭으로 불러줄 때 마음이 안정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도 불러주셨다. 때로는 어릴적 별명을 불러 주는 것이 정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주님은 우리 각자를 잘 아신다. 본명은 물론이고 별명도 아신다. 머리털이 몇 개인지도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호감을 갖고 호감이 가는 호칭으로 불러 주신다.
2.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확인시켜 주심으로 안돈시켜 주신다(9,10상).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우리를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이시다. 우리 보호자는 세상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함께해주시는 것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요 축복이다. 우리의 보호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모든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 실패와 미지의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신다. 하나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할 때 마음에 안돈이 온다.
3. 하나님의 도와 주시마 약속하심이 힘을 더해 준다(10,13,14).
하나님은 세 번씩이나 이스라엘을 도와주마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도우심은 강력하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안될 일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은 전력을 다 기울여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두 가지 길밖에 없지만 하나님께만 만 가지도 넘게 길이 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방법은 무한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의지가 강하고, 우리를 도와주실 능력도 충분하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할 때 두려움은 멀리 사라지고 마음에 힘을 얻게 된다.
4. 결과를 알게 됨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해진다(16).
좋은 결과를 알게 될 때 현재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일에 정진할 수 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기쁨이 충만할 때 짜증나고 괴로운 기분이 사라지고 힘을 얻게 된다. 의욕이 충천하게 된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인하여 자랑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은 누구 앞에서나 떳떳하고 의연하다. 우리에게는 주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고, 자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총, 도우심,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심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성도가 되자.
아버지의 마음(마7:7-12)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어서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이 자식이 해야 할 도리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영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불만을 갖게 되고 감사를 모르게 된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되면 만족하고 여유 만만한 삶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1. 아버지의 마음은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어 누리게 하여는 것이다.(마7:9-11)
이 세상 부모의 마음은 누구나 똑같다. 부모의 신분과 행실이 어떠하든지 자기 자식에게만은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것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안다. 그래서 자식에게 필요한 것을 주려고 한다. 그러나 부모와 지식간의 세대차이로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된 성도의 필요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 하는 가장 좋은 것은 성령님이시다(눅11:13). 성령이 임하시면 삶이 달라진다. 자유를 누리며 만족함과 여유만만한 삶을 살게 된다. 평안과 슬기로움을 누리며 살게 된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으며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시고자하는 좋은 것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필요한 것을 필요한 때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것을 쌓아놓고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필요한 것을 공급받아 살기를 원하신다.
2.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얻는 길을 알려주신다(마7:7,8).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거저 주지 않으신다. 우리로 하여금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함으로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합작으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끌어 가실 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인도하시지만 과정에서는 인간이 할 일을 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게 하신다. 구할 때 얻게 하신다. 필요한 것을 찾게 하신다. 찾을 때 찾을 수 있도록 하신다. 문을 두드리게 하신다. 문을 두드릴 때 열리게 하신다. 구하지 않았는데 얻게 되거나, 찾지 않았는데 찾아지거나, 두드리지 않았는데 열리는 일은 없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찾거나, 문을 두드리지 않아도 무엇을 필요로 하고 원하는 지 다 아신다. 우리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인격을 다듬어 주시고, 성경의 삶을 회복시키고, 성경의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3. 아버지는 우리가 인간관계를 바르게 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마7:12).
성경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잘 표출되어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대표하는 것이다. 구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남에게 대접받고싶은 대로 대접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관게속에서 살아간다. 관게를 잘 맺고 유지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존중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러면 풍부한 경험과 경륜, 명철을 얻을 수 있다. 동년배나 동료들을 귀하에 여기고 아겨주어야 한다. 그러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친구와 같이 지내는 인생은 푸근하고 풍요롭다. 자신보다 어린 후배들은 사랑하고 위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일생을 열린 마음으로 살며 항상 젊게 살 수 있다. 새로운 지식과 흐름에서 소외당하지 않고 활기차게 살게된다. 인간관계를 잘하는 것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첩경이다.
은혜의 사닥다리(창세기28:10-22)
야곱이 벧엘에서 어느날 밤을 지낼 때 하나님께서 사닥다리를 놓으시고 천사들로 오르락 내리락 하게 하셨다(창28:13,14). 야곱이 돌 배게한 자리에서 보여준 환상은 바로 사닥다리였다. 이 사닥다리는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나리면서 자기의 어려운 사정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께 아뢰고, 또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가져다가 나에게 전달해주는 아름다운 통로였던 것이다.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본 신비한 사닥다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요14:6). 교회에 올 때 마다 우리는 이 사닥다리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한다. 붙들어야 한다.
첫째,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위를 보아야 올라갈 수 있다.
반드시 위를 바라보고 올라가야 한다. 성도는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된다. 과거가 화려해도, 추해도 우리는 과거를 지향하는 인생이 아닌 것이다. 앞을 보고 향해야 된다. 풍랑을 만나면 풍랑을 보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갈 때 파도를 보다가 빠졌다.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보면서 실망하고, 피곤한 심령들에게 하늘의 풍성한 위로와 놀라운 축복을 주시고자 하나님은 우리를 이 자리에 불라 놓으셨다. 등산시 사닥다리에 매달려 오도가도 못하는 사람이 내려오는 법."저 높은 곳을 향하여..." (히12:1).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스데반 집사.
둘째, 은헤의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사닥다리에 오르는 길은 위험한 길이라 조심하지 않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두 손을 꽉 잡고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디디면서 나아가야 한다. 사다리를 오르는 길이 천성을 향하는 성도의 신앙생활이라면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아야 한다. 인생이란 나무다리 위에 소가 걸어가는 것과 같다. 애굽에서 육십만이 나왔는데 광야에서 다 쓰러졌다(고전10:5,11,12).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사단의 역사는 아담때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리 믿음을 넘어뜨리는 사단의 유혹이 심하다. 에덴동산에서 시작된 사단의 유혹,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스럽게 탐스러운 유혹으로 많은 사람들이 넘어졌다. 하늘 나라 가기까지 조심해야 한다. 올라갈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 서 있는 사람이 넘어지는 것 보다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이 넘어지면 죽을 수 있다.
셌째, 사닥다리는 좁은 길이다.
사닥다리는 함께 가는 길도 아니고, 자유스러운 길도 아니고, 수난의 길이요 외 길이다. 아무도 함께 가는 길이 아니다. 신앙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길이다. 부모님이 잘 믿었다고 그 덕분에 내가 은혜받는 것 아니고, 아내가 기도 많이 한다고 내가 저절로 축복을 받는 게 아니다. 내 신앙 당신 신앙 따로 따로 신앙은 혼자 가는 길이다. 신앙생활은 부모나 친구나 모두가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내 믿음은, 내 상급은, 내 면류관은 따로 따로 있다. 사닥다리는 한 사람싹 올라가는 것이다. 결국은 나 혼자 가는 길이다. 진리는 외롭다.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을 때 정든 고향, 본토 친척을 더나 외로이 갔다. 죽어갈 때 주님만이 나의 동행자요, 주님만이 나의 걸어가는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수능고시. 신앙의 결단은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것이다. 나하고의 사움, 세상과의 싸움, 자연과의 싸움, 그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만이 이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마7:13-14). 하나님께 가는 길은 좁은 문이다. 진리의 길, 성공하는 길, 승리하는 길, 축복받는 길은 모든 사람이 많이 가는 길이 아니다. 일등하는 사람, 승리하는 사람, 영광받는 사람이 모든 사람과 함께 먹고 놀고 하다가 성공한 사람 한 사람도 없다.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이 탄생한 교회의 문. 좁은 문으로 들어와서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한다. 좁은 길이 바로 사닥다리 오르는 길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가는 길은 외롭다. 진리의 길은 고독한 길이다. 외로운 길, 소수의 길, 고달픈 길이다. 아무렇게나 사는 길은 넓은 길이다. 좁고 위험한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짐이 없어야 된다. 세상의 욕심을 줄이고 가볍게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넷째, 이 길은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길이다.
사닥다리는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평생 믿고 가는 길이다. 한번에 은혜를 다 받는 것이 아니고, 받은 은헤를 저금해 놓고 빼다 쓰는 것도 아니고, 매일 매일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 날마다 기도해야 하고, 주님을 붙들어야 된다. 사닥다리를 올라가는 사람은 하나 올라갔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올라가야 되는 것이다. 붙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는 것이다.
마라에서(출애굽기15:22-27)
이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건을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라는 고달픈 인생길의 현장이요, 우리가 지금 당면한 과로운 인생길이다. 마라는 가나안에 들어가는데서 만나게 된 중요한 과정이다. 마라에서 하나님이 집행하시는 시험에 다 같이 합격하여 치료받는 은총을 덧입자. 이스라엘이 마라의 경험을 통하여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뜻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심은 곤란케 하려 함이 아니요 은헤와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시26: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험하시는 내용은 무엇인가(출15:26).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해야 한다(삼상15:2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귀하다. 아담과 하와.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견고한 진이 쳐져 있다. 자기의 이론, 경험, 지식,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막는다면 마땅히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자원하여 견고한 진을 파하려 하는 성도에겐 은헤로 견고한 진을 파하게 해 주신다. 그러나 그럴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이 강권적인 역사로 견고한 진을 파하게 해 주신다. 강권적인 역사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는 역사이다. 자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은 구비한 복을 주신다(신28:1-6). 순종하지 아니하면 강권적인 역사와 저주가 임한다(신28:15-19). 바벨론 포로 70년.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속일 수 없다. 컨닝도 통하지 않는다. 마라와 같은 현실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기로 결단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행해야 한다(마6:33).
사람앞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야 한다. 어려운 세상이라도 바르게 사는 사람을 하나님은 받으시고 가까이 하시고(시15:1-5), 함께 하신다. 하나님은 성경과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바른 길을 가르쳐 주신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불의하게 살면 징계하신다. 불의를 하면서도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불의에서 돌이키기까지 역사하신다. 말씀으로 해서 안들으면 경고하신다. 경고해도 안들으면 강권적인 역사를 하신다. 왜 의를 못행하는가? 나라는 틀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고도 모르는 것이다. 공의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황금률이다(마7:12). 항상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당면하는 모든 일에 적용하면 우리가 행할 공의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행해야 할 공의를 깨닫게 해 주신다. 그 깨달음대로 실천하면 된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라고 정해 주신 법도와 율레를 잘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법도와 율레를 밝히 알아야 했다. 그리고 법도와 율레를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지켜 행해야 할 법도와 율레를 주셨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성경은 우리가 지켜 행해야 할 법도와 율레이다. 성경만이 우리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하는데 유일한 영원불변의 기준이다(딤후3:15-17). 마라와 같은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알아야 한다. 말씀에 길이 있다. 말씀에 우리가 살 길이 있다(시119;105).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을 새롭게 변화시킨다. 지혜를 주고 길을 보여 준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못된 습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이 고쳐준다(히4:12).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입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넷째, 하나님이 주신 규례를 지켜야 한다.
세상의 법률도 규레가 될 수 있다. 규레를 지킬 때 자신이 바로 서게 되고,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바로 서게된다. 국가와 사회가 정한 규례도 성경말씀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한 지켜야 한다. 노아는 하나님이 방주를 지으라고 가르쳐 주신대로 준행하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서를 위해 규레를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세워주신 규레를 지키기를 요구하신다. 노아는 방주를 짓는데 하나님이 지시해 주신대로 준행하였지만 우리는 신앙의 작품을 만드는 일에 하나님이 주신 규레를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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